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39)화 (39/123)

39화

한편, 류하는 나름대로 애쓰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연정을 품은 이상, 그 마음에 파묻혀 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짝사랑이고, 어차피 그쳐야 했으니.

류하는 순간마다 밀어내고 끊어내며 다른 일에 집중했다. 금단의 사랑에 묶여 시들어가는 대신, 새로운 경험에 즐거운 심정으로 몰두하고 싶었다.

“대장군, 말에 오르는 걸 도와주겠습니까?”

하지만 가끔 이럴 때,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매번. 이럴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게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고, 어쩔 수 없이 맞닿아야 할 때.

“물론입니다, 마마.”

이번에는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류하는 치마가 아닌, 길고 낙낙한 웃옷과 통이 좁은 바지로 이루어진 제국풍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느낌이 훨씬 적어서 만약 말이 아닌 마차에 오르는 상황이었다면 타인의 도움 없이 가뿐히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말의 등은 마차보다 훨씬 높았다. 류하는 시작부터 아찔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원래 이렇게까지 컸나?

지금껏 막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보기만 했으니, 한 번도 본인이 막상 올라탈 때를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 없었다.

“꽉 잡으십시오, 마마.”

온은 당부했다. 류하는 굳이 그의 요청 없이도 혹시라도 떨어질까 무서워 그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온은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마.”

류하가 온의 손을 아프게만 할 뿐 말에 오르는 데 별 진전이 없자, 온은 한숨을 삼키며 류하의 허리에 나머지 손을 얹었다.

“읏……!”

류하가 움찔했다. 윽, 이렇게까지 대놓고 신음할 생각은 없었는데.

다만 얇은 봄옷을 뚫고 전해지는 체열이 간지러워서, 유독 예민한 그녀의 잘록한 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온은 심히 난감해졌다. 결국, 그는 속전속결을 택했다. 민망하고 송구한 순간이라면, 그냥 빨리 끝내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온은 한 손으로 류하의 손을 맞잡고 나머지 손으로 류하의 허리를 감싸 지탱하며, 그녀를 순식간에 번쩍 밀듯이 들었다.

류하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민첩하게 움직였고, 온이 자신을 허공에 들고 있는 사이 잽싸게 말의 등에 다리를 걸쳐 스스로 안착했다.

온은 안도하며 손을 뗐다.

“일단 말에 타셨으니, 반은 성공입니다.”

온은 정중한 척 심술궂게 비꼬았고, 류하는 그와 자신의 첫 만남이 떠올라서 괜히 눈을 흘겼다.

온은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서 이 공주도 참, 손이 많이 가는 유형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래서 정이라도 떨어졌으면 좋겠다.’

남의 도움 없이는 말에도 못 오르는 서툴고 성가신 공주니까, 제발 내가 이 사람한테 질렸으면 좋겠다. 정말 귀찮아 죽겠다고 혀를 차며 돌아설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 그게 절대 불가능할 것임을 온은 직감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그 와중에도 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돈하는 공주는, 그의 눈에 너무도 찬란하게 담겼으니까. 마치 햇살로 빚어진 사람처럼.

“그럼 이제 나는 뭘 하면 됩니까? 그대가 나를 어떤 식으로 가르칠 건데요?”

류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부러 도도하게 굴었다. 실은 혼자 말에 오르지도 못해서 허공에서 낑낑대고 있던 게 너무 창피했다.

게다가 자신의 허리에 닿았던 온의 손길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음흉한 잡념을 떨쳐 내기 위해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천히 이동하는 것부터 연습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떨어지지 말고 계십시오. 저도 말에 올라서 옆에서 같이 이동하겠습니다.”

“떨어질 생각은 없었거든요?”

류하는 뚱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온은 다 들었다는 뜻으로 침착하게 대꾸했다.

“보통 사람들이 말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고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마마.”

류하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고, 온은 다시 시치미를 뚝 떼며 말에 올랐다. 대장군의 흠잡을 데 없이 날렵한 탑승을 보고 류하는 한층 더 불퉁해졌다.

‘그래, 은근히 얄미운 구석이 있는 사내였지.’

콩깍지가 두툼하게 쓰일 만큼 저자를 좋아하게 되면서 잊고 있었는데, 대장군의 첫인상은 원래 최악이었다.

류하 자신이 먼저 도발하긴 했지만, 성큼성큼 다가와 막무가내로 너울을 걷으며 그럼 당신은 정말 류하 공주가 맞긴 하냐고 되묻던 놈이었지.

‘그래, 은근 제멋대로에 무심한 얼굴로 할 말은 다 하고 가끔 잘난 척도 조금 하는 놈…….’

그런데 실제로 잘나서 잘난 척이라고도 할 수가 없지. 류하는 입술을 삐죽였다.

방금 멋지게 물 흐르듯 말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솔직히 말해서, 다시 반했다.

반했다는 사실이 분했고, 자신은 잔뜩 추하게 발버둥 치듯 간신히 올라탔는데 저자는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했고, 자신이 분하다는 그 사실이 분했다.

어째서 나는 저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토록 격하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어째서 저자는, 나와 완벽한 남남이 될 수 없었을까. 서로 모르고 살았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공주마마, 고삐를 이리 주십시오.”

온은 류하에게 손을 뻗었고, 류하는 온갖 상념을 치우며 고분고분 그에게 고삐를 넘겼다. 여러 심란한 생각과 별개로, 지금은 승마를 배우는 데 집중해야 했다.

