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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1)화 (41/123)

41화

예빈은 나긋한 말투로 호들갑을 떨었고, 이번에 류하는 자신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뒤에서 듣던 온과 그의 부하들이 안색을 굳힐 정도였다.

제하는 이미 아까부터 찌푸린 시선을 감추느라 고개를 팍 숙인 뒤였다.

“네, 실제로 월국에서는 여인들이 말을 타는 경우가 드뭅니다. 하지만 이곳은 월국이 아니니, 나도 휘국의 풍습에 맞춰 새로운 것들을 배워야겠죠.”

류하는 끝까지 방싯대며 받아쳤다.

아직, 아직은 부딪치지 말자. 혼례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후궁들과 기 싸움을 벌이는 건 너무 위험했다. 특히 그 후궁들이 자신과 달리 제국의 명문가를 친정으로 둔 여인이라면.

“현명한 생각입니다, 공주. 제국에 왔으니 제국의 법도를 따라야죠. 이 나라에는 좋은 것들이 많으니, 공주와 그것들을 나눌 생각에 벌써 설레네요.”

예빈은 다시 생글거렸고, 그녀를 빤히 보던 류하는 문득 정확히, 왜, 저 사람이 제게 저런 적의를 보이는지 의아해졌다.

내가 하찮은 소국의 공주라서? 하빈의 경우, 정말로 그 이유가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예빈의 눈빛은 묘하게 달랐다.

둘 다 똑같이 우아했고 똑같이 차가웠으며 서로 말하는 내용도 비슷했지만, 예빈의 경우, 류하는 저 눈빛의 저변에서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감지했다.

“네, 나도 많이 기대되는군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분석할 겨를이 없었다. 류하는 오후 내내 말을 모느라 실제로 지쳤고, 신경전과 탐색전은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다.

“그럼 나는 이만 내 처소로 가 보겠습니다, 예빈, 하빈. 그대들과 더 얘기하고 싶지만, 살면서 말을 처음 타 보는지라 체력이 많이 달리네요. 어서 쉬어야겠어요.”

이때, 류하는 별수 없이 본래 습관대로 살짝 비꼬며 반격했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대로 나는 말도 처음 타 보는 미개한 이국의 공주인데, 너희가 뭘 어쩔 거냐, 이런 심보였다.

“네, 공주. 어서 들어가서 푹 쉬세요.”

예빈은 정확히 알아듣고 빙그레 웃었다. 후궁들은 각자 목례했고, 두 명과 한 명으로 나뉘어 각자 멀어졌다.

“어째서 그리 배알이 뒤틀렸습니까, 예빈. 아까 되게 예민하던데요?”

팔짱을 낀 채 궁녀들을 거느리고 걸으며 하빈이 속닥였다. 예빈이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그녀가 뚱하게 대답했다.

“배알이 뒤틀린 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직 젖살도 덜 빠진 스무 살 애송이가 이 궁을 자기 집처럼 설치고 다니는데, 배알이 뒤틀리지 않고 배기겠어요?”

“뭐, 좀 건방지긴 했지만 그래도 귀여운 면도 있던데. 그대가 말한 대로, 어리잖아요.”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소국의 공주를 업신여기는 대국 백성의 오만한 마음을 품었지만, 오히려 그 오만함 때문에 너그러운 마음도 같이 품었다.

그 계집이 꽤 발칙하긴 하지만 날고 기어 봤자 어차피 우리의 하수니, 초반에 서열 정리를 잘하기만 하면 굳이 악의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리고 미천한 년이 궁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해비마마와 단둘이 차를 마셨다지요.”

예빈은 어금니를 오독 씹으며 중얼댔다. 하빈은 친구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침착하게 지적했다.

“단둘이 아니라 셋이었습니다. 성빈도 같이 있었대요.”

“하, 성빈이 무슨 대수입니까? 보나 마나 내내 뚱하게 앉아서 평소처럼 병풍 역할이나 했겠지요.”

“세상에, 예빈. 지금 공주를 질투해요?”

예빈의 볼이 조금 붉어졌고, 하빈은 장난처럼 맑게 웃었다. 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가 해비마마를 동경하는 건 압니다. 그래서 성빈도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에게 꼭 풀어야겠어요?”

“……성빈은 해비마마 때문에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음침한 성격 때문에 싫은 거지.”

“아이고, 참. 그래 놓고 막상 만나면 잘만 얘기하면서.”

실제로 황제의 후궁들은 뒤에서는 이렇게 두셋씩 나뉘어 다른 이들을 험담하면서도, 평소에는 전략적인 이유로 다들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하여튼, 공주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처음에 버릇만 잘 들여 놓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칫, 그렇게 말하는 그대도 아까는 나랑 똑같이 괴롭혔잖아요. 억울하네요.”

“글쎄요, 공주가 그걸 괴롭힘으로 인식할지나 모르겠네. 웬만큼 건드려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하긴, 그것도 그래요.”

둘은 그렇게 얘기하며 계속해서 산책했다. 그사이 노을빛은 점차 깊어졌다.

류하의 처소로 돌아오는 내내 온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류하의 방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고하기 전,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공주마마?”

류하는 온을 끔뻑끔뻑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멀쩡한데. 말을 너무 오래 타서 힘들지는 않냐고 물어보는 건가? 그러다 그녀는, 곧 이해했다.

“아아, 네. 아까 예빈과 하빈을 만난 것 때문에 그리 묻나요? 정말 괜찮습니다.”

