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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34)화 (34/123)

34화

“맞아요, 그건 그래요. 나도 이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에 관해서는 책에서만 읽어 봤지, 실제로 눈으로 본 곳은 손에 꼽을 정도랍니다. 물론, 황궁의 후원도 사시사철 충분히 아름답지만요.”

“황궁의 후원이 참 예쁘기는 하죠. 저는 가을에 단풍이 들 때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나는 봄꽃이 필 때가 가장 좋아요. 류하 공주, 그대는 어떤 계절을 제일 좋아하나요?”

“아, 저는…….”

이후, 대화는 계절에 대한 화제를 시작으로 더 무난한 흐름을 타고 매끄럽게 이어졌다.

류하는 남몰래 안도했다. 휘국 사람들 앞에서 월국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이 사람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고, 고향 얘기를 하다 보면 이 사람들이 미워질 것 같았다.

한창 대화가 무르익고 다과가 꽤 줄어들었을 때쯤, 해비의 궁녀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전했다.

두 살배기 황녀가 낮잠을 자기 싫다고 칭얼대는 바람에 유모가 애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해비마마, 아무래도 마마께서 직접 가셔서 황녀 아기씨를 달래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나는 괜찮은데, 공주와 성빈은…….”

훤아는 무안한 낯으로 두 사람을 흘긋했다. 손님들을 그냥 두고 아기에게 쪼르르 달려가기가 미안했다. 그러나 수연은 몹시 적극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해비마마. 같이 가서 아기씨를 봐도 될까요?”

그래, 이쪽은 원래 이럴 것 같았고. 훤아는 이제 류하를 돌아보았다. 류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며 다소곳이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사실, 류하는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이전에는 아기를 본 적도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아기란 시끄럽고, 축축하고, 너무 세게 안으면 부서질까 두려운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싫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고.’

보아하니 훤아는 당연히 딸아이가 걱정되는 듯했고, 수연도 의외로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황녀의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2황녀 연은 유모의 품에 담겨 처량하게 옹알거리고 있었다. 훤아는 혀를 차며 다가갔다.

“쯧쯧, 연아. 무슨 일로 이렇게 유모를 괴롭히는 거니, 응? 어서 뚝 그치고 자야지.”

“히잉, 어머니.”

비단옷을 입은 자그마한 꼬마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엄마에게 폭 안겼다. 류하는 충격을 받고 쳐다보았다. 세상에, 귀엽잖아?

“어머니, 자기 싫은데 계속 졸려요.”

“졸리면 자야지. 자기 싫다고 고집부리면 안 된단다.”

“아기씨, 내가 곁에서 재워 드릴까요?”

이때, 수연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류하는 선망의 눈빛으로 아이를 보는 수연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정말 내가 아는 성빈이랑 동일 인물인가? 단언컨대, 성빈은 지금 저 황녀의 귀여움을 거의 숭배하고 있었다.

“성빈마마, 하지만 저는 자기 싫습니다.”

“낮잠을 푹 주무셔야 무럭무럭 더 예쁘게 크시지요. 어서 누우십시오. 내가 자장가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수연은 능숙하게 아이를 받아 침대에 얌전히 누였고, 황녀의 유모는 살려 줘서 고맙다는 눈빛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침대 옆에 앉아 아이를 다독이며 달고 낮은 음성으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공주, 우리는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요? 아마 성빈은 계속 황녀 곁에 있을 겁니다.”

훤아가 온화하게 속삭였다. 류하는 끄덕였다. 두 사람은 후원으로 나갔다.

북쪽인 휘국은 확실히 월국보다 추웠으나, 이곳도 계절이 봄인지라 선들바람이 퍽 포근했다.

“성빈이 처음에 무뚝뚝해서 조금 당황했죠, 공주?”

“……아닙니다.”

훤아가 빙긋 웃으며 돌아보자 류하는 조심스레 부정했다. 공주의 빈말을 듣고 훤아는 인자하게 미소했다.

“이해해 주세요. 그 애의 말마따나 공주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랍니다. 다만, 후궁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것에 대해 조금 불만이 있었던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공주, 이건 정말 우리끼리만 하는 얘기입니다만, 그대도 황제 폐하와 혼인하기 원해서 자의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죠?”

류하는 침묵했다. 훤아는 악의도 꾸밈도 없이 다시 빙긋 웃었다. 그 눈빛은 부드러웠고, 조금 슬퍼 보였다. 두 여인은 느리게, 나란히 걸었다.

“사실, 나는 딱히 불만이 없었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부모님이 정해 준 상대와 정략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니까요. 그 대상이 폐하가 된 것뿐이고요.”

휘국에서 연애결혼은 드물지 않았으나, 귀족 남녀의 경우 여전히 중매를 통한 정략결혼이 훨씬 흔했다.

세도가 여식인 훤아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부유한 명문가에 태어나 남들보다 더 편히 사는 대가로 감당해야 할 족쇄라고 묵묵히 수긍했다.

