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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4)화 (44/123)

44화

“일국의 황제에게 대신 바닥에서 자라고 청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내려와.”

류하는 침울한 낯으로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륜이 문득 다정하게 웃었다.

“아니면 그냥 나랑 같이 침대에서 잘래?”

류하는 조용히 질색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륜은 입술을 물어 웃음을 참았다.

“잘 자게, 월빈.”

“안녕히 주무십시오, 폐하.”

놀랍도록 담백한 마무리였다. 류하는 이불과 베개를 챙겨 바닥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침대에서 황제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속삭임이 번졌다.

“공식적으로 오늘 나는 그대를 취한 거야.”

류하가 도깨비 혼혈이라는 사실은 비밀이었고, 그런즉 황제가 그녀와 몸을 섞지 않는 이유도 비밀이었으며,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애초에 진실 자체가 은폐되어야 했다.

“네, 폐하.”

류하는 마주 속삭였다. 이후, 모두가 조용했다.

이불 아래 웅크린 류하는 소리 없는 탄식을 뱉었다. 기뻐서, 너무 기뻐서, 당장 일어나 방 한복판에서 춤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강제된 동침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존재 가치를 상실한 후궁은 처분되어도 할 말이 없거늘, 황제는 자비인지 귀찮음인지 모를 행동으로 그녀에게 삶을 허락했다.

동생이든 형이든, 형제가 골고루 자신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둘이 서로 많이 다르지만. 동생이 형보다 더 수려하고, 더 용맹하고, 더 다정하지만.

온을 떠올리자 심장이 비틀렸다가, 날뛰었다가, 바닥에 처박혔다가, 다시 천장에 닿을 기세로 높이 솟구쳤다. 종잡을 수 없는 장기의 움직임 때문에 도통 잠들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했던 첫날밤,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자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잠들지 못했다.

황후 화은은 후궁 류하의 혼롓날, 후궁과 합방하는 지아비를 상상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황제가 공주를 취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촛불에 촛농에 묻혀 스러질 때까지, 그녀는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렸다.

온도 밤잠을 설쳤다. 공주를 생각하는 건 괴로운데, 공주를 생각하지 않는 건 더욱 괴로웠다.

아니지, 이제는 공주도 아닌 월빈이었다. 이제 자신이 알던 류하 공주는 이름조차 바뀌었다.

온은 그사이 류하의 마음이 바뀌었기를 바랐다. 아니, 바뀌지 않았기를 바랐다.

바뀌었길 바라는 마음은 류하를 위한 이타적인 소망이었고, 바뀌지 않았길 바라는 마음은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내 세상이 달라졌던 그 밤, 당신이 달빛 아래에서 나를 보며 내 아내 될 자가 부럽다고 말했을 때.

그때의 마음을 당신이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닿을 수도 없는 사내를 그리워하며 그 사내의 형과 동침하는 당신은 정녕 괴롭겠지.

그러니 차라리 나를 사모하지 마. 그때의 고백과 이어진 마음은 그냥 없던 걸로 치고, 잊어.

그렇다면 당신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나 혼자 불행하면 될 텐데.

그러나 이 와중에도 당신이 나를 계속 원해 주길 바라는 건, 정말 못되고 추레한 과욕이야.

우습게도, 온은 류하가 자신의 형을 사랑하게 되기를 빌어 줄 수도 없었다.

그건 그녀의 연정을 독점하고 싶은 그의 탐욕이기도 했지만, 류하를 위한 진솔한 걱정이기도 했다.

그분이 형님을 연모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형님은 그분 외에도 아내가 일곱 명이나 있는데. 게다가 형님은 황후 전하를 사모한다.

황제를 마음에 담아도 괴로워지고 마음에 담지 않아도 고통스러울 류하를 생각하며, 온은 밤새 고통받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토록 비참한 일이었구나. 처음이라 몰랐어.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어.

‘그런데 만약 공주, 아니, 월빈마마가 황손을 낳으면…….’

그럼 그 아이도 도깨비의 힘을 타고나는 거야? 뒤척이던 온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럼 여러모로 큰일인데.’

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자신이 황실의 후계와 황제의 후궁에 대해 고민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도로 누웠다.

‘신경 끊어, 휘온. 생각하지 마.’

내가 뭐라고 감히 황실의 일에 개입할까. 형이 황제가 된 뒤로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모든 정치적인 숙고를 버려야 했다.

미래에 대해 궁리하며 해결책을 강구하지 말자. 그건 형님과 신하들의 몫이요, 나는 황족보다는 군인이 되어 위에서 내리는 명령에 복종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마음을 끊고 생각을 버리며, 온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어두운 곳에서 시야를 차단하니 온 세상이 더한 암흑이었다.

그리고 그 먹색을 배경으로, 얼굴이 하나 그려졌다.

‘아.’

딱 한 사람에 대한 기억만 모조리 도려내는 주술은 없나. 억만금을 준다면, 죽다 살아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가능할까.

“……보고 싶어.”

바보처럼 소리 내어 중얼댔다. 그래 봤자 당신은 모를 텐데.

악몽보다 끔찍한 밤이 흘렀다.

궁녀들은 소량의 피가 묻은 이불을 치우고 신혼부부를 위한 세숫물을 내왔다.

어젯밤 아내를 매몰차게 바닥으로 쫓아낸 륜은 이른 아침에는 너그러워져서, 스스로 팔에 작은 상처를 내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

“황송하다고 말해도 좋네.”

