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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2)화 (42/123)

42화

한편, 온도 제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가 그를 보지 않을 때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에 새로운 정보가 더해졌다.

예를 들어, 온은 류하가 웃을 때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왼쪽 뺨에만 희미하게 볼우물이 패고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더 올라가는 걸 나중에야 관찰해서 알았다.

목과 손가락은 유독 희고 길었다. 호기심이 많았고, 자존심이 매우 셌다. 경쟁심도 유독 강한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할 때는 순순히 인정했으며, 굳이 긴긴 핑계를 사족으로 덧붙이지 않았다. 표정이 대놓고 불퉁해지긴 했지만.

류하는 징그러운 것을 싫어했다. 한때는 그녀가 너무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서 최소한 괴한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는데, 급히 돌아보니 공주는 지렁이 한 마리에 혼비백산하던 참이었다.

늘 정중하고 진지한 온이지만, 그때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알아갔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조금씩, 천천히.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혼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혼례 전날, 류하는 괴로운 마음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여봐라. 밖에 누가 있느냐?”

류하는 끝내 밤중에 가냘프게 불렀다. 아마 대장군의 부하 중 하나가 보초를 서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제가 밖에 있습니다, 공주마마.”

굳이 이름을 밝히며 스스로 소개하지 않아도 첫음절만 듣고도 그가 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류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왜, 하필, 지금.

“잠이 오지 않아 잠깐 산책하려고 합니다. 나가도 되겠습니까?”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상만으로도 비참했지만, 가만히 누워 억지로 잠들려고 해 봤자 비참한 건 마찬가지라서 류하는 솔직하게 질문했다.

“이 시간에요?”

온은 놀라서 되물었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어쩐지 음성에 힘이 없었다. 그도 문 건너편의 공주처럼, 혼례가 시작하기 전부터 지친 듯.

“그대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면 나가지 않겠습니다.”

류하는 중얼거렸다. 사실, 온이 아니라 그 누가 생각해도 충분히 늦은 시간이었다.

류하는 온이 그녀에게 그냥 주무시라고 권할 줄 알았다.

일개 호위가 호위 대상에게 감히 왈가왈부할 수는 없으나, 온은 호위이기 전에 황족이었고, 류하의 가족 될 사람이었다. 명령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권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온은 부드럽게 고했다. 류하의 눈시울이 왈칵 더워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물고 마음을 다스렸다.

“네, 대장군.”

류하는 서둘러 의복을 갖췄다. 그녀는 당직을 서는 궁인들을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온은 약속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사뿐히 다가갔다. 불나방이 불꽃에 이끌리듯.

“따라오세요.”

류하가 온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마주 보다가, 호위답게 끄덕이며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류하는 처소 밖의 후원으로 나갔다.

“밤인데 밤인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달이 밝아서요.”

류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며 떠오르는 대로 뇌까렸다. 점차 보름에 가까워지는 통통한 달은 광활한 먹색에 은빛을 흩뿌렸다. 아름다웠고, 평화로웠다.

“그렇군요. 달이 정말 밝습니다.”

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류하가 제게 말을 걸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하필 달이 이렇게 밝아서, 그녀가 제게 고백하던 밤이 떠올라서.

그녀와 자신이 말을 섞을 때마다 꽁꽁 묻어 둔 마음이 조금씩 새어 나가 만천하에 자신의 죄를 폭로할 것만 같았다.

한마디에 한 겹씩, 거짓은 벗겨지겠지. 그리고 그 아래, 괴로운 진실이 드러나겠지.

“이렇게 밝아서, 잠이 오지 않나 봅니다.”

류하는 둘러댔다. 거짓말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고, 본인도 그걸 너무 잘 알았다.

임박한 혼례가 두려워서, 역겨워서, 여유롭게 잠들 수가 없었다.

온을 마음에 담지 않았더라도 비참했을 거다. 온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륜을 사랑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나는 연정도 없이 그 사람 밑에 깔리겠지. 그 사내와 억지로 몸을 섞어야 할 거야.

만약 황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었다면, 그런 끔찍한 일을 피하고자 어떻게든 도망칠 계획이라도 세웠을 텐데.

황제의 동생을 사랑하게 되는 바람에 자유를 향한 의지마저 막혔어.

“대장군,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내 신변을 지켜 주고, 또 내게 좋은 스승이 되어 줘서요.”

류하는 여전히 달을 보며 문득 말했다.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온은 류하의 낯을 미심쩍게 살폈다. 그러자 류하는 그를 돌아봤고, 온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고마울 예정이고요. 그냥 생각나는 김에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잊어버릴까 봐요.”

실수였다. 공주를 보지 말걸. 난데없는 감사 인사가 의아하여 얼굴을 살펴보는 짓 따위 하지 말걸.

‘너무 괴로워.’

저 눈을, 저 처연한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럼 앞으로도 생각날 때마다 말해 주십시오.”

온은 무심코 말했다. 생각 없이 입술이 움직였다. 이대로는 자신의 혀가 완전히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기어코 진심을 털어놓을까 봐, 두려웠다.

“그럴게요. 기회가 있으면.”

류하는 끄덕였고, 다시 웃었다. 온은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무작정 눈을 감아 버리면 호위의 본분을 다할 수 없기에, 그는 억지로 시선을 다스렸다.

뭔가를 꾹 참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온을 마주 보다 보면 마치 자기의 마음이 짝사랑이 아닌 듯한 착각이 들어서, 류하는 망상이 심해지기 전에 시선을 돌려 버렸다.

