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5)화 (45/123)

45화

이제 류하는 황제를 원망했다. 미친 척 그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며 솔직하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기요, 저 당신 동생한테 고백했거든요? 고백했다가 차였거든요? 그 인간이 하필 제 첫사랑이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우리 모두 이제 가족이랍시고 필요 이상으로 붙어 다니게 하지 말아 주세요, 네? 라고.

“그래, 그러도록 하게.”

륜은 태연하게 승낙했고, 차마 그를 대놓고 쏘아볼 수 없는 류하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려 표정을 감췄다.

“망극합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여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속으로만 우울하게 비꼬았다.

황제가 먼저 떠난 뒤, 류하는 신방에서 본인의 처소로 이동했다.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나갈 채비를 하는 내내 류하는 심장이 뻐근할 만큼 빨리 뛰었다.

그대가, 하필 내 첫사랑이 된 그대가, 나를 처소까지 모시기 위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모시겠습니다, 월빈마마.”

그러나 오전에 류하의 호위를 맡은 병사는 대장군의 부하였고, 류하의 심장은 바닥으로 망연히 추락했다.

“그래, 안내해라.”

류하는 안도했다. 절망했다. 즐거웠다. 괴로웠다. 온을 보는 것은 기쁨이자 고통이었고, 그를 보지 않는 것도 축복이자 고문이었다.

이런 모순적인 마음이 사랑이라니. 전혀 예쁘지도, 선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잖아.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도대체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를 만큼.

오전 내내 류하는 혼자 있었다. 가끔 제국의 궁녀들이 오갔다. 원기를 회복하고 다산을 돕는 성분이라며 그들은 차를 내왔다.

어차피 초야를 치르지 않은 제겐 쓸모없는 약이라고 여겼지만,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기에 류하는 고분고분 찻잔을 들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흘렀다. 그대 없이는 너무 길기만 한 시간.

이쯤이면 호위를 교체했거니, 싶을 때쯤에 류하는 문밖을 빠끔히 관찰했다. 기쁨, 또는 고통을 기대하며.

기쁨이기도 하고 고통이기도 한 사내의 윤곽이 류하의 눈에 오롯이 담겼다.

“대장군.”

벅찬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류하는 위태롭게 불렀다. 느낌표로 터질 뻔한 부름을 가까스로 짓뭉개 담백한 온점으로 포장했다.

“월빈마마.”

온은 예정된 것처럼 화답하며 즉각 뒤돌아 그녀를 마주했다. 두 쌍의 시선이 마주쳤고, 온은 어제보다도 더 비참해졌다.

저기 내가 좋아하게 돼 버린 여인이 있다. 내가 좋아하게 돼 버렸고, 내 형수님도 돼 버린 여인.

어제 분명 내 형과 초야를 치렀을 텐데, 언제나처럼 맑고 예쁜 눈으로 나를 직시하고 있다.

“대장군, 날씨가 참 좋네요. 연습장에 가서 말을 몰고 싶습니다만.”

침묵이 한없이 길어지자, 류하는 잽싸게 말을 뱉었다. 바보처럼 얼어 있던 온은 급히 자신을 추슬렀다.

“오늘은 좀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온은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했다. 어젯밤 초야를 치르셨잖아요? 사내를 받아들이고 나면 여인은 다음 날 몸이 아프기 마련이라고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었다.

“아니요, 난 멀쩡합니다. 반드시 말을 몰아야겠어요.”

류하는 결연하게 고집했다. 온이 문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상, 침소 안에 얌전히 갇혀 있는다면 미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마마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온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류하는 찡그리듯 웃더니, 그의 얼굴에 대고 문을 닫았다.

졸지에 문전박대를 당한 온은 황당해서 문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삼키며 눈썹을 모았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나도, 당신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어젯밤 다른 사내와, 그것도 내 친형과 몸을 섞은 여인을 보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써야 하고, 당신은 이미 나한테 한 번 차여 놓고 뭐가 그리 살가운지.

‘……나 좋아한다며?’

유치하고 어두운 심술이 뒤늦게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온은 문을 다시 쏘아보았다. 쏘아보는 것치고는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애처롭게 처지기는 했지만.

‘나 좋아한다며. 내 아내 될 사람이 부럽다며. 그런데 생각보다 멀쩡하십니다.’

온은 쓸쓸하게 비꼬다가 재차 한숨을 삼켰다. 제 꼴이 참 추하다, 싶어서. 어젯밤부터 이어진 갈등의 연속이었다.

당신이 나를 잊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당신이 괴롭더라도 나를 끝까지 원해 주길 바란다.

당신이 내 형님을 진정으로 사모하게 되기 바란다.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거듭 몸을 섞는 건 수치이자 고역일 테니.

당신이 내 형님을 평생 연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수많은 아내가 있는 그분을 마음에 품어 봤자, 불행해지는 건 당신이야.

문이 열렸다. 온은 번뇌를 억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돌아보았다. 그가 처음 사랑하게 된 여인이 간편한 승마복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아까처럼 마주쳤다. 그때 여인도, 사내도 속이 울렁였지만, 둘 다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제 갑시다.”

류하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러다 온은 무너진 시선을 돌리며, 평소처럼 정중하게 답했다.

