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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32)화 (32/123)

32화

해비의 저 선한 인상이 정말 다정함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훌륭한 가식인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알 것 같았다.

성빈의 저 울적한 분위기는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적대적인 것 같진 않았고.

두 명의 호의적인 호기심은 가장 편안했지만 그럴수록 류하를 긴장하게 했다. 그 편안함에 취해 자신이 방심할까 봐 두려웠다.

제일 껄끄러운 건 나머지 둘이었다. 약소국의 공주를 하찮게 여기는 제국 귀족들의 눈빛. 류하는 그들을 향해 가장 눈부시게 웃었다.

“앞으로 함께 어울려 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해비마마. 벌써 이렇게 살갑게 대해 주시니 제 마음이 다 놓입니다.”

“하하, 그래요? 다행이네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해비는 다른 후궁들의 대표로 공주와 매끄러운 대화를 이어 갔다. 아직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별개로, 류하는 해비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정말 밝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게 진짜 모습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럼 연회를 즐기도록 하세요, 공주. 나중에 또 인사하도록 해요.”

“네, 해비마마.”

해비는 인자하게 웃으며 물러났고, 류하도 끝까지 웃는 낯으로 후궁들을 보내 주었다.

‘자, 이제 음식을 좀 먹어 볼까.’

류하는 잽싸게 다시 수저를 집었다. 그러나 그건 헛된 꿈이었다.

후궁들이 사라지자마자 여태 빈틈을 노리고 있던 다른 손님들이 달려들었다.

환영회에 초대받은 방계 황족들은 너도나도 공주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나아왔다. 겸사겸사 개인적인 호기심도 채우고.

‘으아, 힘들어……!’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과 줄줄이 얘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구나.

‘으윽, 역시 도망칠 걸 그랬어.’

이제는 조금 다른 이유로 황궁에 도착한 걸 후회했다. 그냥 사람들의 시선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능을 써서라도 벗어날걸.

“공주마마.”

아, 맞다. 그런데 나, 설령 이능을 쓰기로 결심했다 한들, 도망치지 못했겠구나.

“혼례를 미리 감축드립니다.”

이 사내 때문에 나는 남기로 결심했어. 내가 무사히 도망치면, 나를 놓친 죄로 이 사내가 다칠까 봐 무서워서 가지 못했어.

“……아직 혼례까지 시간이 남았는데, 벌써 감축 인사입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사내 때문에 더더욱 도망칠 걸 그랬다.

저자가 나를 저런 눈빛으로 보며 혼례를 축하한답시고 헛소리를 하는 걸 듣자니, 그냥 도망치는 게 나을 뻔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런 인사를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우리는 구면 아닙니까.”

온은 부드럽게 말하며 류하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와 눈을 맞추기 두려우면서도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마치 홀린 듯, 뭔가를 탐하듯 정신없이 바라봐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혼례에 대한 축하는 너무 이른 감이 있네요. 정작 혼례 때에 가서는 할 말이 없어지잖아요.”

류하는 배고픔도, 피로도, 계속 식사를 방해받고 있다는 짜증도 잊고 온을 빤히 응시했다.

저 검은 눈은 정녕 황제를 닮았다. 동시에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왜 할 말이 없습니까? 새신부에게 건넬 덕담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요.”

온은 담백하게 받아쳤다. 지금 본인의 말이 더 아픈지, 자신을 보는 공주의 눈빛이 더 아픈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기를 빌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감축 인사는 오늘 미리 드려도 괜찮겠지요.”

온은 나직이 덧붙이며 류하의 식탁에 놓인 술병을 가볍게 잡았다. 류하가 아직 술을 따른 적 없기에, 병은 묵직했다.

“술을 드시지 않으십니까?”

온은 정중히 여쭈었다. 이어서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향긋한 곡주가 도자기에 담겼다. 마치 눈물처럼 맑았다.

“드셔 보세요.”

온이 병을 내려놓았다. 그는 내리 류하를 바라봤고, 류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최고의 명주만을 내놓으셨으니, 분명 마마의 입맛에도 맞을 겁니다.”

류하는 문득, 참담한 충동을 느꼈다. 저 매끈한 뺨을 싸쥐고 얼굴을 끌어다가 입술에 입술을 포개고 싶다.

입맞춤이란 무엇인지, 사내의 숨결은 어떤 맛이 나는지 알아보고 싶어.

그걸 알려 주는 대상이 바로 그대, 내 정혼자가 아닌 내 정혼자의 동생인 그대였으면 좋겠어.

굳은살이 박인 그대의 크고 따뜻한 손이 내 뺨을 감싸면 어떤 느낌일까. 그대의 숨결이 입술에 닿을 때, 나는 어떤 감촉으로 인해 어떤 희열을 느낄까.

“고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강력했고, 그녀는 지금 자신의 예비 시동생을 보고 있었다. 류하는 시선을 내려 잔에 담긴 술을 내려다보았다.

“고맙습니다, 대장군.”

류하는 잔을 들어 술을 살짝 삼켰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켜 차라리 취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정말로 제국의 황족들 앞에서 나라 망신을 제대로 시킬까 봐 애써 자제했다.

게다가, 자신이 만약 취해서 이성을 놓는다면 정말로 이 사내에게 입을 맞출까 봐 무서웠다.

“앞으로도 그대와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제 서로 정말 가족이 되는 거니까요.”

