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륜은 증오로 들끓는 마음과 통증에 짓찢긴 다리를 달래기 위해 처소를 벗어나 뒤뜰에 숨어들었다. 그곳에는 그와 다른 한 명만 더 아는 귀여운 생물체가 살고 있었다.
“너희는 좋겠다.”
륜은 우울하게 중얼댔다. 수풀 틈에 숨어 오글거리는 엄마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들을 지켜보며 륜은 비애를 품었다.
“나도 그냥 고양이로 태어날걸.”
고귀한 황자로 태어났으나 한낱 길고양이 무리를 부러워하는 팔자가 기구했다. 옷도 집도 필요 없이, 나도 그냥 너희처럼 귀여운 모습 하나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면.
내가 반쪽만 고귀한 게 문제일까. 내 어머니도 다른 후궁들이나 황후처럼 명문가의 여식이었다면, 내가 조금 덜 불행했을까.
“형님.”
그때, 앳된 음성이 들렸다. 륜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모에게 얻어맞아 통통 부은 얼굴에 별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아우님. 왔어요?”
길고양이 가족이 숨어든 황궁 후원의 비밀스러운 구석은 사실 두 황자의 놀이터였다.
비교적 방치되어 궁의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형이 동생에게 이곳을 소개했다.
“형님, 왜 얼굴을 다치셨습니까?”
짤막한 다리로 총총히 다가온 어린 온이 형의 멍든 뺨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륜은 찡그리듯 웃었다.
“걷다가 넘어져서 다쳤습니다. 내가 칠칠하지 못했죠. 신경 쓰지 마세요.”
온이 나이가 조금 더 많고 세상과 황궁을 조금 더 알았더라면, 걷다가 넘어졌다는 저 허술한 거짓말에 곧이곧대로 속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곱 살 남짓의 온은 아직 영민할지언정 순진했고, 그래서 슬픔보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약은 잘 바르신 거지요? 흉이라도 질까 두렵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우님. 이미 꼼꼼히 발랐습니다.”
그나마 그건 사실이었다. 명색이 황자인 자신이 천박하게 얼굴에 흉터나 남기고 돌아다닐 수 없어서 궁녀들과 내관들이 정성껏 치료해 줬다.
“그나저나 아우님, 저기 고양이들을 보세요. 많이 크지 않았습니까?”
륜은 효과적으로 화제를 돌렸고, 온은 단순한 어린아이답게 곧 대화의 일관성을 잊고 고양이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꼬마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네, 그러게요. 게다가 나날이 더 귀여워지는 것 같습니다.”
온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근처에서 꼬물대는 새끼 고양이들을 구경했다. 현명한 꼬마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참을성 있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게요. 나날이 더 귀여워집니다.”
륜은 부드럽게 대꾸한 뒤,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온은 질색하며 버둥거렸다.
“으윽, 형님, 안 돼요, 이러면 머리가 엉망이 된단 말입니다.”
“하하.”
이때만큼은 평화로웠다. 자신의 동생 중 유일하게 자신을 하찮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허물없이 대해 주는 아이와 단둘이 남은 시간.
모친들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륜의 다른 동생들은 륜의 생모가 나날이 난폭해지는 천한 무수리 출신의 후궁임을 알고 륜을 슬금슬금 피했다.
륜은 그들 전부를 미워했지만, 증오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신경질적인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나서지 말자. 앞서지 말자. 지금은 일단 숨죽여 기다리자. 언젠가, 때가 올 거야.
“형님,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아우님. 살펴 가세요.”
오직 이 아이만이 순수하고 올곧은 눈으로 혈육을 혈육답게 대했다. 륜은 온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어떻게 우리 아버지와 네 어머니 같은 사람들에게서 너 같은 아이가 나왔을까.
좋은 스승을 둔 덕일까? 어릴 적부터 황태자였던 너는, 만민을 너그럽게 보듬고 공정하게 베푸는 법을 배웠기에 궁에서 천대받는 내게도 이토록 친절할까.
너는 언젠가 황제가 되고, 성군이 되겠지.
그러고 나면, 나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형님.”
온은 일어나서 싹싹하게 인사했다. 천덕꾸러기 1황자와 달리 황태자 전하는 너무나 고귀하신 분이니, 호위들과 궁인들을 오래 따돌리지 못해 서둘러 떠나야겠지. 륜은 순순히 납득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아우님.”
착한 동생은 내게 한없이 상냥하지만, 황후와 황제와 황제의 가신들은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경계한다.
태자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내가 하필 맏이이고, 또한 어릴 적부터 문무에 출중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동생이 무사히 보위를 물려받고 나면, 일찌감치 너무 많은 이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버린 나는 어찌 되는 걸까.
어릴 적부터 륜의 두려움은 깊었다. 그 두려움이 앞날의 많은 것을 좌우했다.
륜의 나이 스물, 온의 나이 열다섯. 륜의 어머니가 병에 걸려 승하했다.
“황자…….”
“네, 어머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
모친의 임종을 지키던 륜이 울먹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냉소적인 가면이 점점 단단해진 그였지만, 어미의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너졌다.
