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황제의 여인이 될 자가 말도 못 타서 쓰겠습니까. 이른 시일에 공주가 능숙해지도록 아우님이 도와주세요.>
휘국에는 천마를 타고 하늘에서 강림한 초대 군주가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 신화를 따라 말과 기마술을 신성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게다가 겨울이 긴 척박한 땅에서 용맹함과 강인함을 강조하는 문화가 말을 탄 영웅의 형상과 맞물리면서, 기마란 지위 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익혀야 할 기본적인 덕목으로 여겨졌다.
황제와 혼인하러 온 이방인 공주가 시간이 지나도록 말 하나 제대로 타지 못한다면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게 뻔했다.
그리고 황제의 후궁이 비웃음을 산다는 것은 황실 전체의 위신이 조롱당한다는 뜻과 같으니, 황제의 명령은 타당했다. 온도 그 부분은 이해했다.
그러나 하필 자신이 공주의 스승으로 당첨된 것은 심히 불만스러웠다. 자신의 흑심이 이것을 기회로 알고 요동치는 게 느껴져서 불안했다.
“저한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요?”
온의 불안과 달리 류하의 눈은 반짝였다. 기마술이라니, 월국 왕실에서는 꿈도 못 꿨을 일이었다.
세상에, 내가 황궁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감사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네, 마마. 최대한 빨리 익히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온은 선물을 약속받은 아이처럼 들뜬 공주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당황했다.
왜 눈은 저리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볼은 왜 저리 곱게 연분홍빛으로 물드는데?
저건 반칙이다. 저 얼굴, 저 눈빛, 저 말투가 죄다 반칙이다.
공주와 함께 있을 때는 눈이 멀고 귀가 먹어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온은 내심 소원했다.
“언제부터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류하가 잽싸게 물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이자와 얼마나 어색한 사이인지 잊었다.
나, 나름 고백했다가 차인 거잖아? 불편하기 그지없는 관계였다. 그나마 기대할 일이 하나 생겨서 참을 수가 있었다.
“원하신다면 당장 오늘부터라도 괜찮습니다.”
온은 솔직하게 말했다.
온의 업무는 공주의 곁을 지키는 것이니, 어차피 오늘 온종일 그들은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낼 방도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완벽하네요. 지금 당장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류하는 속전속결로 답했다. 사실, 대장군이 오기 전까지 류하는 엄청나게 따분하던 참이었다.
그저께는 환영회가 있었고 어제는 해비와 성빈과 다과회가 있기라도 했지, 오늘은 원래 딱히 일정이 없었다.
후원을 산책하고 예법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자수는 황궁으로 오는 길에 이미 질렸고.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어, 지금 당장요?”
온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이 빠른 전개는 대체 뭐지. 그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류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지금 시간도 괜찮습니다.”
아, 정말 반칙이야. 저 생기 넘치는 표정. 반짝이는 기대감, 도전 정신 같은 것들.
온은 그런 것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공주 자체가 엄청난 강적이었다.
“그러면 외출할 채비를 갖추세요. 마구간으로 모시겠습니다.”
거대한 황궁에서 기르는 말들을 한꺼번에 모아 두는 곳이 있었다. 그 옆에는 황족들이 승마를 연습할 수 있도록 거의 들판이나 다름없는 널찍한 공터도 있었다.
아직 류하는 황궁의 모든 곳을 둘러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호위를 안내자 삼아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겸사겸사 도주로가 있는지도 살펴보고. 혹시 모르니까.’
그런데, 설령 도주할 만한 길을 찾는다 해도, 내가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잠시만 밖에서 기다리세요. 채비를 갖추고 나가겠습니다.”
“네, 마마.”
저 사내 때문에, 저 사내가 눈에 밟혀서.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게 돼 버린 저 사내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서.
그를 딱 이용하고 싶을 정도로만 호감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 미운 상대라면 유혹하는 것도 고역일 테니, 그냥 구역질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저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면.
그를 어떻게든 꾀어 아군으로 만들고, 황궁에서 도망칠 때 가장 든든한 조력자로 삼을 수 있었다면.
미련으로만 남은 헛된 꿈을 삼키며, 류하는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날씨가 꽤 따뜻해져서 옷을 가볍게 입어도 괜찮았다. 확실히, 봄이 오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온은 두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류하에게 말했다. 어차피 황궁 안에서 움직이는 거니 호위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사실 자기 혼자로도 충분했을 텐데, 그건 너무 본인의 사심을 채우는 것 같아서 자제했다.
류하는 자신과 대동할 궁녀로 제하를 골랐다. 공주와 궁녀는 대장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온은 황궁 지리를 아직 잘 모르는 류하를 위해 조금씩 앞장서면서도 공주가 혹시라도 뒤처지지 않도록 거리를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그 결과, 둘은 거의 나란히 걷는 모양이 되었다.
‘너무 가까워…….’
