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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40)화 (40/123)

40화

‘아이고, 제하야, 불경해라, 세상에!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습관적인 자책이 생각을 가로막았다. 제하, 이 정신없는 것아. 대체 무슨 망측한 상상을 하는 거야?

‘통속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어. 아니면 황궁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머리가 돌아 버렸나.’

제하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염려하며 옆에 있는 대장군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중 아무도 자신과 같은 망상을 품은 자는 없어 보였다.

한 명은 아까부터 공주의 미모에 살짝 홀린 듯한 표정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한결같이 음침한 기색이었다. 고작 약소국 출신의 후궁 후보나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이 퍽 불만인 듯했다.

‘그래, 제하야, 정신 차리자. 나만 그렇게 생각해, 나만.’

제하는 자신의 얼토당토않은 사고를 끊어 버리고 궁녀답게 공손히 대기하는 역할로 돌아갔다. 나는 역시 가끔 너무 망상이 심해, 이런 해맑은 결론을 내리며.

류하와 온은 아까 중천에 맴돌던 해가 서서히 지평선에 내리깔릴 때까지 연습장에 머물렀다. 먼저 돌아가자고 권한 쪽은 온이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류하는 어느덧 분홍빛이 번진 하늘을 보고 놀란 눈빛을 지었다. 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새로운 일을 배우실 때 잘 몰입하시는 편이신가 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시네요.”

“뭐, 오랜만에 즐거운 건 사실이었어요.”

류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온은 그 말이 퍽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에 즐거웠다니, 그럼 최근에는 즐거운 일이 없었다는 거잖아.

하긴, 자신이 생각해 봐도 공주가 요새 즐거울 이유가 없기는 했다. 팔려 온 신부, 바쳐진 제물이니.

그래도, 당신이 오랜만에 기쁨을 느낀 현장에 내가 개입하고 함께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고맙습니다, 대장군. 기마를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류하는 온화하게 웃으며 감사의 뜻을 전했고, 온의 아랫배가 후끈하게 요동쳤다. 불충한 열기를 내리누르느라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어디까지나 황명이었습니다. 나중에 폐하께 감사드리십시오.”

온의 말에는 이번에도 틀린 점이 하나 없었다. 그러나 류하는 괜히 섭섭해졌다.

나는 진심으로 그대에게 순수한 감사를 전했을 뿐인데, 여기서도 황제가 끼어드는구나. 그자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지요. 명심하겠습니다.”

류하는 조금 흥이 식어서 답했다. 그러나 기마로 인해 들뜬 마음이 온전히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느덧 친숙해진 자신의 말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원한다면 이 아이가 내게 속할 수도 있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리 말해 두면 앞으로 마마께서만 이 아이를 타고 연습하실 수 있을 겁니다.”

“흠, 그럼 이름을 지어 줘야겠습니다. 오늘 내내 썩 마음에 들었거든요.”

류하는 말을 예뻐하며 눈매를 둥글게 접었고, 저 미소를 보고 온은 다시 한심한 질투를 느꼈다. 내 평생 살다가 짐승을 부러워하는 날이 오다니.

“이름은 ‘화(花)’로 하지요. 봄의 황궁에 어울리는 이름인 듯합니다.”

처소에서 여기로 오는 내내 아름답게 흐드러진 봄꽃을 봤어.

제물처럼 팔려 온 나에게 황궁은 감옥과 같지만, 그래도 생기를 머금고 바람결에 춤추는 꽃잎을 보면, 절망을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예쁜 이름입니다.”

온은 솔직하게 말했다. 말의 이름이 황족처럼 외자 이름이라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굳이 까다롭게 굴 부분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다른 사람의 귀에도 그렇게 들려서 다행입니다. 기왕 지은 이름인데, 예쁘면 좋지요.”

류하는 다시 빙긋 웃었고, 온은 어지러워 잠시 시선을 감췄다. 그 사실을 무의식중에 외면하길 택하며, 류하는 유순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합시다, 대장군.”

“네, 공주마마.”

두 사람은 나란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류하는 퍽 능숙하게 움직였다. 류하는 공주가 기특해서 소리 없이 잠깐 웃었다. 그러나 안색은 곧 무뚝뚝하게 굳었다.

‘이제 아무렇지 않으신 건가?’

온은 공주의 태도를 생각했다.

처음에 그가 호위대장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아연실색하더니, 오늘 기마를 배우며 함께 시간을 흘려보낼수록 점차 그를 대하는 공주의 태도에 거리낌은 없어졌다.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시는 건가.’

좋든 싫든 두 사람은 앞으로 형수와 시동생으로, 후궁과 호위로 적잖이 대면해야 했다.

그때마다 공주의 지난 고백이 떠올라 둘 다 껄끄러워한다면 본인들이 가장 불편하거니와,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 잊는 게 가장 현명하지. 하다못해 잊은 척이라도 하는 게 최선이야.’

그런즉, 공주의 태도는 현명하다. 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웃고, 말을 걸면서도 오직 정중하고 다정해. 그게 최선인 거야.

예비 시동생한테 고백했다가 차여서 구질구질하게 시무룩해하는 공주보다는 훨씬 낫지.

실제로 류하는 그런 이유로 창피하고 괴로운 와중에도 내리 방싯방싯 웃었다.

그래, 난 차였어. 차인 거야. 심지어 날 찬 상대는 내 예비 시동생이야. 내 혼약자의 동생 되는 자라고.

자신이 잠깐 미쳐서 계획대로 상대방을 유혹하기는커녕 자신이 역으로 유혹당해 버렸다. 이제 그 멍청한 시절을 잊고 다른 쪽으로 살길을 모색해야지.

