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31)화 (31/123)

31화

류하는 오전 내내 휘국 궁중 예법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후, 가볍게 점심을 먹고 난 뒤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는 드디어, 대망의 환영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공주마마, 치장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직 류하의 호칭은 공주마마였다. 황제의 후궁이 되고자 입궁하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기 전까지 그녀는 휘국의 후궁이 아닌 월국의 공주로 불렸다.

혼례. 혼례라. 그 단어를 생각하면 류하는 두려웠다.

어제 잠깐 마주했던 상냥하고도 섬뜩한 황제를 생각했다.

그와 살을 맞대는 것, 사내를 알지도 못하는 몸을 억지로 열어 그를 받아들이는 것. 그의 밑에 깔려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것.

‘싫어…….’

아아, 진즉 도망갈걸. 궁인들과 군졸들과 대장군이 어찌 되든 상관없이, 오직 나 하나만을 생각하며 정신없이 도망갈걸.

대장군. 온 대장군.

그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을까? 조만간 당신의 형수가 될 나를?

오늘 환영회에서 그대를 볼 수 있을까. 만약 본다면, 그대는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공주마마, 눈을 감으십시오.”

궁녀는 눈 화장을 위해 정중히 아뢰었다. 류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뽀얀 살갗은 더욱 뽀얗게 변했고, 입술의 분홍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눈매는 더 짙어졌고, 속눈썹은 더 풍성해졌다.

이미 아름답던 공주는 능숙한 궁녀들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따라 더욱 찬란해졌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류하는 면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 역시 예뻐. 그래 봤자 소용없어. 그대가 날 보고 어찌 생각하는지, 나는 물어볼 수조차 없어.

“환복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마마.”

류하는 겹겹의 비단에 휘감겼다. 수의를 입는 것 같았다. 값비싼 천이 몸을 옥죄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갑자기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헉헉대면 궁녀들이 놀랄까 봐 류하는 지금 제게 산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감췄다.

어떻게든 그녀는 우아한 척, 차분한 척, 왕족의 가식을 그러모아 꿋꿋하게 버텼다.

무너질 수 없었다. 발버둥을 쳐서라도 버텨야 해. 머나먼 타향에 던져진 천덕꾸러기 이방 공주는,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이 자기 하나밖에 없으니.

“공주마마, 모시겠습니다.”

이제 대전 연회장으로 향할 때였다. 황제와 황후, 여섯 명의 후궁, 대장군과 다른 황족들이 모인 그곳으로.

류하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멀쩡하지 않은데 멀쩡한 척하는 건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월국에서 지낼 때, 국왕의 다른 자녀들은 류하를 잡귀의 딸이라 놀리며 한 번씩은 꼭 시비를 걸곤 했다. 때로는 류하의 어머니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

그때마다 류하는 멍든 마음을 숨기며 그들을 차갑게 경멸하는 쏘아보는 법을 익혔다. 때로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상큼하게 웃어 주었다.

오늘 제국의 잘나신 황족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쳐다보든 기죽지 않을 거야. 예쁨 받아 본 기억은 어차피 별로 없잖아.

여태 나를 아껴 주고 존중해 준 이는 어머니밖에 없었어. 깔보거나 경계하는 시선은 차라리 익숙하니, 아무렇지 않아. 당당하게 튕겨낼 수 있을 거야.

다만, 그대는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른 이들의 혐오와 냉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본다면, 숨어야 할 것 같았다.

“월국의 월류하 공주마마 납십니다!”

류하가 온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사이, 연회장 문이 열렸다.

압도적인 광경과 소리 앞에서 류하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주인공의 등장은 맨 마지막에 이루어졌고, 그런즉 류하가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문 쪽을 열심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궁정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환영의 의미로 연주하는 축가이겠지만, 류하의 귀에는 자신을 위한 특제 장송곡처럼 들렸다.

혀끝까지 쌍욕이 치밀었다가 새하얗게 바스러졌다. 긴장 때문에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고……!’

류하는 올해 고작 스무 살이었고, 평생 별궁에서만 지냈기에 어떤 일이든 경험이 적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물론 처음이었다.

월국에서는 거의 모두에게 외면받던 그녀가 돌연 만인의 관심사가 되어 조명 아래 던져졌다. 화려한 음악과 웅성대는 소리가 넘쳤다.

누군가는 호의적인 호기심으로 기웃거렸고, 누군가는 벌써 오만하게 그녀를 평가하는 느낌이었다.

지금 그녀는 너울도 쓰고 있지 않았다. 숨을 곳이 없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절박하게 시선을 굴리던 그녀의 눈에, 단 하나의 익숙한 얼굴이 담겼다.

‘……대장군.’

온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황제의 좌측에 그가 있었다.

그는 류하를 보며 입 모양으로 격려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예쁘다며 빙긋 웃어 주지도 않았고, 차갑고 낯선 눈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단순히 류하를 바라보았다.

고작 그뿐인데, 왜 이리 용기가 날까. 왜 갑자기 침착해지는 걸까.