마음이 엇갈리는 그 밤, 새신부와 새신부의 예비 시동생은 서로 같은 마음을 되삼켰다.

혼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예식은 혼례인 동시에 책봉식이었고, 월국의 공주 월류하는 이제 정식으로 월빈이 되어 주군이자 지아비인 황제와 술을 나눠 마셨다.

분명 훤한 대낮인데, 밤인 것 같았다. 순간순간이 악몽 같아서 그럴지도 몰라.

신부의 예복을 입고 정성스레 치장한 그녀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남들에게 타격을 입힐 만큼 아름다웠지만, 류하는 자신의 반짝임을 즐기지도 못하고 그저 심중에 비명을 쌓아 갔다.

온종일 예식과 연회를 견딘 뒤, 류하는 신방에 들었다.

예식 자리에 그대가 있던가. 연회 도중에 그대가 보였나.

온에 관한 것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방어한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간단한 주안상 너머 자신을 마주한 사내의 얼굴이 온과 너무 닮아서, 참담한 추억들이 한 조각씩 되살아났다.

“가까이서 보니 더 미색이군. 한데 이런 말은 자주 듣겠지?”

황제는 여전히 예복 차림이었다. 오늘 갓 혼례를 치른 새신랑답게.

그 혼례가 어느덧 살면서 여덟 번째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딱히 ‘새’신랑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럼 어떤 말로 내가 그대를 치하해야 그대가 식상하지 않다 여길까.”

륜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손을 뻗었다. 손끝이 살갗을 스치자 류하는 움찔 떨었다. 하지만 륜은 류하의 머리장식을 풀어 주는 걸로 그쳤다. 체온이 다시 멀어졌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굳어 있나. 누가 보면 신방이 아니라 호랑이 굴에 들어온 줄 알겠네.”

륜은 나긋하게 덧붙이며 엄지로 류하의 입술을 쓸었다. 다홍빛의 연지가 뭉개지듯 지워졌다. 류하는 그를 뿌리치지 않으려 애썼다.

“화장을 지우고 보니, 안색도 창백하고.”

륜은 색깔이 번진 류하의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류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와 초야를 치르는 게 정말 어지간히 싫었나 보지?”

‘그런 걸 대놓고 물어보면 어떡해.’

류하는 심란한 마음에 눈을 치뜰 뻔했지만, 그러다가 황제와 눈이 마주치면 그건 그것대로 훨씬 심란할 것 같아서 초인적인 힘으로 인내했다.

“어때, 월빈. 그대가 궁에 들어온 지도 이제 약 보름째인데, 그간의 감상이 어떤가?”

륜은 손을 치우며 엉뚱하게 질문했다. 류하는 이 뜬금없는 상황의 저의를 잠시 고민했다.

이미 혼례는 끝났고, 술상도 마련되었다. 이제 각자 예복을 벗기고 불을 끌 일만 남았는데, 뜻밖의 수다로 시간을 어영부영 미루는 황제라는 작자가 수상했다.

“미천한 곳에서 온 제가 어찌 감히 고작 보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황궁을 평가하겠습니까? 그저 전부 편안했을 따름입니다.”

“평가하지 못할 것처럼 운을 떼더니, 결국 전부 편안했다고 스스럼없이 평가하긴 하는군.”

“황송합니다, 폐하.”

“뭐, 황송할 것까지야. 그런데 왜 스스로 미천한 곳에서 왔다고 깎아내리나? 고국에 대한 자부심이 별로 없나 보지?”

“자부심이 있어 봤자 폐하 앞에서 내세울 수는 없겠지요. 폐하께서는 대륙에서 가장 풍요롭고 선진적인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 아닙니까? 제 고국에 관해 우쭐댈 자리는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많은 것을 참는 듯한 무심한 얼굴로 또박또박 대답하는 공주를 보며 륜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처음 만날 때부터 생각했는데, 영리한 공주였다. 고작 나이 스물에 거의 평생 갇혀 지냈으면서, 부족하지도 과도하지도 않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야, 마음껏 우쭐대도 돼. 제발 우쭐대주게. 내게 그대의 고국에 대해 얘기해 줘. 내가 왜 머나먼 곳에 사는 그대를 굳이 먼 황궁까지 데려왔을 것 같나?”

륜은 내리 웃었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또 신부의 머리장식 하나를 풀었다.

여인들에게 강요되는 미의 기준은 어찌나 혹독한지, 예복도 겹겹이었고 장신구도 과다했으며 화장은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었다.

“정보를 위함이지, 월빈. 정보는 달콤하거든.”

륜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객관적으로 참 준수한 사내라고 류하는 빤히 보며 생각했다. 또한, 동생을 닮았어. 동생도 퍽 잘생겼거든.

아아, 온 대장군. 그대의 형과 동침을 준비하면서 그대를 그리워하는 나를 용서해.

“이국의 공주를 신부로 데려오는 군주의 뜻이야 전부 다 비슷하지. 공주를 인질 삼아 상대편 나라를 통제하기 위함이든가. 아니면, 국제혼을 통해 후손을 남기든가. 결국 그것도 통제의 수단이지만.”

하지만 적어도 첫 번째 이유의 경우, 류하가 생각하기에 하자는 뚜렷했다. 륜도 똑같은 생각으로 류하를 보며 조곤조곤 부연했다.

“그런데 그대가 인질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는 것 같더군. 원래는 그대가 아니라 그대의 이복언니와 혼인하려 했거든. 그런데 그 언니가 아프다며? 그래서 그대를 대신 보낸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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