“네, 마마.”

마마는 똑같은 마마이되 옛날에는 공주, 이제는 월빈. 그 차이점을 여실히 되새기며 온은 류하를 마구간으로 모셨다.

류하는 화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짐승을 보자 조금은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인간들의 혼례와 복잡한 심경이 네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주도 후궁도 아니요, 그저 한 명의 기수로 자신의 애마 앞에 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좀 빨리 달려볼 수 있을까요?”

화의 늠름한 목을 쓰다듬으며 류하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공주의 기마 스승으로 돌아간 온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건 무리여도 속도를 전보다 높이는 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시고 있으니까요.”

류하는 온을 흘긋했다. 공주의 실력 향상을 칭찬하는 그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과장된 언어로 놀리거나 아첨하는 기색 없이, 평소의 그다웠다.

“그대는 참.”

말을 늘 예쁘게 해요. 억지로 추켜올리는 일 없이, 잔잔하고 다정하게.

류하는 솔직하게 말하려다가 입술을 닫았다. 여기서 솔직함은 독이었다.

“제가 참, 뭐요?”

온은 부드럽게 물었다. 류하는 어깨를 으쓱한 뒤 그를 다시 등졌다. 계속해서 말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짐짓 새침하게 덧붙였다.

“그대는 참, 조심성이 많다고요.”

“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으면 한 번쯤은 화끈하게 달려 보라고 격려해 줄 만하지 않습니까? 전력으로 질주하는 건 무리라니, 조금 흥이 식네요.”

“……마마, 지나치게 화끈함만 추구하시다간 황천길에 오르실 수도 있습니다.”

“……거봐요. 그나마 남아 있던 흥도 다 식었어요.”

말을 예쁘게 한다는 생각은 취소. 류하는 무심코 온에게 눈을 흘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그 잠잠한 미소에 류하는 일순 당황했다.

“계속 걷는 속도로만 움직이시니 답답하십니까?”

“조, 조금 그런 감이 있긴 한데. 다 내가 조급한 탓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뭐야, 왜 그렇게 웃는데. 류하는 얼결에 말까지 더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온은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역시나 잠잠히 입술로만 웃으며, 서글픈 눈으로.

“마마를 답답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속도에 너무 집착하시다가 낙마하시기라도 하면 제가 여러모로 면목이 없어서 그럽니다.”

“면목이 없어서요? 단순히 면목이 없는 걸로만 그칠 겁니까? 만약 내가 낙마하면 정말 크게 다칠 텐데.”

“제가 또 실언했군요. 고작 면목을 잃는 것으로 그치진 않을 겁니다. 절망하겠지요.”

부서질 겁니다. 만약 제가 호위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해 당신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온도 솔직함을 자제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절망이라.”

류하는 나직하게 곱씹었다. 그녀는 다시 온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애써 웃었다.

“그대가 절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스민 절망은 이미 내가 떠안은 몫으로도 충분해.

류하는 날쌘 동작으로 말에 올랐다. 이제 그녀는 온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안전을 늘 최우선으로 생각하죠.”

류하는 말고삐를 잡았다. 자신보다 높은 곳에서 단정한 자세로 정면을 향하는 류하를 바라보며 온은 참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언제는 그녀가 눈부시지 않은 적이 있냐만.

“오랜만에 반가운 소리입니다.”

온이 속삭였다. 그러나 류하는 어느새 박차를 가한 뒤라,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말을 타고 연습장을 몇 바퀴 돌았다. 소수의 궁녀들과 호위들이 여느 때처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류하는 제가 혼례 바로 다음 날부터 너무 이목을 끄는 게 아닐지 걱정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걱정이 참 쓸데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한테 관심이 없단다, 류하야.’

후궁으로 팔려 온 이방인 공주는 장안의 화제, 또한 만인의 관심거리. 동시에, 가장 힘이 없었다.

그녀의 존재는 뭇사람의 안줏거리에 알맞을 뿐, 모종의 정치적 파장의 중심이 되기에는 너무 영향력이 적었다.

‘내가 혼례 다음 날 말을 타든, 뭘 하든, 의외로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없다고.’

비록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별궁에서 외롭고도 자유롭게 큰 류하는 오만함을 배운 적이 없었다. 황궁에 와서도 그럴 기회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나야 좋지, 뭐. 딱 이 정도 흐름으로만 계속 갔으면 좋겠어.’

일단 혼례는 무사히 치렀으니 한숨 돌렸고, 류하가 아이라도 갖지 않는 한 세간의 시선이 황제의 일곱 번째 후궁에게 몰려들 확률은 낮아 보였다.

아이. 아이라.

류하는 온을 바라보았다.

“조금 쉬었다 하심이 어떨까요, 마마.”

그는 언제나처럼 유려한 동작으로 고삐를 고쳐 잡으며 공주에게 휴식을 제안했다. 류하는 잠시 목이 메어 바라만 보다가, 유순하게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내가 어젯밤 황제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그대한테 털어놓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황제는 류하에게 폭로를 허락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그녀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온이 그녀의 마음에 특별한 의미로 담겼다 한들, 그는 이 상황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도 이곳의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황실의 규율에 매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말해 봤자 뭐가 달라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