류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솔직하게 답했지만, 온은 여전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뭇 결연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마마께서 정말 고단하신 점이 있다면 제게 부디 말씀하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돕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대장군? 그대가 나를 어떻게 도와요.”

류하의 심정은 복잡했다.

자신이 선배 후궁들의 텃세에 치여 고생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가 귀엽기도 했고, 무엇보다 고마웠다. 내가 이 사람에게 생각보다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그런 착각을 품게 될 만큼.

또한, 조금 미안했다. 당사자인 나는 정작 아무렇지 않은데, 이 사람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초조해하는 게.

설마, 내가 첫날에 일부러 이 사람 앞에서 우는 척한 걸 마음에 담고 있는 건가? 그때 그 눈물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 세상에.

당시에는 가련한 척해서 당사자의 연민을 사려 했던 건데, 그 전략이 뒤늦게 너무 잘 먹히는 듯해서 류하는 퍽 심란해졌다.

“다른 후궁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폐하께 가서 일러바치기라도 할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떻게든 나를 돕겠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대가 나를 어떻게 돕겠다는 거야.

본인도 힘이 없어 전쟁터에 내몰리고, 이제는 한낱 후궁의 호위로 전락한 주제에.

“어찌 그대가 고작 이런 일로 내명부에 간섭하려 합니까? 내가 뺨을 맞거나 대놓고 욕을 들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직접 폐하께 고할 겁니다.”

내명부는 여인들의 영역이며 황후의 소관이라 황제도 웬만하면 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대장군이 직접 나서겠다니, 기가 막혔다.

누구보다 황궁의 질서를 잘 아는 그가, 고작 나를 위해 그렇게 다짐하다니.

아까 후궁들과 벌인 신경전쯤이야 자신이 고국에서 당한 멸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쌍한 척 거짓 울음을 터트려 누군가의 동정을 사려는 게 아닌 이상, 류하는 연약하게 남에게만 기대고 싶지 않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겠지만,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고작 다른 후궁들과 설전 아닌 설전 한 번 벌였다고 대장군에게 징징대며 폐하께 고자질해 달라고 빌어야 할까.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다른 후궁들이 자신을 때리거나 대놓고 욕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자신이 직접 황제에게 읍소해도 충분했다. 비겁하게, 또한 아둔하게 대장군을 거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방금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 상한 적 없어요.”

차라리 짜증이 났으면 났지, 속상한 적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마음이 여린 편은 아니라니까.

류하는 자신이 그때 대장군 앞에서 우는 척했던 것을 후회했다.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이야.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이렇게 과보호를 받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느낌. 누군가 나를 보살핀다는 느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이었다.

“네, 정말 괜찮습니다.”

류하는 훈훈한 마음으로 온을 달랬고, 자신이 정녕 괜찮다는 사실을 피력하기 위해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러자, 이제는 온이 괜찮지 않아졌다.

‘하, 젠장, 이런 상황에서마저도…….’

온은 속으로 비속어를 뇌까렸다.

예쁘다, 예뻐. 아름다워. 너울에 막히지 않고 환하게 드러난 얼굴이 소중해. 저 작은 턱을 쥐고, 저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면.

온은 순간, 무의식의 곳곳을 잠식한 망측한 상상을 힘껏 떨쳐 냈다. 너무 망측해서, 너무 무례해서. 그래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는 아마, 너무도 다정한 사람이기에 나를 이리 걱정하겠지요. 그대는 누구에게나 이토록 친절한 사람인 거야.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야.

류하는 열심히 자신을 세뇌했다.

“그럼 이제 나는 들어가겠습니다.”

“아아, 네. 쉬십시오, 공주마마.”

“오늘 기마 수업, 정말로 고마웠어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마마.”

담백한 대화가 오갔고, 류하는 한 번 더 웃어 준 뒤 제하를 데리고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밖에 남겨진 온은 가만히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눈빛을 갈무리하며 부하들을 향해 돌아섰다.

“나 포함, 오늘은 세 명씩 교대하며 내일 아침까지 공주마마의 처소를 지킨다.”

“네, 대장군님.”

그래, 나의 역할은 호위일 뿐이야. 거추장스럽고 치명적인 내 진심은 아주 깊은 어둠에 묻어 놓고, 나는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하면 그만이야.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기 세뇌에 열중하는 사이, 황궁에서 시간은 흘렀다.

제7장. 형수와 시동생

기마 수업은 며칠째 이어졌다. 그사이 류하의 실력은 쑥쑥 늘었다.

휘국의 예법을 익히랴, 혼례 준비를 하랴, 승마 연습을 하랴. 외국에서 온 공주님은 매일 바빴다.

스승인 온을 곁에서 날마다 지켜보며 류하는 하나씩 그에 대한 새로운 점을 알게 됐다.

예컨대, 그저 검게만 보이면 머리칼에 햇빛이 닿으면 살짝 구릿빛이 돌며 붉게 빛난다거나.

마찬가지로 먹색 홍채가 일광을 머금으면, 황금색과 다갈색의 중간쯤 되는 색채가 된다는 것도.

그가 의외로 귀여운 것들에 사족을 못 쓴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어느 날 연습장에 참새 떼가 날아들었는데, 그 몽실몽실한 날짐승한테서 온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또 다른 날에는 길고양이가 발견되었고, 인간들은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황궁에 용케 빈틈을 찾아 들어온 민첩한 짐승을 보고 온은 인자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류하는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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