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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8)화 (48/123)

48화

평소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담담하지만은 않았다. 조금 갑갑한 듯도 했고, 화난 것 같기도 했다.

“온 대장군 덕이에요. 그자가 황제를 지켰습니다. 그자 덕분에 황제가 그 비루한 목숨을 부지해 반정을 일으킬 기회를 얻은 거라고요.”

온의 이름을 발음할 때 가윤의 어투는 깨진 듯 뾰족해졌다가 겨우 무던해졌다. 주안은 그녀를 골똘히 살폈고, 그녀는 감정을 삼켰다.

“대장군은 황제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할 거면 진즉 했겠죠. 그자가 멍청하거나 무력해서 여태 황제가 시키는 대로 변방에서 구른 게 아닙니다. 본인의 선택이에요.”

선황의 유일한 적통인 온을 꾀어 천첩 소생인 륜을 무너트리려는 세력이 예전에는 없었을까?

분명 적잖은 이들이 주안과 똑같은 생각을 품고 지금껏 온에게 접근했으리라고 가윤은 생각했다.

그러나 온은 고집 센 평화주의자. 온화할지언정 유약하지는 않았고, 황태자 시절에 이복형을 싸고돈 것도 결코 성정이 물러서는 아니었다.

만약 그가 줏대 없이 착하기만 한 작자였다면 어머니와 외척들에게 휘둘려 륜이 살해당하거나 쫓겨나는 걸 애처롭게 보고만 있었겠지.

강하고도 선한 동생 덕분에 륜은 끝까지 살아남아 최종 승자가 되었다. 온도 비록 태자 자리를 뺏겼으되 본인의 목숨을 건졌고 모친의 생명도 지켰다.

가윤은 온을 아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군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적으로 여기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러니 괜히 그자한테 손 내밀었다가 역으로 밀고 당하지나 마세요. 아주 대단한 형제애를 가진 사람이니까요.”

가윤은 새침하게 당부했다. 주안은 이제 꽤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가윤아, 그 사람 싫어해?”

주안은 가윤의 무감정함이 익숙했다. 저렇게 대놓고 비꼬는 것도 희귀한 축에 속했다. 싫어하는 감정도 어쨌든 감정이었다.

“……원망하는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못 말하겠습니다. 그자가 수순대로 황제가 됐다면 그의 형이 그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요.”

가윤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유치한 감정이라 마음이 쓰렸다.

“그리고 정작 그자는 멀쩡하잖아요.”

원망. 질투. 전부 부끄럽고 비합리적인 마음이었다. 5년 전 형에게 자리를 빼앗기고도 비교적 무사했던 그분에 대한 증오. 실은 그리움.

나는, 당신한테 누구보다 힘이 됐을 내 가족은, 그날 당신의 그 잘난 형님 때문에 나락에 처박혔는데.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거야, 그 사람한테 실망한 거야?”

주안은 질문을 바꿨다. 이번에는 대답하기 더 어려웠다. 가윤이 머뭇대자, 주안이 슬프게 덧붙였다.

“혹시, 아직도 혼담에 미련 남았어?”

한때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였던 네게 묻는다.

대장군과 엮이는 걸 극도로 피하는 네가 정말 단지 정치적 이유로 그러는지, 아니면 네 마음에 아직도 찌꺼기 같은 애착이 남은 건지.

가윤은 주안을 묵묵히 쏘아보았다. 거봐,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네가 지금은 그 인간 사내 때문에 저런 눈빛을 짓고 있잖아. 주안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애초에 미련으로 남을 만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가윤은 선을 그었다. 주안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아슬아슬한 거리가 전보다도 멀어질까 두려워 애써 참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는 담담하게 한마디만 내뱉었다. 가윤은 물을 마시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만약 그게 네 뜻이라면, 가윤아, 대안을 생각해야 해. 새 황제를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반정을 꾸미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주안은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가윤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집중하려 애썼다.

“어떻게 할 거야?”

주안은 온유하게 답변을 촉구했고, 가윤은 짧게 궁리한 끝에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았다.

“만나 봤으면 하는 이가 있습니다.”

역시, 대책 없이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다.

제9장. 외출

처음 온에게 검술을 배우게 됐을 때, 류하는 자신이 수업을 핑계로 시동생에게 한층 마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여기서 더 좋아지면 곤란한데.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류하는 그 사실을 불과 수업 하루 만에 깨달았다.

“월빈마마, 검을 그런 식으로 잡으시면 안 됩니다. 몇 번 휘두르기도 전에 손목뼈가 나갈 일이 있습니까?”

“월빈마마, 그렇게 무작정 정면으로 내지르면 마마 몸이 힘들기만 하고 그 어떤 실질적인 효과도 없습니다. 이렇게 내리긋는 연습부터 하세요.”

“월빈마마, 벌써 지치셨습니까? 검이 너무 무겁다고요? 그럼 목검으로 자세를 잡는 방법부터 연습하십시오. 나무가 쇠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잠시 쉬고 싶으시다고요?”

“마마, 쉬는 시간 끝입니다.”

으아아, 그만해! 류하는 품위도 연정도 잊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온에게 소리칠 뻔했다.

아주 좋아, 이대로 가다간 그대가 내 첫사랑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겠어.

“마마, 지금 시위하시는 겁니까?”

하하, 어떻게 알았지? 류하가 피로와 짜증에 찌든 얼굴로 연습용 검을 허공에 붕붕 내두르자 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비를 베풀었다.

“피곤하시면 피곤하다고 말로 하십시오. 절 죽이려고 하지 마시고요.”

“……죽이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슬슬 구미가 당기네요.”

“네?”

