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33)화 (33/123)

33화

류하는 어제 만났던 해비라는 여인을 떠올렸다. 나이는 자기보다도 많지만 마치 아이처럼 순한 눈빛을 지었던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굳이 미모를 따지자면 수수한 축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명문가 여식답게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이 묻어났었지.

‘순하다고 만만한 건 아니니까.’

상대방의 성품이 유하다는 이유로 얕잡아 보는 인성 파탄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위계로 따지자면 류하 자신이 훨씬 아래였다.

‘당연히 응해야지.’

후궁들 전부가 모인 자리도 아니고 그냥 세 명이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 류하를 초대한 거 보니, 정말 소소한 친목이 목적인 듯했다.

‘그냥 나한테 잘해 주고 싶은 건가? 아니면 간을 좀 보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싶어서?’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가볍게 단장하며 류하는 상대방의 의도를 가늠해 보았다.

만약 신입 신고식을 통해 자신의 기를 꺾어 두려는 의도라면 후궁들 전체를 모았겠지. 그러니까 그쪽은 아닌 것 같고.

‘뭐, 가 보면 알겠지.’

류하는 혼자만의 추론의 한계를 느끼고 순순히 해비의 처소로 향했다. 일단은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요, 공주.”

훤아는 맑은 미소로 류하를 맞이했다. 류하는 경계심도 잊고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예법에 맞는 일이기도 했지만, 저 순진한 얼굴에 적의를 품기는 어려웠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앉으면 돼요.”

“감사합니다, 해비마마. 안녕하세요, 성빈.”

“안녕하세요, 공주.”

수연은 이미 와 있었다. 수연은 덤덤한 표정으로 류하를 맞이했다. 류하는 어제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로 연회에 참석했던 수연을 생각했다.

‘흠, 그냥 평소 성격인가 보네.’

“차 종류가 다양한데,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제가 아직 휘국의 차가 익숙하지 못해서, 해비마마가 추천해 주시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어머, 영광까지야. 그럼 이걸 마셔 보세요. 과일 향이 들어가서 퍽 상큼하답니다.”

“감사합니다, 마마.”

훤아는 온화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끌었고, 류하는 매끄럽게 편승했다. 우습게도, 어머니가 떠올라서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어머니보다 언니에 가까운 나이이긴 했지만, 어쨌든 저보다 연상의 누군가가 자신을 이리 살갑게 챙겨 주는 건 모친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이었다.

“이 과자랑 같이 드셔 보세요. 둘이 잘 어울릴 거예요.”

“아아, 네. 고맙습니다, 성빈.”

이번에는 수연이 말을 건넸다. 류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류하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우울한 눈빛이긴 했지만, 냉담하거나 난폭하지는 않았다.

저 딱딱한 기색을 한 꺼풀 벗겨 내면 그 아래 생각보다 따스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류하는 조용히 생각했다.

“성빈이 조금 말수가 부족해도 이해해 주세요, 공주. 이 아이가 좀 낯을 가리는 편이거든요.”

“그런 거 아닙니다, 마마.”

훤아가 웃으며 말하자 수연이 얼굴을 붉히며 나직하게 딱딱거렸다. 그러나 그 딱딱거리는 음성에도 가시는 없었다.

“저는 낯을 가리는 게 아닙니다. 성격이 삐딱한 거죠.”

수연은 새침하게 덧붙여 놓곤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류하는 당황해서 끔뻑끔뻑 쳐다보았다. 아니, 갑자기 웬 자폭인지. 내가 모르는 휘국식 화법이 따로 있는 건가?

“어휴, 성빈,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공주가 오해하잖아요.”

아니구나. 내가 모르는 휘국식 화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어. 훤아가 자신을 곁눈질하며 허둥거리는 걸 보고 류하는 침착하게 안도했다.

“오해는 무슨. 제가 삐딱한 건 사실이잖아요.”

수연은 담백하게 반박했고, 훤아는 더욱 절절맸다. 중간에 끼인 류하는 이 어색한 폭풍이 한시바삐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수연은 차를 좀 더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류하를 응시했다.

“사실, 사과하고 싶었어요, 공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가 좀 너무 음침하죠? 공주가 이해해 주세요. 내가 공주한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게 내 성격이에요.”

“아아, 네. 어, 물론이죠. 그대를 오해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류하는 횡설수설했다. 역시, 그녀는 아직 인간관계가 어려웠다. 평생 거의 어머니와만 교류했기에 아직은 이런 쪽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성빈, 공주 좀 그만 놀려요. 봐요, 공주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놀린 거 아닙니다만. 방금 진심 어린 사과를 했는걸요.”

훤아와 수연은 잠시 옥신각신했고, 류하는 그 적의 없는 다툼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왜 이렇게 사이좋아? 누가 보면 자매인 줄 알겠네.’

류하는 월국 후궁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었다. 호색한 임금은 곁에 많은 여인이 있었고, 그중 대부분이 서로 사이가 나빴다. 서로 모함하거나 헐뜯는 일도 적잖았다.

사람들은 그게 전부 여인들이 투기가 심해서 그런 거라고 욕했다. 글쎄, 류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진짜 악당은 그 여인들을 전부 한곳에 몰아넣고 싸움을 붙인 부왕 놈 아니야?

‘하긴, 서로 싸워 봤자 실질적으로 얻을 건 없지.’

