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내가 무슨 염치로 그대에게 답서를 쓰겠습니까? 이 늙은 어미가 구질구질하게 살아 그대의 약점이 되는 바람에 그대가 그 꼴을 당했는데.”
태후가 속삭였고, 온은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그가 모친의 거칠어진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 말씀은 마세요, 어마마마. 구질구질하다뇨. 저는 마마께서 건재하게 버텨 주셔서 기쁘기만 합니다. 마마 덕분에 제가 여태 견딜 수 있었습니다.”
온은 태후의 손등에 공손히 입을 맞췄다. 모친의 불안감이 그를 괴롭게 했다. 괴로움은 죄책감과 직결되었다. 그는 모친의 오해 아닌 오해를 씁쓸하게 곱씹었다.
아아, 하루아침에 권위도 권력도 지아비도 잃고 이런 쓸쓸한 별궁에 유폐되신 나의 어머니.
형님은 당신을 약점 삼아 저를 자신의 충견으로 삼으셨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설령 제게 인질로 잡힌 어머니가 없었더라도 자신은 그날 형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을 것 같다고 온은 음울하게 생각했다.
아비의 잘린 목을 마주한 그 순간에도, 그는 그저 살고 싶었다. 딱히 고귀할 것도 없는 원초적인 생존 본능이었다.
어쩌면, 가장 구질구질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전장에서 공을 쌓으라는 황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쓴 것도 결국 본인이 살기 위한 선택이었으니, 어머니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대가…… 그대가 이런 수모를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태후는 고통받는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노모의 눈가에 물기가 어룽어룽 맺힌 걸 보고 온은 명치끝이 아팠다.
이럴 때면 형님이 정말, 정말 미워지는데. 또 온전히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그대는 이 나라에서, 이 궁에서 고작 이런 취급을 당할 자가 아닙니다. 장수라뇨. 왜 그대가 직접 전방에 나가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입니까? 어째서 사지에 직접 뛰어들어야 하는데요?”
어차피 폐하께서 곧 군사적 팽창을 그치신다고 하셨으니 더는 자신이 사지에 뛰어들 일도 없다고 온은 해명하지 않았다.
황제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제게만 털어놓은 내용을 함부로 누설할 수 없었다.
“원래는 그대의 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자리였다고요. 현재 황상께서 떡하니 차지하신 안전하고 고귀한 용좌는 원래 그대의 것이었습니다, 황자.”
태후는 나직하게 한탄했고, 온은 창백해졌다. 그가 어미의 손을 꽉 잡았다.
“어마마마. 부디, 단둘이 있을 때라도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리고 어머니, 안전하다뇨. 안전한 용좌라뇨.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하나요?
보위가 그렇게나 안전한 자리라면, 왜 당신의 지아비이자 제 아비는 그리도 허무하게 목이 잘렸나요?
“그것이 어찌 제 자리였겠습니까. 제위는 아바마마의 맏아들이신 황제 폐하께서 물려받는 게 마땅했습니다. 처음부터 그게 옳았습니다. 그러니 부디 불경한 말씀은 마세요.”
자신이 그 말을 믿는지 않는지는 상관없었다. 장자인 형이 보위를 물려받은 게 옳았을지, 적자인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게 맞았을지 이제 와서 따지는 의미도 없었다.
온은 그저, 살아남고자 했다. 살아남으면서도 지키고 싶었다.
“어마마마. 저와 당신은 오래오래 살 겁니다. 평화롭고 풍족하게 장수할 겁니다. 그러니 부디 음울한 얘기는 삼가세요. 좋은 일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그렇게까지 제위가 간절했던 적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니 걸맞은 책임을 다하겠다고 결심했을 뿐.
이제 온은 새로운 책무가 생겼다. 자신과 모친과 부하들을 지키고, 본인도 가늘고 길게 천수를 누리는 것.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제가 불효막심하여 너무 오래 어마마마를 혼자 뒀습니다. 이제는 곁에 남을 테니, 심려하지 마세요.”
더는 전쟁터에 나갈 일도 없을 테니, 앞으로는 자주 들러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지. 형님도 그 정도는 눈감아 주실 거야.
“우리는 이제부터 행복할 겁니다.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온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거듭 힘주어 말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렇게라도 제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가족을 만나는 일인데, 이렇게나 힘겨울 줄이야.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깝고 편안해야 할 피붙이를 대면하는 자리인데, 처음부터 기가 쭉쭉 빨렸다.
‘……보고 싶어.’
그때, 우습게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치고 지겹고 전부 때려치우고 싶어지면, 뜬금없이 머릿속에 나타나 그의 마음을 헤집는 누군가가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시려나.’
형님과 어머니와 다른 모들 이들 때문에 괴로울 때, 우습게도 당신을 마주하면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지.
온은 마음을 꺾으려 애썼다. 애만 썼다. 별로 성과가 없었다.
어느새 독초처럼 심중에 자라난 갈증을, 아무리 자르고 도려내도 뿌리째 뽑아내지는 못했다.
누구보다 우아한 황후가 있었다. 또한, 누구보다 초라한 후궁이 있었다.
“1황자가 이번 강론에서 시를 발표했다지? 어린 나이에도 문장력이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황송합니다, 황후 전하.”