류하는 거짓 미소를 그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달빛 아래 흘렀던 고백은 없던 일로 치기로 했다. 그래야 우리 모두 무사할 테니.

“네, 공주마마.”

온의 대답은 짧았다. 말을 더 길게 늘였다가는 허언이 튀어나올까 봐 두려웠다. 그는 꾸벅인 뒤 물러섰고, 류하는 군중 속에 혼자 남았다.

그녀는 식탁에 차려진 소담스러운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모처럼 틈이 나서 이제야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더는 입맛이 없었다.

그냥, 도망칠 걸 그랬다.

길 잃은 후회는 침묵에 묻혔다.

공주를 위해 환영회를 연 날, 황제는 황후와 합방했다.

낮에는 첩실을 맞이하고 밤에는 정실과 동침하는 일이 참 해괴했으나, 원래 황실의 법칙이라는 건 해괴한 일투성이였다.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의 수를 줄일 겁니다. 그리고 변방에 나가 있던 귀족들도 대부분 다시 불러들일 생각이고요.”

내의 차림으로 간단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채 륜은 담백하게 폭로했다. 술잔을 만지작대던 화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슬슬 정복 전쟁도 정리해야죠. 더는 예전처럼 몰아붙일 일도 없어졌으니까.”

륜은 아비를 죽이고 보위에 오르자마자 대륙의 각지로 군대를 보내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굴복시켰고, 이로써 전쟁광이자 폭군이라는 꼬리표를 얻었다.

그가 전쟁을 유용하게 써먹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맹목적으로 전쟁에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여태 팽창과 침략에 군사를 갈아 넣은 건 스스로 명분을 부여하기 위함이었고, 제 즉위를 반대하던 기존의 주류 귀족들을 깔아뭉개기 위함이었다.

전쟁을 통해 영토와 노예를 얻자 그를 패륜 황자라 욕하던 백성들도 어느새 그를 위대한 정복 군주라 칭송했다.

그의 즉위를 반대하던 자들은 징병이라는 핑계로 전장에 보내져 희생되었다.

군수 물자로 쓰이기 위해 재산과 사병을 바치라고 명하면, 그 귀족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거역한다면 황명에 불복하는 반역죄일 뿐 아니라, 제국의 영광을 위한 전쟁에 기여하기를 거부하는 매국노의 행위일 테니까.

지난 5년간 륜은 그런 식으로 전쟁을 활용했고, 이로써 희생된 자국과 적국의 백성들은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온이 황제가 됐더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형제는 서로 그렇게 달랐다.

“덕분에 지난 5년간 내게 정통성을 들먹이며 시답잖게 떠들던 놈들은 싹 조용해졌습니다. 슬슬 전략적으로 달래 줘야죠. 통치 내내 전쟁만 하면서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지난 5년간 자신이 얼마나 무자비한 전쟁광이 될 수 있는지 보여 줬으니, 자국의 신하들과 이웃 나라의 왕들이 전부 알아서 겁에 질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륜은 그런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제 후계만, 후계만 정해지면 됩니다.”

륜은 온화하게 읊조렸다. 화은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륜은 술상 너머로 손을 뻗어 아내의 고운 뺨을 건드렸다. 그가 먼저 입술을 겹쳤다. 벌써 두 사람의 입에서는 알싸한 술 향기가 났다.

“하루빨리 그대가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네요.”

륜이 속닥였다. 화은은 남편을 마주 어루만지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참 지긋지긋했다. 지긋지긋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제일 슬펐다.

“참 애석한 일입니다. 세상이 아직 어리석어 여인에게 권좌를 허락하지 않으니 말이에요.”

륜은 중얼대며 화은을 이끌었다. 황후의 등이 이불에 닿았다. 사내의 손길에 따라 여인이 옷이 한 겹씩 헐거워졌다. 화은은 팔을 뻗어 륜의 목을 안았다.

“한데 그랬더라면 그대가 날 죽이고 대신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무서운 상상이네요.”

“폐하, 그런 농담은 하나도 웃기지 않습니다.”

화은은 남편과 입술을 맞댄 채 불만스레 대꾸했다. 륜은 아내의 몸을 매만지며 키득, 웃었다.

“그래요, 앞으로는 삼가겠습니다.”

촛불이 일렁였다. 당분간 숨소리만 들렸다. 황제의 품에서 황후는 생각했다.

그래, 여인도 권좌를 물려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 제발, 우리의 딸로도 충분했으면 좋겠어.

당신이 다시는 다른 여인을 지금 나를 안듯 안지 않았으면 좋겠어.

“서자는 안 된다 하고, 여인은 안 된다 하고. 왜 이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그렇게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눅진한 열기 가운데 륜은 한탄했다. 화은은 깊이 동감하며 그를 쓰다듬었다.

“뭐, 그럭저럭 적응하며 살아가야겠지요.”

륜은 혼잣말처럼 한숨짓더니, 아내의 입술을 다시 뜨겁게 머금었다. 화은은 남편을 끌어당겨 제 안으로 무너트렸다.

긴긴 하루 끝에, 긴긴밤이었다.

제5장. 황제의 여인들

환영회 다음 날, 류하는 궁녀를 통해 전갈을 받았다. 해비 훤아가 보내는 초대장이었다.

자신의 처소에서 성빈과 둘이 다과를 들 예정인데, 혹시 함께하겠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형식은 의문문이었지만, 사실 제게 선택권 따위 없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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