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왜 이런 놈들이랑 같이 있어?”
맑고 명랑한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의 주인은 두 번째로 칼을 날려 또 다른 사내의 목을 그었다. 비명이 터지기 전에 피가 먼저 흘렀다.
“기분 나쁘잖아.”
세 번째 죽음, 세 번째 시체. 머리와 분리된 몸뚱이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고작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라고 널 혼자 둔 게 아닌데.”
도깨비는 바닥에 흥건한 핏물을 밟으며 여인에게 나아갔다. 여인, 가윤은 담담하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도깨비, 주안은 작게 실소했다. 지금은 둔갑술을 쓸 필요가 없어서 눈이 보석처럼 새파랬다.
“사과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주안을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까 죽은 사내의 무례 때문에 흐트러진 가윤의 옷차림을 단정하게 정돈해 주었다.
그녀의 뺨에 피가 한 방울 묻어 있었다. 그는 그것도 부드럽게 닦았다.
“그냥, 내가 속상해서 그렇지.”
수도에 도착한 지 며칠째, 가윤은 당분간 혼자 다니고 싶다고 청했다.
그리운 추억도, 끔찍한 기억도 전부 얽힌 이곳에서 자칫하면 흐트러질까 두려웠던 거겠지. 가윤은 주안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걸 싫어했다.
가윤의 지나친 독립심이 주안은 늘 섭섭했지만, 그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는 게 서툴렀다.
결국 독점욕을 꾹 참고 그녀를 보내 주었는데, 웬걸. 몇몇 악취 나는 쓰레기 때문에 재회가 앞당겨졌다.
“안 무서웠어? 괜찮아?”
주안은 평소의 발랄함을 잊고 우울한 근심을 담아 다정하게 물었다.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그를 보고 가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서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선한 사람이었다면 별일 없었을 테고, 악한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나를 구했을 테니까요.”
가윤은 겉모습으로 남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딱 봐도 음산하게 생긴 놈들이긴 하지만, 어디 한번 기회를 줘 보자.
정말 그들이 길을 잃은 가련하고 선량한 사내들이라면, 자신은 착실히 지름길을 안내하여 본인도 선량하게 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너희는 어차피 죽겠지.
너희가 착하게 굴었으면 목숨을 건졌을 텐데 너희가 못되게 굴었으므로 목이 따였으니, 자업자득이다. 죄책감은 없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지나친 거 아니야?”
주안이 낮게 혀를 찼다. 짐짓 쾌활하거나 상냥한 태도로 본심을 감췄으나, 그는 사실 자신이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찔해서, 두려워서.
“그럴 리가요. 믿을 만하니까 믿는 겁니다.”
가윤은 담백하게 반박했다. 저 꾸밈없는 단언 앞에서 주안은 말을 잃었다. 그러다 안색을 굳히며 시선을 돌렸다.
“정말, 정말 곤란해.”
그가 중얼거렸다. 양손이 저절로 주먹이 되었다. 그의 뾰족한 귀 끝이 조금 붉어졌지만, 가윤은 부러 모른 척했다.
“일단, 여기 뒤처리부터 하자.”
주안이 대뜸 말했다. 그가 발치의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악몽 같은 핏빛 장면을 보고도 그는 태연한 표정이었고, 가윤은 살짝 메슥거렸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 가윤? 얘네도 되살릴 거야?”
주안이 발끝으로 절단된 머리 하나를 쿡쿡 찔렀다. 가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치우십시오. 이것들은 재활용할 가치도 없습니다.”
“뭐, 그렇다면.”
주안이 손을 내젓자 새파란 불꽃이 허공에 맺히더니 시체들을 잡아먹었다. 아찔한 빛이 잠시 눈을 찔렀고, 직후, 그을음만 남았다.
“이제 갈까? 배고파.”
주안은 다시 밝아졌다. 가윤은 종잡을 수 없이 널뛰는 그의 기분을 굳이 해석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도 다만 솔직하게 답했다.
“저도 시장합니다. 어서 가시죠.”
방금 불타 없어진 시체는 이제 과거의 일에 불과했다.
큰길로 나오기 전에 주안은 다시 둔갑술을 썼다. 눈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귀 끝이 둥글어졌다. 가윤은 잠시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주안은 소년처럼 수줍게 물었다. 가윤은 시선을 피했다. 그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매번 신기해서요.”
사실, 아쉬워서요. 당신이 내 곁에서 살아가기 위해 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 감춰야 한다는 게.
“저도 모습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자유자재는 아니야.”
“종족적 특징이 아예 바뀌는 거면 엄청난 거 아닌가요?”
“이건 도깨비랑 인간의 외형이 원래 비슷해서 그렇지. 서로 애초에 되게 달랐으면 둔갑도 훨씬 어려웠을걸.”
주안은 친절하게 설명하며 인간의 모습으로 으쓱했다. 이윽고 먹색 눈을 빛내며 유쾌하게 빙긋 웃었다.
“이제 가자, 가윤아.”
두 사람은 시내의 어느 음식점에 들어갔다. 방마다 벽으로 분리된 업소였다.
다른 이들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을 자주 하는 그들은 이렇게 밀폐된 공간을 선호했다.
“동족들은 전부 만나 보셨습니까?”
“응, 만나 봤어. 다들 여전하더라.”
“……왜 굳이 도깨비들이 인간들 틈에 섞여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마다 둔갑을 유지해 가면서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대화하던 중, 가윤은 자신이 늘 의아해하던 바를 불쑥 물었다. 주안은 살짝 쓸쓸하게 답했다.