“나는 황궁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이 좋습니다. 함께 지내는 후궁들도 다 착한 아이들이고, 무엇보다 황녀 아기씨가 너무 예뻐요. 후회는 없습니다.”

훤아는 조곤조곤 설명했고, 류하는 훤아의 눈매에 드러나는 순한 성격이 꾸며낸 게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녀는 참 유순하게, 담백하게, 뜨거운 정열이 아닌 잔잔한 온기를 품고, 주어진 숙명에 대한 불만이나 의문도 없이 고분고분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성빈은 조금 상황이 달랐습니다. 자세한 건 그 아이의 개인사니 내가 다 말해 주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후궁으로 간택된 건 그 아이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수연은 연인이 따로 있었다. 거기까지 류하가 알아낸 건 조금 나중이었다.

훤아는 수연의 사생활을 존중하여 일단 비밀을 지켰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성빈은 자주 우울해해요. 본인 말마따나 조금 삐딱하기도 하고요. 아마 공주를 보고 동병상련의 마음에 괜히 툭툭거렸나 봅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류하는 입궁하기 전의 수연을 상상해 보려 애썼다.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까. 어제와 오늘처럼 음침하지는 않았겠지.

“나는 그대가 이 나라 황궁에 잘 적응했으면 합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해요. 그래서 오늘 그대를 불렀습니다. 그대의 나라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이게 진짜 이유랍니다.”

훤아는 다소 처연하게 생긋 웃었고, 류하는 자동으로 마주 웃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훤아의 진심을 곡해하긴 어려웠다.

서로 싸우지 않아야 평화롭고, 편안하니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쳇바퀴 돌아가듯 똑같아야 삶에 안정이 있을 테니까.

그런 것들을 위해, 이 사람은 당연히 다른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할 것이다.

류하는 문득, 훤아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세상은 자신의 기준에서 너무 갑갑할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허물없이 대해 주셔서.”

류하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래, 애송이 이방인 공주에게 분수를 가르치겠다며 같잖은 신고식으로 찍어 누르는 것보단 낫지.’

류하는 훤아의 평탄한 호의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앞으로도 감히 마마께 계속 의지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해비마마는 저보다 훨씬 선임이시니까요.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인 것 같습니다.”

“어머, 고마워요. 얼마든지 의지해도 좋아요.”

류하는 살갑게 청했고, 훤아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방긋 웃었다. 저 예쁘고 유한 미소를 바라보며 류하는 속으로 확신했다.

이 사람은 절대, 내가 황궁에서 도망치는 걸 도와주지 않을 거야.

의지가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류하가 도주의 가능성을 아예 마음속에서 지워 버린 건 아니었다.

만약 황궁에서의 삶이 생각보다 너무 버겁거나 비참하다고 판단된다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도록 무의식중에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순한 후궁은, 맑고 착한 눈으로 제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만족하며 딸을 귀애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다른 후궁이 도망치는 걸 도울 리가 없지. 황실의 안정과 여식의 안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일 텐데.

류하는 훤아의 상냥함을 마음에 담았다. 앞으로 이분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 샘솟았다. 동시에, 순전한 친분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비마마.”

“나도 그대가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공주.”

무난한 대화가 흘렀다. 황궁에서의 셋째 날이었다. 슬슬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가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은 정갈히 허리를 숙여 극진한 예를 갖췄다. 눈가에 잔주름을 새긴 여인은 굳은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온은 여인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어마마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온은 조심스레 물었다. 오랜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효자로 소문난 대장군이지만, 정작 황궁에 도착하고 나서 지난 이틀간 그는 태후궁에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야 그는 유폐된 어머니의 처소로 나아왔다.

“내리 서신을 보냈는데 답서가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무탈하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온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정한 안도였다. 착한 그는 어머니 앞에서 빈정대는 법을 몰랐다. 안도인 동시에, 지극한 아픔이었다.

“……그대야말로 무탈하게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황자.”

태후가 드디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그러잡는 동작도 어딘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지난 5년간 쭉 그래 왔다.

“나는 그대가, 그대가 전쟁터에서 해를 입을까 봐, 얼마나…….”

태후는 끝내 낮게 흐느꼈고, 온은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왈칵 울며 입을 틀어막는 제 모친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는 형이 밉다가도, 연민이 원망을 압도했다.

“항상 그대를 걱정했습니다, 황자. 늘 그대를 위해 기도했어요. 그대가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이 어미 곁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태후는 다급히 속삭였고, 온은 애달프면서도 불안정한 모친의 고백을 묵묵히 경청했다. 그러다 입을 열어 질문했다.

“그렇게 절 걱정하신 분이 왜 제 서신에는 답서 한 통 없으셨습니까?”

자신의 충정을 입정하기 위해 전쟁터로 내몰리며 얼마나 당신을 그렸는데. 형님이 당신을 인질로 잡은 걸 알고 매 순간 당신을 걱정했어.

그 그리움과 걱정을 담아 당신께 편지를 부쳤는데, 돌아오는 건 단절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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