대장군과는 그냥 딱 이렇게만, 서로 마주하며 편안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만, 기마 수업을 핑계로 자연스레 말을 섞을 수 있을 만큼만 가까웠으면 좋겠다.

내 첫사랑이 된 그대를 다른 식으로 잃고 싶지 않아.

“공주마마, 제 손을 잡고 내리십시오.”

먼저 말에서 내린 온이 류하를 올려다보며 침착하게 권했다. 류하는 현실적인 이유로 맞잡았다.

어서 자신이 말에 오르는 것도 내리는 것도 능숙해져서 대장군과 온기를 맞댈 필요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온은 한 손으로 류하의 손을 감싸고,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팔을 받치며 그녀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내려 주었다.

온은 정말로 힘이 셌다. 류하는 자신의 두근대는 심장이 야속했다.

“오늘 기마를 가르쳐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고자 류하는 아까 했던 칭찬을 허겁지겁 반복했다. 온은 류하를 물끄러미 보다가, 살짝 웃었다.

“저야말로 마마처럼 뛰어나신 제자를 두게 되어 영광입니다.”

류하는 조금 기뻤다. 이번에도 온이 황명 운운했으면 정말 우울했을 텐데. 류하의 심장이 희열로 부풀었다가 곧 다시 찌그러졌다. 어차피 무의미한 희열임을 알고.

두 사람과 그들의 수하들은 점차 짙어지는 석양빛을 받으며 후궁전으로 향했다. 류하는 온을 의식하는 대신 곧 자신이 먹게 될 석식에 관해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던 찰나, 상념을 방해받았다.

“안녕하세요, 공주. 안녕하십니까, 대장군.”

생경한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몇 번 들어 보지 않아 귀에 익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확실히 들어 보긴 들어 봤기에 완전히 남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목소리.

예빈과 하빈, 두 사람이 후궁전 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둘 중 입을 열어 인사한 쪽은 예빈이었다.

류하는 환영회의 기억을 더듬어 예빈과 하빈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자기보다 먼저 있던 여섯 명의 후궁을 굳이 친분에 따라 나누자면, 해비 훤아와 성빈 수연이 서로 친하고, 나머지 넷은 또 둘씩 갈렸다.

그중 소국의 공주인 자신을 가장 고깝게 바라보던 두 사람이 바로 눈앞의 저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예빈, 하빈.”

류하는 가장 간단하게, 그러나 빈틈없이 예를 갖추었다. 아직은 저 둘을 어떻게 대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뚜렷한 노선을 정하지 못했다.

만약 저들이 훤아처럼 상냥하게 나온다면 본인도 친절로 화답하여 유대를 쌓으면 되고, 수연처럼 무뚝뚝하지만 무례하지는 않다면 본인도 적당히 정중하게 굴면 그만이다.

하지만 적어도 저 둘이 훤아처럼 무작정 살갑지는 않을 것임은 자명했다. 류하는 저 둘이 제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 정도야 눈치챘다. 이방인 공주라고 깔보는 걸까.

어떡할까. 싸워, 말아? 내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기선을 제압해야 할까? 아니면 일단 굽히고 들어가며 상황을 지켜볼까.

지나친 건방짐도, 과도한 비굴함도 자칫하면 역효과만 낼 수 있었다. 류하는 조심스러웠다.

“환영회 이후로 처음 보네요, 공주. 그간 잘 지냈나요?”

“네, 하빈. 그새 황궁에 적응하느라 바빴답니다. 새로 배울 게 참 많더군요.”

이번에는 하빈이 말을 걸었고, 류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과묵한 호위와 나머지 아랫사람들은 옆에서 공손히 여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예, 그렇겠지요. 게다가 그대는 특히 배울 게 많았겠어요. 아무래도 낯선 나라에 왔으니, 모든 게 새롭겠지요.”

그렇게 꼬집으며 살살 눈매를 휘는 하빈을 보며 류하는 한층 활짝 웃었다.

제가 성격이 꼬여서 그리 듣는 건지, 아니면 정확한 직감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빈의 말이 제법 거슬렸다.

“그래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특히 폐하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로 제게 든든한 스승이자 호위까지 붙여 주셔서, 오늘은 처음으로 기마도 배웠답니다.”

“호위요?”

두 후궁의 시선이 그제야 류하의 곁에 잠자코 서 있던 온에게 틀어박혔다. 둘은 각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어째서 대장군이 뜬금없이 후궁전에서 노닥거리고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미처 물어보지 못하던 참인데, 의문이 해결되자 오히려 더한 의문이 솟구쳤다.

“네. 참 황송하게도 대장군께서 당분간 직접 제 호위를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류하는 단정하게 대답하며 상대편의 반응을 파헤쳤다. 그래, 너희가 봐도 이상하지? 내가 봐도 이상해.

하지만, 황제가 정녕 제 동생을 후궁의 호위로 격하하여 그의 기를 꺾어 놓고자 했다면, 그럴싸한 각본이긴 했다.

“아아, 그렇군요.”

하빈은 다소 머쓱하게 대답했다. 달리 적절한 반응이 별로 없었다.

하빈과 예빈도 류하와 같은 생각이었다. 폐하께서 대장군을 황궁에 두고 싶으시긴 한데, 적당한 핑계가 없으니 후궁의 호위 자리를 내주셨나 보군.

“그나저나, 스승이라고 했나요? 대장군한테서 기마를 배우는 건가요, 공주?”

“네, 그렇습니다.”

“어머, 그렇군요. 이제라도 기마를 배운다니 다행이에요. 사실, 그대가 처음 휘국에 시집온다고 들었을 때 조금 걱정했거든요. 월국의 여인들은 말을 탈 줄 아는 자가 드물다고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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