광증에 가까운 신경증으로 아들을 지독하게 괴롭혀 온 엄마였지만, 그래도 엄마였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륜은 황제를 아비로 치지 않았다. 여인을 탐하는 마음으로 무수리에게 멋대로 승은을 내렸다가 정작 아들이 태어나니 천출이랍시고 방치한 사내.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옛날부터 다짐하고 있었다.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는 어쩌나. 완벽히 혼자가 된다는 생각에 륜은 서럽게 떨었다.
“황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대를 괴롭게만 해서 미안해요.”
병상의 여인은 뜻밖에도 흐느끼며 사과했다. 륜은 깜짝 놀랐다. 그가 모친의 앙상한 손을 감싸 쥐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 덕분에 저는 늘 기뻤습니다. 어머니 덕분에 저는 외롭지 않았어요. 사과하지 마세요, 어머니. 부디 울지 마세요.”
거짓말. 전부 거짓말. 아비를 죽여 버리고 싶듯이 어미의 죽음을 바란 적도 많잖아.
하지만 연민은 늘 원망을 이겨, 아들은 결국 자신의 뒤틀린 엄마를 사랑했다.
“그대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인은 가냘프게 속삭였고, 륜은 덜컥 굳었다.
여인은 떨리는 손을 뻗어 아들의 뺨을 감쌌다. 손이 너무, 너무 차가웠다. 죽음이 그렇게 차갑다는 사실을 륜은 처음 알았다.
“가여운 내 아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낳지 말걸, 네가 이렇게 힘들 줄 알았더라면…….”
넋두리는 횡설수설 이어졌고, 륜은 빤히 쳐다보다가, 어미의 식어 가는 몸을 조심스레 안았다.
“어머니,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전부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가 중얼중얼 약속했다. 여인은 물먹은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아아, 아니야,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야. 다 내 불찰이야. 그러나 더는 말을 쥐어짤 힘이 없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한을 품은 원혼이 되어 구천을 떠도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다 갚아 드릴 테니까요.”
황자의 음성은 몹시 차가웠고, 엄마를 다독이는 손은 몹시 따스했다.
륜은 다정한 아들로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 스러져 가는 모친의 이마에 륜은 입을 맞췄다. 그는 지순하게 타일렀다.
“그들의 삶이 당신의 죽음보다 훨씬 비참할 겁니다. 그러니 편하게 가셔도 됩니다, 어머니. 원한은 남겨 두지 마세요. 부디 쉬세요.”
아아, 아니야, 내 아들아. 복수를 위해 살아가지 마. 어쩌면 여인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부디 저승에서는 평안하세요.”
륜은 속삭인 뒤, 다시 모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맹세를 품고, 더운 눈물을 흘리며.
아직 이 나라의 황제가 바뀌기 전, 그런 나날이 있었다.
제6장. 황궁의 봄
황궁에서의 네 번째 날. 류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대가 나의, 뭐라고요?”
하얗게 질린 그녀의 맞은편에 온은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공주마마의 호위를 맡을 겁니다.”
“아니, 그대가 왜…….”
온이 애써 침착하게 아뢰자 류하는 창백하게 탄식했다. 온은 주춤했다. 그는 류하를 잠깐 흘긋하더니, 조금 처량하게 되물었다.
“그렇게나 싫으십니까?”
황제(皇弟)에게 일개 후궁의 호위를 맡기는 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놀랄 수는 있어도, 저렇게까지 질색하는 건 역으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온은 그 이유를 알았다. 공주는 제게 고백했고, 자신은 그 고백을 무참히 차 버리다시피 했으니.
이제 그들은 그 밤의 일을 얘기하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잊지도 못한 채 서로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 될 날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니요, 싫은 게 아닙니다.”
류하는 엉겁결에 너무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자리에 오직 단둘이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단둘이기에 이토록 자유롭게 얼굴을 붉힐 수 있으니까.
웬만하면 홍조를 참아 보려 했는데,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너무 좋아질까 봐 걱정인 거죠.”
쓸데없는 솔직함이 이어졌다. 류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치마폭을 바르쥐는 손길이 애처로웠다.
“……마마께서 그런 말씀만 삼가 주신다면 서로 문제 될 부분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온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때의 고백은 그렇다 치고, 황궁에 도착해서까지 저런 위험천만한 말을 내뱉는 공주 때문에 기가 막혔다.
아니, 공주보다 더 황당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대체 왜, 저 철없는 어린 공주의 장단을 일일이 맞춰 주고 있는 건지.
“그런데, 정말 어째서 그대가 내 호위나 맡는 겁니까?”
어느 정도 평정을 회복한 류하가 고개를 들고 미심쩍은 부분을 파고들었다.
황제나 황후도 아닌 한낱 후궁의 호위라니, 통상적으로 비교적 낮은 지위의 무관들에게 내려지는 업무거늘.
온은 엄연히 황제의 친동생이요, 그런즉 굉장히 상급 황족이었다. 아직 황손을 낳은 것도 아닌 최하급 품계의 이방인 후궁을 보살피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폐하께서 친히 명하신 일에 대해 제가 어찌 의문을 품겠습니까? 저야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온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알맹이는 없지만 굳이 흠잡을 데도 없는 답변이었기에, 류하는 찝찝함을 누르며 별수 없이 수긍했다.
“네, 뭐,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