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사실, 류하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어차피 그리 복잡한 추론도 아니었다.
‘이것도 정치적 견제의 일부인 건가.’
지난 5년간, 남쪽에서 공주 한 명을 데리고 오라는 비교적 평화로운 임무를 맡기 전까지, 온은 내내 제국의 변방에서 직접 전장을 돌아다녔다고 들었다. 그것도 물론, 황명에 따라.
황제의 동생이자 상급 황족인 그가 굳이 다른 장수들처럼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다. 그곳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동시에 가장 위태로운 자리였으니.
‘여태 그를 전쟁터로 내몬 것도 견제가 목적이었고, 이제는 궁에 머물긴 머물되 한직이나 전전하라, 이건가?’
류하의 추리는 사실에 근접했다.
잠재적 경쟁자를 멀리 내쳐 권력의 중심지인 수도에 얼씬도 못 하게 하느냐, 아니면 아예 가까이 두어 감시하고 통제하기 훨씬 쉽게 하느냐.
아마 황제는 동생을 상대로 두 번째 방법을 택한 듯했다.
‘……그럼 적어도 당분간, 다시 전장에 나가지는 않을 거란 뜻인데.’
류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심장이 안도와 기대로 콩콩 뛰었다.
류하는 정복 전쟁을 곧 중단하겠다는 황제의 뜻을 당연히 아직 몰랐다. 그러니 온이 더는 전장에 나갈 필요도 없다는 사실도 미처 몰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걱정했었다. 군인인 그가 언젠가 또 떠날까 봐. 이번에는 떠나기만 하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까 봐.
“그럼, 언제까지 내 호위를 맡는 겁니까?”
류하는 최대한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무 사심 있는 것처럼 들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치 이중인격처럼 너무 무덤덤하게 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딱, 미지근하길 원했다.
“구체적인 기한은 없습니다. 아마 한동안은 제가 호위대장일 것 같습니다.”
온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도 공주만큼이나 중립적인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한동안, 이요?”
류하는 살짝 겁먹어 물었다. 온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도저히 자신이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될 즈음에 시선을 내렸다.
“네, 공주마마. 한동안이요.”
이게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륜이 온을 불러 월국 공주의 호위를 맡기겠다고 했을 때, 그의 뇌리와 심중에는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어지럽게 교차했었다.
공포와 의심부터 기쁨과 절망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아우님, 아우님은 아마 태후마마와 가까이 지내고 싶겠죠? 아우님은 효자니까요. 다시 궁에 들어오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 황제가 자신을 불러 나긋한 음성으로 서두를 꺼냈을 때, 온은 조심스레 침묵했다.
예전처럼 다시 황궁에 살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과연 황제가 허락할지 의문이었다.
<다시 입궁하세요. 이미 말했듯, 그대가 다시 출전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자리로 돌아와야죠. 평생 궁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립지 않았습니까?>
젠장, 황후 전하가 퍽이나 좋아하시겠군. 온은 속으로만 욕할 뿐, 겉으로는 잠잠했다.
<앞으로 다시 황궁에서 살아도 좋습니다. 다만, 일거리를 하나 드리죠. 명분이 있으면 그대한테도 좋을 겁니다. 알다시피 그대를 멀리멀리 쫓아내길 원하는 신하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대를 비난할 때 받아칠 만한 핑계가 있다면 좋겠지요.>
네 죽음을 바라는 자들이 수도에 득시글댄다는 말씀을 참 상냥하게도 하신다. 대충 흘려듣던 온은 다음 순간, 아무것도 삼키지 않았는데 뿜을 뻔했다.
<월국 공주의 호위대장이 되세요. 어떻습니까?>
어떻냐고? 기쁘고도 두려웠다. 기쁨과 두려움이 동의어였다.
<후궁의 호위라니, 딱 적당할 것 같습니다. 권력이 쏠릴 일도 없고, 동시에 황궁에 상주할 훌륭한 이유가 되겠네요. 평소에는 공주를 지키고, 시간이 남으면 태후마마를 찾아가 효를 다하십시오. 나쁘지 않지요?>
그럴싸했다. 후궁도 어쨌든 황족이고, 황족의 호위대장은 황궁에 상주하는 게 원칙이었다.
업무 시간에는 공주를 지키고, 다른 때에는 어머니를 찾아뵈면 되겠구나. 이상적이었다.
아니야. 이상적이지 않아. 내가 공주를 가까이하는 건 결코 이상적인 일이 아니야.
그 사람을 마주하면 울렁거리거든. 때로는 울고 싶기도 하고, 해맑게 방긋 웃고도 싶어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래.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미친 것 같아.
<그럼, 오늘 바로 가서 공주에게 인사하면 되겠네요. 둘이 원래 구면이긴 하지만.>
그리하여 온은 자신이 당신의 호위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고자 공주를 찾아왔고, 그 사실을 듣고 식겁한 공주가 섭섭하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하여 많이 심란했다.
‘중증이야, 정말…….’
이 상황에 귀엽다니. 정말 맥락 없는 귀여움이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앳된 티가 남은 공주가 자신을 눈앞에 두고 차마 진정하지 못해 절절매는 모습이 깜찍하다고 생각했다. 진정 심각한 수준이었다.
‘변태에, 역적에, 패륜아에, 젠장…….’