“번거로워도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지. 도깨비 개체 수가 이렇게까지 줄지 않았으면 그럴 이유도 없었어. 우리는 심심한 걸 못 참는 천성이거든.”
주안은 잠시 물을 마셨다. 가윤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혼자면 따분하고 외로워서 미칠 것 같은데, 같이 어울릴 동족은 곁에 거의 없고. 원래 우리가 종족 따져 가며 어울리는 편은 아니긴 했지만.”
주안은 잔을 내려놓으며 산뜻하게 부연했다. 그러나 가윤은 속지 않았다. 저 경쾌한 표정 아래 얼마나 짙은 증오가 있는지, 그녀는 오래전에 이미 배웠다.
“그나마 인간이 수적으로 가장 무난해. 가장 많으니까, 모습만 잘 속이면 제일 쉽게 섞여 살 수 있어. 그래서 다들 이러는 거야.”
주안은 가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는 마주 웃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굳은 낯을 피해 다시 물을 마시는 척했다. 그때 문득, 가윤이 물었다.
“당신도 심심한 게 싫어서 저를 거두신 겁니까?”
주안이 멈칫했다. 그가 가윤을 돌아보았다. 가윤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고, 어쩌면 절박하기도 했다.
“설마.”
주안은 가윤과 함께 있다 보면 자주 그렇듯 이번에도 부드러운 실소를 흘렸다. 그가 잔을 움켜쥔 채 나긋하게 실토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여워서였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기본적인 양심이랄까.”
집안 어른들이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면서 혼자 살아 도망친 인간 여자.
엉망이 된 몰골이 불쌍했다. 굳이 악의를 품을 이유가 없어 주안은 무심코 다가갔다.
그리하여 그날 그는 그녀를 살렸고, 그녀는 평생의 은인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어서, 어서 말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부추겼다. 주안은 가까스로 물리쳤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너랑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건 사실이야.”
주안은 기어코 애매하게 둘러댔다. 가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감정이 안도인지 실망인지도 헷갈렸다.
때마침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고, 두 사람은 당분간 식사를 핑계로 침묵했다.
“그럼 이제, 네 복수 얘기를 해 보자.”
그릇이 하나씩 비어갈 때쯤에 주안은 다시 경쾌해진 어투로 속삭였다. 말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라 음성은 바짝 낮췄다. 음식을 씹던 가윤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방법은 그럴싸하고, 수단은 정해졌어. 그리고 내 종족의 협조 약속은 이미 확보했는데, 너희 쪽이 문제란 말이야.”
너희, 라 하면 인간이었다. 자신과 주안이 ‘너희’와 ‘우리’로 쉽사리 갈리는 것을 들을 때마다 가윤은 묵묵히 다짐했다.
절대, 절대 마음에 품지 말자. 어차피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걸.
“변방의 각지에 시체 군단을 풀어 혼란을 일으키고 중앙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제국에 원한이 있는 다른 도깨비들은 돕겠다고 약속했고. 인간들은?”
“제 동족 중에도 제국을 미워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당장 저와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 수두룩하죠.”
복수의 형태는 반드시 반역이어야 했다. 가윤의 증오와 살의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였기에.
륜이 반정을 통해 즉위할 때 적잖은 피바람이 불었고, 가윤의 가족은 비참하게 휘말렸다.
“야심이 있는 자들도 많습니다. 꼭 원한이 없더라도 얻고 싶은 게 따로 있어서 기꺼이 현 황실을 흔들 자들이요. 그런 자들을 물색해서 포섭하겠습니다.”
“그래, 동기가 야심이든 원한이든 동참하겠다는 자야 어디엔가 있겠지. 그런데 가윤아, 그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은 누가 할 거야? 네가?”
가윤이 멈칫했다. 익숙한 흐름이었다. 주안은 가윤의 합리적인 망설임을 파고들었다.
“온 대장군과 손잡자, 가윤아.”
예전부터 주안이 끈질기게 제안한 바였다. 가윤의 눈가와 입매가 비슷한 정도로 굳었다.
“태후의 안위를 보장한다고 약속하고 마땅한 자리를 돌려주겠다고 설득하면 그자도 흔들리지 않겠어? 정말 같은 편으로 돌아서면 더 좋고.”
서로 조금씩 다른 이유로 현 정권을 뒤엎기 위해 물밑에서 연합한 자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상징이자 수장이 되어 줄 자는 누구일까.
황정에 익숙해진 인간들에게 이제 와서 다른 정치 체제를 제시할 수도 없었다.
현 황제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새 황제가 필요했다. 이건 혁명이 아닌, 단순한 교체일 터.
“주안 님. 현 황제가 어떻게 보좌에 올랐는지 아십니까?”
잠시 가만히 있던 가윤이 대뜸 물었다. 주안은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선황 치하에 소외됐던 귀족들과 손잡고 아비의 목을 쳐서 보좌에 올랐지. 그걸 왜 물어?”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 오히려 감을 잡기 어려웠다. 혼란을 느끼는 주안을 보며 가윤은 나직하게 설명했다.
“그 뜻이 아닙니다. 애초에 황제가 어떻게 그때까지 살아남아 반정을 도모했느냐 묻는 거예요. 어떻게 그랬는지 아세요?”
가윤은 식당에서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술처럼 들이켠 뒤, 잔을 탁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