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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3)화 (43/123)

43화

원래 륜은 월국 임금의 맏딸, 즉 왕후 소생의 공주를 신부로 요구했다.

그러나 몇몇 한정 딸 바보인 국왕은 첫째 공주가 병약하다 우기며 별궁에 방치된 서녀를 조공으로 바쳤다.

“솔직히 말해서, 좀 짜증 나더군. 나는 내 뜻에 토를 다는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거든. 적어도 내가 즉위한 이후로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어서,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당황스러워.”

그야, 당신이 그대의 뜻에 반하는 수많은 사람이 죽이거나 내치거나 가둬 버렸으니까. 류하는 속으로 대꾸했다.

5년 전의 반정과 이후로도 이어진 대대적인 숙청 때문에, 아마 제국 내에서도 황제의 죽음을 원하는 자가 수두룩할 것이다.

“그대의 부왕이 저지른 무례를 핑계 삼아 전쟁이라도 일으켜 볼까 했는데. 내겐 이미 다른 계획이 있던 참이라서 타협했지.”

황제가 슬슬 정복 전쟁을 정리하려던 시점이라서 망정이지, 만약 그가 가장 활발하게 짓밟고 다니던 시기였다면 월국은 임금의 자식 사랑 때문에 파멸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이런 아름다운 신부를 얻게 되지 않았나.”

륜은 류하를 보며 다시 웃었다. 류하는 고개를 숙이며 무표정을 연기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긴장과 반감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면 내게는 두 번째 이유가 남았는데.”

륜의 손이 류하의 옷고름을 잡았다. 사내의 손짓에 의복이 헐거워지며 천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류하는 눈을 감을 뻔했다. 호흡이 점차 얄팍해졌다.

“그대의 태를 빌려 황손을 낳으면 그 황손은 동시에 왕손도 될 테니, 그대의 부왕이 내게 조금은 고분고분해지지 않을까 싶어.”

그게 나라 간의 정략혼을 하는 가장 주된 이유였다.

혼인이 출산으로 이어져 집안끼리 혈연으로 묶이도록, 역사상 무수한 왕족과 황족이 마음에도 없는 혼약을 위해 타향으로 떠나곤 했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도 문제가 있어.”

신부의 화려한 겉옷을 한 움큼 쥔 채 륜이 온화하게 덧붙였다. 류하는 내의 차림으로 황제를 쳐다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그대가 지닌 이능 말이야. 피를 통해 이어지나?”

류하는 퍼뜩 굳었다. 원래 아까부터 굳어 있긴 했지만, 그 질문을 들은 지금 이제는 숨이 멎는 듯했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곤란하거든.”

그러면서 수평이 뒤집혔다. 어느새 류하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고, 륜의 웃음기 없는 시선이 그녀를 짓눌렀다.

“땅을 깨트리고, 불을 피운다. 그리고 도술을 쓸 때 눈이 파랗게 변한다. 전부 도깨비가 지닌 신통력의 특징인데.”

륜은 낱낱이 읊조리며 손으로 류하의 머리를 쓸었다.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칼이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부서졌다.

“도깨비의 신통력은 몇 대를 통해 이어져. 그런데 그대는 대체 몇 번째 세대인가? 누가 도깨비였어? 그대의 어미? 아니면 그대의 조부모?”

침착하자, 침착해. 만약 이곳이 아까 황제가 말한 대로 호랑이 굴과 같다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 정신을 차리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아니면, 내가 완전히 엉뚱한 데를 짚었나?”

륜은 고개를 바짝 숙여 숨결을 밀착했다. 여인을 탐하는 사내의 저열한 욕구는 없었다. 다만, 정보를 위해 신하를 압박하는 냉혹한 주군만 있을 뿐.

“월국 왕가에 혹시 도깨비가 있어?”

류하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태 온도, 륜도 류하에게 외가에 도깨비의 핏줄이 있냐고 물은 건 류하가 왕의 딸이라는 대전제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알기로, 월국 왕실에 이종족이나 이종족 혼혈은 없었다. 만약 있다면, 그건 엄청난 비밀일 터.

륜은 황제로서 그 비밀을 원했다. 대륙의 다른 어떤 임금보다 강해지고 높아지기 원하는 그에게, 이웃 나라 왕실의 혈통을 둘러싼 기밀은 분명 탐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처음 륜이 월국 왕가에 도깨비가 있냐고 물었을 때, 류하는 아득하게 겁먹었다. 그녀의 외가가 아닌 친가를 의심하는 것부터가 발상의 전환을 뜻했으니까.

하지만 그 예리한 황제조차 류하가 왕의 딸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상의 전환은 했으되, 기본적인 대전제는 그대로 유지했다.

류하는 안도로 전율했다. 아, 기껏해야 당신이 떠올린 가설이 왕실에 숨겨진 도깨비 핏줄이 있다는 거라서 다행이다.

나 혼자 월국 왕족 중에서 도깨비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그렇게 진실을 짐작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실 나는 애초에 왕족이 아니거든. 왕의 딸이 아니야. 당신을 기만했어. 그럴 의도는 맹세코 없었어.

그러나 월국의 공주가 황제를 속이고 고귀한 혈통인 척 황제에게 시집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너무 많은 이들에게 파국이 닥칠 거야.

“모릅니다.”

류하는 솔직한 거짓을 말했다.

나는 당신을 속이는 중이야. 하지만, 혹시 정말로 월국 왕실에 나 외의 다른 도깨비 혼혈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지.

“몰라?”

“모릅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제 이복언니 대신 보내진, 인질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무력한 공주입니다. 만약 왕실에 그런 비밀이 있다면 대체 누가 제게 알렸겠습니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에 근거했기에 매끄럽게 거짓말할 수 있었다.