온은 자신도 고작 스물두 살인 건 생각하지도 않고 스무 살 공주가 너무 어린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병아리가 병아리를 보고 근심하는 꼴이었다.
게다가 이건 엄연한 역모였고, 형의 여인을 탐하는 패륜이기도 했다. 굳이 행동을 취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참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물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긴 했다.
그런데 나날이 커져 가는 이 마음을 본인이 과연 흘리지 않고 감당할 수 있을지, 온은 의문이었다.
“잘됐네요.”
류하가 불쑥 말했다. 말해 놓고 후회했다.
제하가 황궁에서 오래오래 살아남길 바라서 말조심해야 한다고 그리도 당부했거늘, 지금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어쨌든 그대가 궁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류하는 서둘러 덧붙였다. 온은 류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진심을 말했다.
“네, 마마. 저도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황궁에 돌아올 수 있어서. 매일 어마마마를 찾아뵈고 그간 부족했던 효도에 힘쓸 수 있어서.
공주를, 당신을, 호위라는 건전한 핑계를 대고 실은 불순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나의 고통이고 기쁨인 공주마마. 당신께 저는 오직 기쁨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그 밤의 고백에 담긴 마음은 전부 잊으세요. 전부 버리세요. 그래야만 당신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마마께서 정식으로 후궁이 되신 후에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선을 그었다. 의도적으로 본인과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후벼 현실을 일깨웠다.
공주는 곧 월빈이 될 것이다. 그녀가 황제와 정식으로 혼인하고 나서도, 그는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혼례와 초야. 그대는 그런 것들을 전부 지켜봐야 하겠지. 류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본인이 혼자 견디는 것도 힘든데, 그때마다 온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든든하기는커녕 억장이 무너졌다.
물론, 비참함은 나만의 몫이겠지만. 류하는 자신이 짝사랑 중이라고 확신하며 온을 서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백했지만, 그는 고백하지 않았다. 형수님이 되실 당신을 지키겠다며 공손히 보호를 약속할 뿐.
‘그래, 다행이야. 진짜로. 이 뭐 같은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잘된 일이야.’
류하는 본인을 애써 달랬다. 대장군도 나를 마음에 담았다고 생각해 봐. 제 형과 혼인할 여인을 연모하는 사내라니, 듣기만 해도 너무 가엽잖아.
심장이 갈가리 쪼개지는 듯한 아픔은 자기 혼자 견디면 그만이었다. 어떻게든 마음 정리하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이곳은 황궁, 전장과 같은 곳이니까.
자신이 기어코 도망치든, 아니면 끝까지 버텨 살아남든, 대장군에 대한 연심을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계속해서 미련한 짝사랑을 이어 간다면 도망칠 때 괜히 망설여질 테고, 그를 좋아하는 상태에서 내리 황제의 후궁으로 살아가는 건 나락과 같을 테니.
“그리고 마마, 여쭐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기마를 배우신 적 있습니까?”
“아니요, 배운 적 없습니다.”
“그럼 혹시 제가 감히 공주마마를 가르쳐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휘국의 백성은 사내든 여인이든 말을 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마께서 아직 기마술에 무지하다는 걸 아시고 폐하께서 제게 가르침을 명하셨습니다.”
<듣자 하니 월국의 여인들은 왕족도 말을 타지 않는다는데. 아마 류하 공주도 승마를 배워 본 적 없지 않을까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우님께서 공주를 가르쳐 주세요.>
황제가 덧붙인 명령을 듣고 온은 거의 기함했다. 호위를 맡은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운데, 기마를 가르치라니. 필요 이상으로 공주와 가까워질 계기가 생긴 것 같아 두려웠다.
<폐하, 정식으로 스승을 붙여 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온은 급기야 소극적인 반항을 시도했다. 그러자 륜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대체 누구한테 공주의 수업을 맡기겠습니까? 외간 사내를 데려다가 공주를 가르치라고 할까요? 내 신부인데 말이죠.>
온의 명치끝이 욱신 쑤셨다. 외간 사내, 그리고 신부라. 온은 다소 충동적으로 되물었다.
<저 또한 외간 사내라고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륜이 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온은 후회하며 시선을 내렸다. 륜은 곧 눈꼬리를 둥글게 접더니, 나긋하게 대꾸했다.
<외간 사내라니요. 아우님은 나와 내 아내의 가족이 될 자 아닙니까.>
가족이라는 단어는 본디 포근한 울타리를 뜻할진대, 어째서 황제의 입에서 저런 맥락으로 사용되면 목을 조르는 올가미처럼 여겨질까.
<같은 황실 여인에게 공주의 가르침을 맡긴다면 가장 좋겠지만, 해비는 남을 가르칠 만큼 기마술이 뛰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황후는.>
동급의 후궁끼리는 사제의 서열을 나누지 않는 게 황실의 암묵적 규칙이었다.
그러니 훤아나 화은이 류하를 가르쳐야 할 텐데, 여기에 륜이 망설이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황후는, 공주와 최소한으로 엮이는 게 모두에게 나을 것 같군요.>
륜은 침착하게 얼버무렸다. 화은에게 자신의 다른 아내를 교육하라고 명하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대밖에 없습니다, 아우님. 후궁 하나 가르치는 일로 번거롭게 정식 스승까지 초빙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가족끼리 서로 돕는 식으로 해결하면 되겠네요.>
그러면서 륜은 빙긋 웃었고, 온은 예비 형수를 도우라는 황명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