거리가 너무 좁다. 류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딱 봐도 자신을 배려해서 간격을 좁힌 그에게 ‘저기요, 심각하게 부담스러우니까 제발 떨어져 주실래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류하는 울적하게 인내했다.
한편, 온은 류하의 옷과 머리칼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대륙의 어느 나라에서든 여인에게 강요되는 미의 기준은 사내의 것보다 가혹했고, 그런즉 여인들은 으레 후각적으로도 자신을 가꾸기 위해 향유를 목욕물에 풀거나 몸에 바르기도 했다.
그래서 공주를 둘러싼 공기도 이토록 향기로운 건가.
온은 자아 분열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공주에게 바짝 다가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털에 코를 묻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반대로 코를 틀어막고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한쪽은 변태 같았고, 한쪽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온은 깊이 상심했다. 변태거나, 무례하거나. 최선의 선택지 따위는 없고, 오로지 최악과 차악뿐이구나.
“여기입니다. 이곳에서 궁의 관리들이 황실 소속 말들을 먹이고 기릅니다.”
감사하게도, 온이 자신의 변태 성향에 굴복하거나 무례를 범하기 전에 그들은 마구간에 도착했다.
마구간, 이라는 다소 평범한 이름을 붙이기에 조금 미안할 정도로 웅장한 공간이었다.
“와, 말이 되게 많네요.”
류하는 단순하게 감탄했다. 소매로 코를 덮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으며.
온실 속, 아니, 별궁 속 화초로 자란 그녀는 밀집한 말들의 강렬한 냄새가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그냥 한두 마리도 아니고, 한꺼번에 수십 마리가 모여 있었다.
“궁에 사는 황족뿐 아니라 황실의 관리들도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말입니다. 평소에 수가 넉넉한 게 안전하지요.”
온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러더니 공주를 힐끔 관찰했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공주마마, 정 냄새가 견디기 어려우시면 궁녀와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도 됩니다. 저는 말을 골라서 가겠습니다.”
이런, 들켰군. 너무 결벽증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표정을 관리하던 류하는 매우 머쓱해졌다.
“그럼 나와 제하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공주마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온은 정중하게 말했고, 류하는 고개를 꾸벅한 뒤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잽싸게 뒤돌아 마구간 밖으로 사라졌다.
온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명백하게 냄새 때문에 괴로운 와중에 끝까지 말하지 않고 참으려던 모습이 귀여웠다.
‘……젠장.’
이제는 별게 다 귀여워 보이는구나. 온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정신 차려, 휘온. 보름 뒤에 혼례를 치를 사람이라고.’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눈빛이 급속도로 냉각됐다. 살짝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절색이시군요. 궁인들이 수군대는 얘기를 들었는데, 과장인 줄 알았습니다.”
공주와 궁녀가 완전히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 온의 부하 하나가 재잘거렸다. 말을 고르던 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엄격하게 말했다.
“폐하의 여인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마라.”
“네, 대장군님.”
부하는 금세 조용해졌다. 그의 동료가 너는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그랬느냐고 눈빛으로 욕했다. 온은 더더욱 굳은 얼굴로 천천히 짐승들을 살폈다.
‘폐하의, 여인.’
그래, 폐하의 여인이었다. 자신이 마음에 담아서도 안 되고, 역으로 마음에 담겨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이야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니, 본인의 마음이라도 제대로 간수해야 할 텐데.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아서 그는 잠자코 좌절했다.
“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라.”
“네, 대장군님.”
온은 자신이 탈 말과 공주를 태울 말을 한 필씩 고른 뒤, 전자를 부하에게 맡기고 후자는 본인이 조심스레 이끌었다.
부하를 못 믿는 건 아니었으나, 공주마마께서 타실 말은 자신이 직접 다루기를 원했다. 그래, 이것도 중증이구나. 온의 좌절이 깊어졌다.
“공주마마, 말을 대령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궁녀와 함께 승마장을 둘러보며 가볍게 대화하던 류하가 온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고삐로 이끌리는 늠름한 짐승을 보고 류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예뻐라.”
정말 미친 생각이지만, 온은 공주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말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말에게도 이름이 있습니까?”
“보통 번호로 분류됩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는 애마에 이름을 붙이시기도 합니다.”
“이 아이는 누군가의 애마인가요?”
“아뇨, 황실 관리들이 빌려 쓰는 말입니다. 원하신다면 공주마마께 속할 수도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말의 머리를 쓱쓱 매만지던 류하가 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매를 둥글게 접으며 빙긋 웃었다. 온의 심장이 쿵, 추락했다.
“글쎄요. 내가 이 아일 원하는지 안 원하는지는 한 번 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아아. 나한테 고백해 놓고 저런 식으로 웃으면 안 되지. 온은 애꿎은 공주가 원망스러워서 시선을 피했다. 말을 향한 질투가 깊어졌다.
이제는 하다못해 동물을 부러워하다니, 정말 자기 자신이 놀라울 만큼 한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