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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6)화 (46/123)

46화

“물을 좀 드십시오. 냉수입니다.”

“고맙습니다, 대장군.”

류하는 온이 건넨 물통을 받았다. 참으로 다정한 사람. 아니, 그저 호위 무사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사람. 그 이상을 바라는 건 파국이었다. 자신이 다른 사내와 몸을 섞었든, 않았든.

“그나저나, 대장군. 내가 그대에게 배움을 청할 일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나보고 그대에게 검술을 배우라 하시더군요.”

“푸읍!”

류하는 여러모로 당황했다. 본인도 물을 마시며 얘기를 듣던 온이 너무 놀라서 당황했고, 그가 품위 없이 입 안에 든 물을 뿜어서 당황했고, 그 물이 제게 방울방울 튀어서 당황했다.

“대장군…….”

나, 방금 좀 마음이 식었어. 다행이야, 이제 짝사랑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류하는 살짝 차가워진 눈으로 온을 보았다.

“내가 그렇게 싫으면 싫다고 말하세요. 내게 침을 뿌려서 진심을 표현하지 마시고.”

“푸읍, 쿨럭, 컥! 시, 싫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침을 뿌렸다니, 왜 상황을 그렇게 곡해하십니까? 이건 엄연히 물입니다, 물.”

“아아, 그래요? 맞아요, 그대의 입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바깥세상으로 뛰쳐나온 물이죠. 그대의 입 안은 침 한 방울 없이 말라비틀어진 사막인가 봅니다. 어찌 그새 물과 침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을까요.”

“마마, 정말로 싫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나도 갑작스럽네요. 누군가 나한테 침과 물을 뿌린 건 처음이라서.”

“억울합니다. 그건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온은 창피함에 잠겨 허우적대며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고, 처음에는 그저 쌀쌀맞던 류하는 슬슬 시동생을 놀리는 재미에 눈을 짓궂게 빛냈다. 그녀는 입술을 물어 웃음을 참았다.

“그래서 어쨌든, 황명입니다. 폐하께서 그대에게 직접 내린 건 아니지만요. 내게 기마를 가르쳐 줬듯, 검술도 가르쳐 주면 됩니다.”

“마마, 검술은 기마와 차원이 다른 기술입니다. 사고가 일어나기 훨씬 쉽다는 뜻입니다. 검술을 쓰는 본인도 더 쉽게 다치고, 자칫하면 주변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대가 나를 꼼꼼히 가르치면 되겠네요.”

“……그럴 자신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죠?”

“애초에 왜 굳이 검술을 익히려고 하십니까? 제 호위가 그리 못 미더우셨습니까?”

이제 온은 제법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류하는 다시 입술을 물어 웃음을 참아야 했다. 삐쳤어? 그건 그것대로 귀여웠다. 아, 귀여우면 안 되는데.

아까 잠시 식었던 애정이 재차 온화하게 샘솟았다. 절망적이었다.

‘그나저나, 어쩜 형제가 말도 서로 똑같이 하냐.’

온의 호위가 못 미덥냐고? 그럴 리가.

그녀는 그가 자신을 한 팔로 보호하며 나머지 팔로 장검을 휘둘러 시체들을 베는 모습을 봤다.

그걸 보고도 그의 실력을 의심한다면 그건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거나, 어딘가 심히 삐뚤어진 걸로 봐야겠지.

류하가 처음 검을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륜도 똑같이 되물었다. 현재 호위가 미덥지 않냐고. 형과 동생의 질문이 같은 게 이상해서 류하는 잠시 침묵했다.

동생을 몰아내고 황제가 된 동생과 그런 동생에게 충성하는 형. 서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비슷한 그들. 그들의 관계는 대체 무엇으로 정의하면 좋을까.

“그대가 못 미더운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나는 무작정 남에게만 기대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제국의 여인들은 원래 호신술을 익힌다면서요.”

마지막 문장에서 온은 마음이 대폭 누그러졌다. 그는 하빈과 예빈이 공주와 신경전을 벌이며 은근히 깔보는 눈빛을 보였던 걸 기억했다.

류하가 소국에서 온 유약한 이방인이라 하여 업신여김을 당하는 걸 원치 않았다.

황족으로서 황실의 체면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공주가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

자신이 중증을 넘어서 거의 임종 직전까지 간 상태라는 사실을 온은 순순히 인정해야 했다.

“무엇보다, 제가 혹 위험에 처할 때마다 사술에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요.”

류하의 음성이 조금 낮아졌다. 온도 덩달아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흘긋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지켜 드릴 테니까요.”

내 본분에 따라, 또한 당신께 드린 약속에 따라. 이어서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마마께서도 검술을 익히실 테니, 그럴 일은 더더욱 없겠지요.”

류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 저런 환한 미소는 반칙인데. 온은 몰래 괴로워졌다.

“방금 그 말은, 그대가 내게 검을 가르쳐 준다는 뜻이지요?”

“안 가르쳐 드리고 배기겠습니까?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지요.”

“아까는 거역할 것처럼 싫어하더니. 나한테 침까지 튀겼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침이 아니라 물…….”

온은 황망히 항변했다. 그러자 류하는 다시 웃었다.

“네, 알아요. 알면서도 그냥 말한 겁니다.”

놀림당하고 억울해하는 그대가 귀여워서. 류하는 뒷말을 꼴깍 삼키며 눈매를 둥글게 접었다. 그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한 온은 현기증을 느끼며 잠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대장군. 여태 늘 그래 왔듯.”