“……황송합니다, 폐하.”

“내가 고통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인의 몸에 상처를 낼 수는 없지.”

이불에 피를 묻히며 륜이 생색을 내자 류하는 코웃음을 삼켰다. 여인이든 사내든, 몸에 상처를 내는 건 별로 좋지 않거든요?

“우리 둘 외에 오직 황후만 그대가 아직 처녀라는 사실을 알 거야.”

황제가 태평하게 설명했다. 류하가 그를 흘긋했다.

“미리 말씀드렸습니까?”

“아니. 오늘 말해야지.”

최대한 빨리 알릴 생각이었다. 이전에는 공주가 제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알 수 없어서 화은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공주와 혼례를 치르고 나서도 절대 동침하지는 않겠다고 황후에게 호언장담했다가, 막상 신방에 들고 나서는 공주를 취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그럼 륜은 화은을 속인 게 된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필연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도, 그녀를 기만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실제로 어젯밤 나는 공주를 취하지 않았으니, 이제 돌아가서 황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대가 혹시 내게서 원하는 게 있는가?”

의복을 정돈하던 륜이 문득 물었다. 류하는 조용히 당황했다. 원하는 거? 글쎄요, 이혼?

“내 연극에 동참해 주는 대가로 뭔가 소원이라도 하나 들어주고 싶은데.”

조금 이상한 말이라고 류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연극으로 인해 피해 보는 것도 없고 오히려 기쁘기만 한데, 여기서 대가를 더 받을 게 있나.

“……그럼 하나만 감히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정작 머리를 쥐어짜자, 하나쯤은 원하는 게 떠올랐다.

“제게 검술 스승을 붙여 주십시오.”

물론, 류하가 진짜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온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진짜 소망은 꼭꼭 파묻어 본인조차 잊어야 안전했다.

“검술 스승? 검술을 배우고 싶나?”

륜의 말투가 조금 서늘해졌다. 류하는 자연스레 긴장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기마술도 그렇고, 제가 월국에 살면서 미처 익히지 못한 휘국 사람들의 재주가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검을 익혀 황궁의 웃음거리 신세를 면하고자 합니다.”

휘국의 황족은 본래 전사들의 후예. 척박한 영토 위에 강대한 제국을 일구고 그 제국을 지켜온 이들이었다.

신체의 강인함은 정신의 강인함만큼이나 추앙받았다. 사내뿐 아니라 여인들까지 말을 몰고 기본적인 호신술을 익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호위를 붙여 주는 것만으로 부족했나?”

그러나 륜은 다소 삐딱하게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도술을 부리는 터라 자칫하면 위험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후궁이 갑자기 무기까지 잡겠다니 적잖이 껄끄러웠다.

“결코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것 중에 부족한 게 있었겠습니까? 다만, 제국의 여인들은 전부 제 몸을 제가 지킬 줄 알더군요. 이제 저도 제국의 여인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다른 이들을 본받고자 합니다.”

사실, 오는 길에 난데없이 시체 떼한테 공격당하면서 생각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받는 힘을 쓰지 않고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지금부터 애매하게 검을 배운다 해서 실제로 나아지는 건 딱히 없을 거라고 류하는 객관적으로 생각했다.

정말 검 하나로 적의 목을 댕강댕강 썰 수 있을 만한 경지에 오르려면 앞으로 수년을 피땀에 절여가며 수련해야겠지.

류하는 현실을 파악할 줄 알았다. 자신이 속성으로 엄청난 검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게 공평하다고도 여기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싫을 뿐.

“뭐, 기본적인 동작쯤이야 배워 두면 나쁘지 않겠지.”

륜은 끝내 수긍했다. 하긴, 자신의 다른 후궁 중에서도 검술에 아예 문외한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휘국의 여인은 하다못해 단순히 검무를 추는 용도로라도 어릴 적부터 검을 익혔다.

“스승은 뭐, 멀리서 찾을 필요 있겠어? 대장군에게 부탁하게. 어차피 그 애가 그대에게 기마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잠깐만요. 이건 정말로 돌발 상황이었다.

“온 대장군, 말씀이십니까?”

목소리를 태연하게 쥐어짜는 데 너무 주력하느라 막상 제 표정이 어떤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류하의 머릿속은 시끄럽게 울렸고, 심장은 그것보다도 더 시끄럽게 뛰었다.

“그럼 그대와 내가 둘 다 아는 대장군이 그 애 말고 더 있나?”

륜은 시큰둥하게 반문했고, 류하는 잠잠히 좌절하는 와중에도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애, 라니. 자신이 황태자 자리에서 몰아낸 이복동생을 가리키는 호칭치고는 너무 친근하잖아.

“기마를 배우면서 이미 많이 익숙해졌을 테니, 검술도 그 애한테서 익히도록 하게. 여태까지 불평이 없었던 걸 보니 그 애의 수업 방식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 듯한데.”

“네, 폐하, 전혀 문제없습니다. 그럼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대장군께 청하겠습니다.”

만약 황제에게 독심술이 있었다면, 나는 지존을 기만한 죄로 아마 참수당할 거야.

‘아오, 진짜, 왜 또 그 사람인데?!’

문제가 없기는, 무슨. 너무 커다란 거짓말이라 류하 본인도 기가 막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투성이였다.

‘제발 그 사람이랑 그만 엮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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