가련한 척 연기하는 것도 황궁에 오면서 많이 연기해 봤기에 울먹이는 건 쉬웠다.

“폐하, 부디 믿어 주십시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아는 게 있었다면 진즉 고했을 겁니다.”

사내의 악력에 눌려 침대에 내리꽂힌 스무 살 공주. 충분히 겁먹을 만한 상황이었다. 처량하게 떠는 여인의 모습은 개연성이 충분했다.

륜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그대라면 진즉 고했겠지.”

륜은 류하의 어깨에서 손을 치웠다. 류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는 너무 크게 호흡하면 숨결마저 엉킬까 봐 차라리 참고 또 참았다.

“내가 여태 파악한 그대는 꽤 영특한 편이거든. 그토록 총명한 계집이니, 제 목숨을 아낄 줄 알 거라고 믿어.”

해석하자면, 목숨이 아깝지 않은 한 제게 감히 비밀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류하는 고개를 숙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황송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칭찬해 주신 만큼 총명하지는 않으나, 제 목숨을 아끼는 건 사실입니다.”

류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바닥을 보며 말했다. 륜은 가소롭다는 듯, 또는 기특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는 뒤늦게 다정한 척 말했다.

“거짓 겸손을 떨 필요 없어. 그것까지 총명함의 일부라고 칭찬해 주긴 어려울 것 같으니까.”

륜은 침대에서 일어나 스스로 겉옷을 벗었다. 값비싼 비단이 나풀나풀 떨어지는 걸 지켜보며 류하는 호흡을 아꼈다.

“모처럼 방으로 미인을 데려왔는데 품지도 못 하고, 거참 아쉽군.”

류하는 그 희롱하는 발언에 불쾌해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점차 고요해지는 머릿속에서 아까 황제가 했던 말을 되짚었다. 문제가, 있다고.

“이럴 거면 굳이 왜 또 후궁을 들였나 몰라. 벌써 일곱 명째라서, 슬슬 지겨운데.”

도깨비 혼혈의 신통력은 세대를 거듭해 완전히 희미해질 때까지 유전되며, 현재 륜은 류하가 몇 세대째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즉 만약 그녀가 제 아이를 회임한다면 그 아이도 이능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건 륜이 격렬히 피하고 싶은 확률이었다.

“적어도 그대가 내 후계의 어미가 되는 일은 없겠군.”

륜은 부드럽게 선포했다. 류하가 눈을 홉떴다.

“그대가 덜컥 아들이라도 낳았는데, 그 아들도 주술사면 곤란해.”

딸이면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여인들은 아직 권력에서 소외되었고, 아무리 황녀가 신통한 힘이 있더라도 순수하게 그 힘만 가지고 격변을 일으킬 확률은 낮았다.

반면에, 황자가 이능을 지녔다면 어떻게 될까. 법적으로 제국의 수장이 될 자격을 타고난 황자가.

대전쟁 이후로 이종족에 대한 인간들의 보편적 정서는 악감정이었고, 혼혈 황자의 지배를 신하들과 백성들이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민심을 얻지 못한 황태자의 명분은 흔들릴 테고, 입지는 좁아질 것이며, 이에 위기감을 느낀 그가 주술로 무력시위를 벌이기라도 한다면, 혼란은 정해진 순서였다.

“……왜 저를 죽이지 않으십니까?”

류하는 진심으로 의아해서 물었다.

황제와 동침하지도, 황손을 출산하지도 못할 무용한 후궁.

여인의 가치가 다산으로 증명되고 불임은 죄악으로 취급받는 부당한 세상에서, 류하는 쓸모없는 인형에 불과했다.

“왜, 내가 그대를 죽이길 바라나?”

륜이 물었다. 참 멍청한 질문이라고 류하는 생각했다. 그녀가 곧장 대답했다.

“아닙니다.”

단언컨대, 살면서 죽고 싶었던 적은 없다. 목숨을 걸 만큼 간절했던 순간은 있지만.

“기왕 데려왔는데 굳이 죽일 이유는 없지.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야. 다짜고짜 후궁을 처형하면서 신하들한테 뭐라고 설명할 건데?”

하긴, 류하의 신통력이 엄연히 비밀에 부쳐진 상황에서 후궁으로 바쳐진 이방인 공주를 냅다 죽이는 것도 이상했다.

국경 밖에서는 잔혹한 폭군으로 알려졌으나, 제국 내에서 륜은 꽤 인정받는 축에 속했다. 그럴싸한 명분 없이 후궁을 도륙하는 미친놈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꼭 처형은 아니더라도, 저를 죽일 방법은 많으실 텐데…….”

류하는 괜히 웅얼대다가, 머쓱한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아니, 살려 주겠다고 했으니 감사하다고 거듭 절해도 모자랄 판에, 웬 이상한 고집이람.

“나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바쁜 사람이야, 월빈. 힘없는 후궁 한 명 죽이겠다고 자객을 구하거나 독살을 꾸미는 것보다는 생산적인 일을 추구하지.”

륜은 단정하게 대답하며 겉옷을 마저 벗었다. 단단한 어깨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게 부담스러워서 류하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다음 순간, 황제를 다시 휙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일단, 침대에서 내려오게.”

“네?”

륜이 쾌활하게 명령하자 류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자 륜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대랑 동침할 생각 없다니까. 그러니 나는 침대에서 자고, 그대는 여기에서 자면 돼.”

여기, 그러니까 바닥. 류하는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의 솔직한 눈빛을 보고 륜이 피식 웃었다.

“왜, 바닥에서 자라니까 억울해?”

차마 당신의 분석이 정확하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륜은 번뇌하는 류하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낭랑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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