“허리를 곧게 펴셔야 합니다. 몸을 구부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팔은 좀 내리세요. 좀 더 힘을 빼셔도 괜찮습니다.”

“음,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이 정도 높이로?”

“조금만 더 내리십시오. 어깨에 긴장을 더 풀고, 팔꿈치를 그렇게 허공에 치키지 마세요.”

폭풍 잔소리가 이어졌고, 류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행동으로 옮겼다. 온은 몇 번의 지적 끝에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부드럽게 고삐를 당겼다.

“이제 천천히 움직이겠습니다. 혹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두 쌍의 인마가 나란히 이동을 시작했다. 마차를 탈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흔들림에 류하는 바짝 긴장했다. 류하의 다리가 몸통에 밀착하자 말이 거북한 콧김을 뿜었다.

“공주마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힘을 조금 빼셔야 합니다.”

“너무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잘못하면 떨어질 것 같단 말이에요.”

“타다 보시면 익숙해질 겁니다. 그리고 떨어지실 것 같으면 제가 받아 드릴 테니, 마마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온은 진지하게 약속했고, 류하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솔직한 신체 반응이 원망스러웠다.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류하는 굳게 다짐했다. 내가 떨어지고 그대가 나를 받으면, 그대가 다치는 거잖아. 저 믿음직한 약속이 설레면서도 불안했다.

“네, 떨어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온은 담백하게 대답한 뒤, 시선을 돌렸다. 볼에 번진 저 석륫빛 홍조를 너무 오래 보다 보면, 진심이 이성을 이길까 봐.

류하는 온을 흘긋했다. 기분 탓일까. 무슨 영문인지, 온의 뺨도 조금 분홍빛으로 보였다.

따뜻해서 그런가. 봄이라서 그럴 거야. 확실히 봄이 가까워졌어. 새파란 하늘도, 살갗을 훑는 산들바람도. 완연한 봄날에 속했다.

류하는 다시 온을 곁눈질했다. 봄이라서, 그래, 봄이라서. 그대의 볼은 저토록 어여쁜 다홍빛이고, 내 심장은 때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 거야.

류하는 온에게 고삐를 내준 채 연습장을 몇 바퀴 천천히 돌았고, 이후에는 스스로 말을 몰아 몇 바퀴를 더 완성했다. 류하는 들떠서 말했다.

“이제 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요령이 생긴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마마.”

“이제 좀 더 빨리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은 좀 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온은 잔뜩 신이 난 공주를 침착하게 만류했고, 류하는 온의 현실적인 비관에 잠시 뚱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결국 대장군의 조언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고삐를 고쳐 잡았다.

“그러면 연습장을 몇 번 더 돌고 오겠습니다.”

이제는 옆에서 고삐를 잡아 줄 필요가 없으니 자신과 자신의 말은 조금 쉬어도 될 텐데, 온은 구태여 공주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부분을 지적했다.

“마마, 어깨에 힘을 좀 더 빼셔야 합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팔꿈치는 더 내리셔야지요. 아, 고삐는 그렇게 잡는 게 아닙니다.”

“……대장군, 내가 그대에게 정을 떼게 만들려는 고도의 전략입니까?”

“네?”

“아닙니다.”

상대방의 쉼 없는 잔소리를 묵묵히 감내하던 류하가 문득 새침하게 내쏘았다. 온이 당황해서 되묻자, 류하는 금방 물러섰다.

“어차피 별 소용도 없는데, 너무 애쓰네요.”

공주가 끝에 덧붙인 혼잣말을 온은 못 들은 척했다. 류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온이 가르쳐 준 대로 자세를 고쳤다. 확실히 몸이 더 편안해졌다.

“부담스러우시다면 거리를 벌리겠습니다.”

온은 뒤늦게 궁색하게 중얼댔다. 류하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참, 퍽이나 빨리 말하네요.”

저렇게 깐깐한 스승이 옆에 졸졸 따라다니니 부담스러울 만도 하지.

하지만 류하가 숨이 막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참 싫었다.

‘정말 중증이야, 월류하. 이건 그냥 답이 없어.’

저 폭풍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짜증은 나는데, 싫지는 않았다.

온의 지적에 실제로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어서. 그가 거듭 바로잡아 준 덕분에 훨씬 편안하고 안전하게 말을 몰 수 있어서. 그가 자신을 걱정하여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것 같아서.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면, 그래, 적어도 그대가 내게 무관심하진 않으니 다행이구나. 사랑은 아닐지 모르지만, 미움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아.

물론, 자신이 호위하는 공주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이니 그냥 제 할 일을 성실히 하는 걸지도 모르지.

매번 그렇게 합리화하고 핑계를 찾으며, 류하는 성가신 잔소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온정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치부하려 애썼다.

‘뭐야, 저 둘은?’

한편, 멀리서 대장군의 부하들과 나란히 서서 공주와 대장군을 지켜보던 제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위화감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흠, 느낌이 좀 이상한데.’

오랫동안 미천한 하급 궁녀로서 눈칫밥 먹는 데 도가 터서일까.

그녀가 타인의 관계와 감정에 퍽 예리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정작 제하 본인은 잘 몰랐다.

‘저렇게 보니까, 둘이 마치…….’

연인 같은데? 부부? 제 정인이 말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내와, 이에 괜히 귀찮아하는 여인 같잖아. 지금 여기서 이런 각도로 보면 딱 그 그림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