같은 지아비를 뒀으면서 서로 이토록 허물없이 지내는 해비와 성빈의 관계가 얼핏 보면 기괴할지 모르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해비는 어쨌든 성빈보다 한 품계가 높으니, 수연이 훤아에게 대들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훤아의 경우, 수연을 적으로 돌려봤자 득보다는 실이 컸다.

좋든 싫든 같은 내명부의 일원으로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야 하는데, 서로 껄끄러우면 본인들만 손해였다.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답이었다.

‘……둘 다 황제를 연모하진 않는구나.’

아무리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정치적으로 현명하다 한들, 만약 자신이 연모하는 지아비가 다른 여인과 살을 섞는다면. 그 여인을 보며,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나는 못 해.’

류하의 속마음이 드러났다. 류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을 잊고 이곳에 없는 누군가에 대한 상념에 빠졌다.

‘나중에 대장군에게 아내가 생기면…….’

독신이 별로 권장되는 사회가 아니었으니, 아마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온도 조만간 혼인할 것이다. 게다가 스물두 살이면 상당히 적기였다.

그때가 언제가 될까. 그때, 나는 황제의 후궁으로 완벽하게 적응하여 내 시동생과 동서를 보며 진심으로 웃어 줄 수 있을까? 축하해 줄 수 있을까? 어제, 대장군이 내게 그랬듯이?

<혼례를 미리 감축드립니다.>

아아. 그때 그대는 어떤 심정이었어?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봤어?

“공주. 류하 공주?”

“아, 죄송합니다, 마마.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요.”

“우리 둘끼리 너무 쓸데없는 말만 했죠? 미안해요. 손님을 앉혀 두고 무례를 범했네요.”

“아닙니다. 두 분이 친자매처럼 살가운 모습이라 오히려 마음이 따뜻합니다.”

졸지에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비꼬는 것처럼 들릴까 봐 류하는 아차, 싶었다. 같은 후궁끼리 서로 이렇게까지 친밀한 게 이상하다고 내가 돌려 깐 것처럼 들리려나?

“하하, 그건 그래요. 내가 친언니 같죠? 말썽꾸러기 동생을 돌보는.”

“해비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다행히도 훤아와 수연은 오해하지 않았다. 훤아는 온유하게 방긋거렸고, 수연은 계속 새침한 표정이었다.

류하는 점점 안도했다. 낯선 황궁에서 그나마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사실, 공주가 여기 오기 전부터 공주에 대해 궁금해하는 자들이 많았어요.”

“저에 대해서요?”

“네. 폐하께서 외국인을 후궁으로 들이는 건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우리 중에는 제국 밖으로 나가 본 이가 아직 없어요.”

“제국 바깥은커녕 궁궐 밖으로 나가기도 힘든 상황이죠.”

훤아가 친절하게 설명하자 수연이 뚱하게 덧붙였다.

류하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월국보다 상황이 조금 낫다고는 하나, 휘국의 문화도 유독 여인들에게 보수적이라는 점은 같았다.

특히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황제의 여인들이 멋대로 유람이나 떠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전부 제국에서 태어나 제국에서만 자랐으리라.

“다른 나라들에 관해 책으로나 입소문으로만 접해 본 게 전부이다 보니, 어떤 게 그냥 소문이고 어떤 게 진짜 정보인지 구분하는 것도 어려워요. 그래서 공주가 황궁에 오면, 공주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요. 월국이란 나라에 관해 현지인의 입을 통해 알아내고 싶었거든요.”

훤아의 설명을 듣던 류하의 눈빛이 조금 식었다.

얘네 지금 진심인가? 너희 나라가 침략하고 착취한 내 나라에 관해 얘기를 듣고 싶다고? 저 악의 없는 호기심이 퍽 가증스러웠다.

‘하여간, 재수 없는 제국 것들.’

훤아의 해맑은 상냥함과 수연의 뚝뚝한 듯 까칠하지는 않은 태도에 휩쓸려 어느새 잊고 있었다.

이 여인들의 고국은 류하의 적국이나 다름없었고, 그녀는 이곳에 끌려온 이방인 공주였다.

이렇게 순수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든, 편견과 경멸의 대상이 되든 너무 쉽게 타자화되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새삼 상기한 류하는 마음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래, 좋은 사람들이겠지. 그뿐이야.’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아서, 어떤 면에서는 성인군자인 사람이 어떤 면에서는 악당이 따로 없고, 누군가에겐 더없이 이로운 사람이 누군가에겐 해충과 같을 것이다.

해비와 성빈도 분명 심성이 곱고 품위를 갖춘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뼛속까지 강대국의 신민이었다.

그들은 약소국에서 끌려온 힘없는 공주에게 예민한 주제를 꺼내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착하게 답변을 기다렸다.

‘뭐, 이 사람들이 나한테 미안해서 절절매는 모습을 바란 건 아니지만…….’

얘네가 직접 칼 들고 내 나라 백성을 죽인 건 아니니, 너희가 잘못했다고 비난하기도 애매했다. 그래도 최소한, 내 앞에서 월국을 언급하면서 조심스러워할 줄은 알아야지.

‘조금, 짜증 나네.’

하지만, 여기서는 내가 약자. 내가 굽히고 들어가야지.

“제 나라에 그토록 관심을 보여 주시니 영광이에요. 그런데 아쉽지만, 저도 마마와 성빈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왕실의 여인이 궐외로 나가기 힘든 건 월국도 휘국과 같으니까요.”

류하는 사실대로 둘러댔고, 훤아와 수연은 살짝 실망하면서도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