이건 온이 황태자고 륜이 황자이며, 두 사람의 어미가 모두 살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
무수리 출신의 후궁으로 늘 자신의 비천한 배경을 열등감으로 품고 살아온 후궁은, 명문가의 여식으로 몸짓 하나하나에 기품이 묻어나는 황후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대가 황송할 게 뭐가 있나. 내가 그대의 문장력을 칭찬한 것도 아니거늘. 설마 황자가 그대를 닮아 그리 총명하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황후는 나긋하게 웃으며 인자한 어투로 후궁을 푹푹 찔렀다. 후궁은 어깨를 움츠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빛이 일순 표독해졌지만, 약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1황자가 그리도 영특하다니 참 기쁜 일이야. 그 아이가 나중에 크면 동생의 훌륭한 충신이 되지 않겠는가. 그대의 아들이 내 아들을 잘 보필할 생각에 벌써 기특할 따름이네.”
“……황송합니다, 전하.”
“그대는 정말, 황송하다는 말밖에는 할 줄을 모르는군.”
황후가 생긋 웃었다. 후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게 대놓고 모욕을 준 뒤, 황후는 고상한 동작으로 치마폭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이만 물러가겠네. 잘 지내도록 하게.”
“네, 황후 전하. 살펴 가십시오.”
“그래. 부디 그대의 아들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후궁은 황후가 방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황후가 복도에서 벗어나는 시간도 계산해 당분간 조용했다.
이윽고 후궁은 본인의 머리를 감싸 쥐며 처절하게 첨예하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처음에 그녀가 아들을 낳았을 때, 황제의 장자를 출산한 그녀는 온 세상을 가진 듯 우쭐하여 황후와 다른 후궁들 앞에서 곧잘 으스대곤 했다.
상처가 빚어낸 오만함이었다. 천한 무수리라는 이유로 은근한 멸시를 견뎌야 했던 그녀는 드디어 상황이 역전됐다고 믿고 그간 참아 왔던 울분을 기다렸다는 듯 터트렸다.
정치적으로 너무나 서툰 행동이었다. 뜻밖에 찾아온 권세에 취하지 않고 겸손하게, 현명하게, 가식을 부려서라도 다른 여인들과 친분을 쌓았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황후와 귀족 출신의 다른 후궁들은 자신들이 업신여기던 옛 무수리가 아들을 낳은 뒤로 날뛰기 시작하자 기가 막혔다.
그래도 황자를 낳은 그녀를 어찌할 수 없었기에 모멸감을 억누르며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어느 날, 황후가 아들을 낳았다. 두 번째 역전이었다. 다시 온전히 강자가 된 쪽은 집요한 보복을 시도했다.
황후는 궁궐의 후덕한 안주인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내명부 여인들을 전부 자매처럼 품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 기고만장하여 저를 모독했던 비천한 계집은 예외였다.
황후는 륜과 륜의 어미를 지독하게 구박했다. 평소에도 마음이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던 륜의 어미가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황후가 이렇게 다녀간 날이면, 륜의 어미는 본인의 머리칼을 쥐어뜯고 비명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물건을 내던지곤 했다.
어린 륜은 경쾌한 걸음으로 처소에 돌아왔다. 다른 황자들과 함께 글공부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쓴 시로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었다. 최근에 부쩍 눈물도 잦아지시고 밤잠도 설치시는 것 같은데, 자신이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소자 륜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소년은 문 밖에서 공손히 아뢰었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륜은 입장했다.
“어머니, 제가 오늘, 윽!”
어머니는 다가오는 아들의 뺨을 날렸다. 륜은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많이 당해 본 일이기에, 이제는 익숙했다. 익숙하다고 무뎌지는 건 아니었지만.
“황자, 바지를 걷으세요.”
여인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쉭쉭거렸다. 이것도 륜에게는 익숙한 전개였다.
가끔 다르길 바라며 어머니께 나아왔고 실제로 다른 날도 많았으나, 오늘은 운이 나빴다. 그래, 그냥 불운했다. 그렇게 믿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회초리를 가져오세요.”
륜은 고분고분 복종했다. 그는 핏자국이 말라붙은 두꺼운 나뭇가지를 찾아 어머니께 건넨 뒤 고분고분 그녀 앞에 서서 종아리를 드러냈다.
이미 흉터가 가득한 여린 살 위로 무자비한 매질이 내리쳤다. 소년은 내내 잠잠했다.
“이 어미가 뭐라 말했습니까? 늘 아우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했죠? 그대가 가장 빛나서는 안 됩니다. 왜 분수를 모르고 늘 나섭니까?”
검술을 익힐 때, 승마를 배울 때. 륜은 늘 다른 황자들보다 민첩하며 눈부셨다.
그의 동생 온도 비슷한 재능을 보였지만, 아직 륜보다 훨씬 어린 꼬마였기에 전반적으로 훨씬 서툴렀다.
“내가 내 분수를 모르고 설쳤더니 지금 이 꼴이 난 게 아닙니까? 내가 그대 하나 믿고 그렇게 나섰는데 왜 지금 그대는 이 모양이란 말입니까, 왜!”
여인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아들을 폭행했고, 륜은 다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울지 않았다. 다만 고장 난 인형처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송구합니다.”
이후, 륜의 궁녀들과 내관들이 다가와 그를 치료했다.
륜은 아랫사람들에게 살가운 편이었고, 후궁마마의 광증에 지친 그들은 어린 황자님을 연민하며 그를 위해 울먹였다.
“오늘 누가 어머니의 처소에 다녀갔느냐?”
륜은 덤덤하게 물었다. 내관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륜은 천천히 읊조렸다.
“그래. 그렇구나.”
또 그년이야. 소년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황후가 또 다녀가서 내 어머니가 저 모양이야. 미워 죽겠어. 그냥 확 죽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