류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내디뎠다. 사뿐히, 어여쁘게. 비단옷이 곱게 나풀거렸다.

“세상에, 공주가 엄청난 미인이네요.”

“제가 보기엔 어쩌면 황후 전하보다 더…….”

손님 하나가 놀라서 눈치 없이 숙덕대자 옆에 있던 다른 손님이 서둘러 그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다행히도, 황후는 듣지 못했다. 황후를 비롯한 진짜 귀하신 분들은 훨씬 먼 상석에 앉아 있었다.

한 걸음씩, 또 한 걸음 더. 류하는 온에게 가까워졌다.

온은 계속해서 류하를 바라보았다. 류하는 시선을 다소곳이 내리깐 채 온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를 직시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지금 눈이 마주친다면, 펑펑 울거나 활짝 웃어 버릴 것 같았다. 아니면, 펑펑 울면서 활짝 웃거나.

류하는 황제 앞에서 멈췄다. 악사들이 연주를 그쳤다. 손님들도 예법에 따라 전부 조용해졌다.

황제는 조금 높은 곳에 앉아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류하가 청아한 음성으로 아뢰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류하는 우아한 동작으로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번에도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고개를 들게.”

황제는 다정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류하는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턱을 들어 황제를 마주했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사내가 검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누군가를 퍽 닮아서, 류하는 숨이 막혔다.

그 누군가는 황제의 옆자리에 있었다. 온은 계속해서 류하를 바라봤지만 류하는 결코 돌아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시선은 필연처럼 어긋났다.

“오늘 이 자리는 그대를 위한 자리야. 마음껏 즐기도록 하게.”

“황송합니다, 폐하.”

류하는 다시 고개를 꾸벅였다. 황제는 인자하게 웃으며 측면의 좌석을 향해 손짓했다.

“앉게.”

“네, 폐하.”

류하는 준비된 좌석에 앉았다. 황제, 황후, 대장군보다는 조금 낮고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높은 자리였다. 그 애매한 높이에서 류하는 최대한 차분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럼 이제 연회를 시작하겠소.”

황제가 음성을 높여 낭랑하게 말했다. 다들 공손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저 공손함 아래 진짜 충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부 각자만 알고 있겠지만.

“곧 월빈에 책봉될 월국의 류하 공주를 환영하는 바요.”

황제의 후궁은 전부 빈으로 시작했고, 황손을 낳으면 비로 승격되었다. 비빈의 봉호는 그 비빈의 성씨를 따서 지었다. 그러니 월류하는 조만간 월빈이 될 것이다.

“다들 공주에게 예를 갖추시오. 그리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세요. 오늘은 기쁜 날이니.”

‘기쁜 날이라고?’

류하는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러다 안면의 모든 근육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대장군은 어떤 생각일지 하릴없이 궁금해하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악사들은 다시 경쾌한 연주를 시작했고, 화려한 차림의 무희들이 등장해 연회장 중앙에서 공연을 펼쳤다.

공주를 포함한 모든 참석자 앞에는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향긋한 술도 있었다.

‘와, 이래서 일부러 점심을 가볍게 먹인 거구나?’

눈앞의 상차림을 훑어보던 류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연회 때문에 식사량을 조금 줄였다고 궁인들이 미리 말했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류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한 긴장과 대장군을 둘러싼 고통도 잠시 잊고 일단 음식을 즐기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류하는 고개를 들고 눈앞의 사람들을 살폈다. 총 여섯 명의 여인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류하 공주,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황제가 말한 공주에게 예를 갖추라는 말은 차례로 공주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라는 뜻이었다.

음식을 먹으려다 방해받은 류하는 순간 울컥했지만, 짜증 섞인 속내를 능숙하게 감추고 빙긋 웃으며 여인들을 마주했다.

“네, 물론이죠. 찾아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류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여섯 명의 여인들도 차례로 꾸벅였다. 그들의 선두에 선 순한 눈매의 여인이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스스로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해비 훤아예요. 2황녀 연의 어머니죠.”

“해비마마를 뵙습니다.”

해비 훤아, 후궁 중에는 유일하게 황손을 출산한 자였다. 딸 휘연은 올해 두 살.

류하는 그녀의 상냥한 말투와 순박한 눈빛을 마음에 새기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는 성빈 수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훤아 바로 뒤에 있던 여인이 말했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으나, 여인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음침하다고나 해야 할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후 나머지 여인들이 차례로 인사했고, 류하는 그들과 방싯방싯 마주 웃으며 머릿속에 그들에 대한 첫인상을 정리했다.

해비는 한없이 선량한 분위기였고, 성빈은 계속 보다 보니 무뚝뚝하다거나 음침하다기보다는 시큰둥한 느낌이었다. 네가 누구고 어디서 뭐 하던 사람인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라는 표정.

나머지 넷은 둘씩 갈렸다.

두 명은 류하를 호의 어린 호기심으로 대했고, 나머지 둘은 류하에게 이미 익숙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어디 미개한 이방 공주가 귀한 황실에 난입했냐는 듯한 눈빛.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