“그대를 죽이려 한 적 없다고요.”

“아니, 그거 말고 두 번째 문장…….”

“됐고요, 나 정말 쉬었다 해도 됩니까?”

“네, 차라리 쉬십시오. 이러다 정말 누구 하나 죽겠습니다.”

온이 류하의 손목을 가볍게 싸쥐어 검의 움직임을 막았다.

살갗이 맞닿아 몸속이 뜨거운 건, 그저 여름의 백열 아래 종일 연습하느라 체열이 올랐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검을 마구 내저었다가는 곁에 있는 사람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알겠으니까 제발 좀 꺼져 줘. 류하는 속으로 절박하게 구시렁댔다. 훈계를 하는 건 좋은데, 간격이 너무 비좁았다.

별 같잖은 생각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지금 내 몸에서 땀 냄새 날 텐데, 등등.

폭포수처럼 이어진 온의 잔소리로 인해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와중에도, 자신의 귓가에 쏟아지는 그의 숨결이 달콤해서, 곤혹스러웠다.

“이 정도면 처음 검을 잡아 보시는 것치고는 몹시 훌륭하신 편입니다. 그러니 조금 쉬셔도 문제없습니다.”

온은 침착하게 타이르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제야 류하는 제대로 호흡했다.

“물을 좀 드십시오.”

온은 공손하게 수통을 내밀었다. 류하는 통을 받아 물을 들이켜며 온을 등졌다.

온은 수련을 위해 하나로 올려 묶은 길고 검은 머리칼 아래 희게 반짝이는 목덜미를 잠시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대는 언제부터 검을 배웠습니까?”

“저야 아주 어릴 적부터 배웠지요. 황족의 기본 소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전장에 나가 직접 군사들을 지휘하고 누군가를 베려고 배운 것은 아니었겠지. 황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까. 류하는 물을 다시 삼키며 뒷말도 삼켰다.

“어때요. 나는 좀 소질이 있는 것 같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정도면 훌륭하신 편입니다.”

“다행이네요.”

온이 담백하게 칭찬하자 류하는 살짝 우쭐대며 웃었고, 온은 자칫하면 마주 웃을 뻔했다. 후회할 만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는 표정을 다잡았다.

“그나저나, 대장군. 내가 일전에 황후 전하께 청을 하나 드렸습니다. 조만간 외출해서 저잣거리를 둘러볼 예정이니, 그대가 그날도 내 호위를 맡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저잣거리요?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류하가 쉬는 시간을 틈타 간략하게 털어놓자 온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류하는 선선히 덧붙였다.

“이제 혼례도 무사히 끝났고 하니, 궐 안에만 있기에는 답답해서 내가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나도 휘국의 황족으로 살아갈 텐데, 도성의 풍경이 어떤지는 알아야지요.”

이제는 국혼도 끝났겠다, 항상 궐 밖의 세상이 궁금했던 류하는 저를 향한 대중적 관심이 어느 정도 사그라진 틈을 타서 출궁 허락을 구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새신부로서 품행을 단정히 하고 예식을 준비하며 여러모로 바빴지만, 정작 정식으로 후궁이 되고 나자 그녀는 훨씬 여유로워졌다.

고국에서는 별궁 안에만 갇혀 있다가 막상 타국으로 넘어오자 시내 구경을 나가는 게 우스웠다. 그러나 우습든 말든, 일단 즐겨야겠지.

“알겠습니다. 저와 제 부하가 동행하도록 하죠.”

호위를 부탁하는 류하의 말에 온은 담담히 약속했다. 류하는 빙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저 미소에 눈이 멀지 않는 건 퍽 어려운 일이었다.

표면만 잔잔한 호수처럼, 나날이 그렇게 침잠했다.

일곱 번째 후궁의 혼례가 끝나고 약 보름쯤 지났을까. 류하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초야 이후, 황제는 단 한 번도 월빈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그 이방인 계집이 밤에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나 보지? 몇몇 못돼먹은 궁인들이 그렇게 수군댔지만, 진실은 소수만 알았다.

류하는 아랫것들의 악의적인 숙덕거림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래, 맘대로 떠들어라, 맘대로 떠들어.’

정작 그녀는 황제가 첫날 이후로 걸음을 끊은 덕분에 밤마다 행복하기만 했다.

외려 난감한 건 제하 포함, 류하가 고국에서 데려온 애들이었다.

우리 마마께서 처음부터 황제의 노여움을 사 젊은 나이에 벌써 독수공방하는 걸까 봐 얼마나 걱정하던지.

“폐하께서 여인 보는 눈이 너무 짧아서 그렇습니다. 마마와 같은 미인을 보고도 이렇게 냉담하시다니요.”

심지어 제하는 어느 날, 류하의 이부자리를 정돈하던 중에 울먹이며 속닥였다. 방 안에 단둘이 남을 걸 확인하고 건넨 말이었으나, 류하는 여전히 한숨지었다.

“제하야, 내가 누누이 말했잖니? 궐에서는 침묵이 생명이란다.”

그래도 나름 제 상전을 챙기는 모습이 기특해서 류하는 인자한 눈으로 제하를 쓱쓱 쓰다듬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시무룩해하는 누군가 있다는 게 결코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대의 형님이 나를 신부로 들여놓고서는 정작 첫째 날 이후로는 털끝조차 건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하지만 당연히, 류하는 묻지 않았다.

드디어 외출 날짜가 도래했다. 오전에 나가서 종일 구경하다가 통금이 시작되기 전에 궐문을 다시 넘기만 하면 되는 예정이었다.

온과 온의 부하 한 명, 그리고 몸종 역할의 제하가 동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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