류하는 웃으며 인사했다. 이렇게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그대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부끄러운 역사는 잊고, 어떻게든 관계를 수습해 보자.

좋든 싫든 시동생과 형수로서 계속 얼굴을 맞대야 할 사이니, 기왕이면 좋은 게 낫겠지.

나 혼자만 서서히 잊으면 돼. 내가 어떻게든 잊기만 하면 돼.

그대 역시 나를 마음에 담지 않는 이상, 모든 게 괜찮을 거야.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마.”

온은 공손히 아뢰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낙담했다. 당신의 곁을 더욱 긴밀하게 맴돌 또 다른 핑계가 생긴 것에 대해, 또한 그로 인해 은밀히 기뻐하는 자신의 진심으로 인해.

어젯밤 내 형과 맺어진 여인을 마음에 담아서 대체 어쩌려고.

온은 정답을 외면했다.

제8장. 원수

륜 황제가 즉위한 후 치른 일곱 번째 혼례에 대해 민중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황제의 혼사를 송축하는 뜻으로 술과 고기가 풀렸으니 기쁘긴 했고, 외국에서 왔다는 공주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제 벌써 일곱 번째라 흥미가 좀 떨어졌달까.

게다가 국혼에 직접 초대받았고 황궁에 자주 들락거리는 고위 관료들과 달리, 평범한 백성들이야 고귀한 후궁의 얼굴을 볼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교적 쉽게 잊었고, 곧 다들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토록 평범한 하루, 평범한 저잣거리에서 평범한 인상의 여인이 평범한 복장으로 벽에 기대 있었다.

품에 단검을 감췄다는 점에서 사실 그리 평범한 이는 아니었으나,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자면 특이한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저기, 낭자. 우리가 길을 잃어서 말인데.”

그리고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자면, 그녀는 만만하기 그지없는 표적이었다. 총 세 명의 사내는 그런 판단 아래 여인에게 나아왔다.

“길을 좀 안내해 줄 수 있겠소?”

딱 봐도 껄렁한 분위기가 흐르는 질 나쁜 패거리였으나, 그들과 달리 그 여인은 외모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담담히 반응했다.

“물론이죠. 어디로 향하는 길인가요?”

“여기 적힌 주소로 찾아가려 하는데, 아무리 쏘다녀도 대체 어디 있는 곳인지 모르겠구려.”

사내 하나가 종이 하나를 꺼내며 여인에게 성큼 다가왔다. 거리가 지나치게 좁아지자 여인은 불편해졌다. 불편함은 불쾌감과 동반했다. 사내의 몸에서 옅은 악취가 풍겼다.

“저, 여기 알아요. 이쪽으로 가면 지름길이에요. 따라오세요.”

여인은 차분하게 답하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음흉한 미소를 감추며 여인을 뒤따랐다.

여인은 모퉁이를 돌아 한적한 골목에 진입했다. 사내들의 눈빛이 한층 저열해졌다.

‘하, 멍청한 년.’

‘이게 웬 횡재야.’

‘일이 더 쉽게 됐어.’

호위도 무기도 없이 혼자 무심히 서 있는 여인을 보고 음란한 욕심을 품은 그들은 어떤 수를 써서든 여인을 꾀어 으슥한 곳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저 아둔한 계집이 지름길이랍시고 알아서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자, 그들의 천박한 본능은 쾌재를 불렀다.

“낭자, 더 갈 필요 없겠는데.”

“네?”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 같거든.”

사내 하나가 걸걸하게 조롱하며 여인의 팔을 휘어잡았다. 여인은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으나, 신음하거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소리를 낼 생각도 없었거니와, 사내가 나머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어차피 기회도 없었다.

“우릴 안내해 준 값으로 좋은 경험을 선물해 줄게. 낭자도 만족할 거야. 그리고 소리는 지르지 마. 시끄럽게 굴면 재미는 장담 못 한다, 어?”

여인의 팔을 틀어잡은 사내가 비열하게 속삭이며 여인의 입에서 손을 치우고 단검을 꺼냈다. 칼날이 여인의 목에 닿았다.

여인은 경멸을 담은 눈으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야, 또 네가 먼저야?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너는 형님한테 양보 좀 하고 살아라. 간만이잖아, 어?”

“씨발, 형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인은 더러운 말에 에워싸였다. 여인의 등이 벽에 닿았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를 압박했다. 여인은 이제 대놓고 한숨지었다.

“역겨워.”

“뭐라고?”

여인이 차갑게 중얼대자 사내 하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러자 여인은 음량을 높여 한결 또박또박 비난했다.

“역겹다고.”

여인의 침착한 지탄에 사내들은 차라리 얼이 빠졌다. 이제는 자신들의 청각을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여인은 그들을 하나씩 빤히 뜯어보며 냉담하게 저주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더러운 놈들.”

사내들의 당황이 끝났다. 그들은 이제 추잡하게 분노했다.

기껏해야 예쁘장한 먹잇감으로 여긴 비루한 계집이 감히 조곤조곤 자신들에게 대들자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이년이 진짜, 뚫린 입이라고……!”

그중 가장 격분한 사내가 거칠게 손을 뻗었다. 이대로 여인을 붙들고 자신의 탐욕을 채운 뒤 건방진 계집을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여인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고, 공중에서 피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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