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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30)화 (30/123)

30화

내가 원래 이렇게 얄팍한 사람이었나. 고작 몇 번의 대화, 몇 차례의 맞닿음, 몇 날의 교차한 시선 때문에 이렇게까지 아파하는 사람이었나.

첫인상은 최악이었던 당돌한 공주.

너울 뒤에 감춘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웠던 공주.

멀쩡한 듯하다가 돌연 가냘픈 울음을 터트리던 당혹스러운 공주.

얼굴도 모르는 사내와 혼인하기 위해 먼 타지로 끌려온 가여운 공주.

온천수에 젖은 늘씬한 몸에 뽀얗게 감겨 있던 얇디얇은 내의.

아마도 퍽 처참했을 악몽과, 곧 뒤따른 애처로운 훌쩍임. 그때는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어.

겁도 없이 직접 검을 쥐고 시체를 베려 했던 황당한 공주. 심지어 검 잡는 자세도 엄청 어설펐는데.

뒤를 좀 보라고 꽥꽥 비명을 질러댈 때는 고막이 어찌나 아프던지. 덕분에 살긴 했지만.

신비하고 새파랗게 빛나던 눈. 당신이 각혈하며 쓰러질 때, 세상도 같이 무너진 듯 무서웠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

<부디 용서하세요.>

공주마마. 나는 당신을 용서할 자격조차 없어요.

“앞으로 아우님이 변방에 나다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수도에서 편히 쉬면서 혼인에 대해 고민해 보세요. 그간 못 놀았던 것도 좀 노시고요.”

륜의 나긋한 음성이 온의 상념을 파고들었다. 온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변방에 나다닐 일이 없을 거라는 그 말이 온을 놀라게 했다.

“이제 슬슬 전쟁도 정리해야죠.”

여태 온이 국경 부근을 전전했던 이유는 나날이 팽창하는 제국에서 그곳이 늘 전쟁터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갈 일이 없어질 거라는 말은 애초에 나갈 전쟁터가 없어질 거라는 뜻이고, 그 뜻은 곧, 종전이었다.

“이쯤이면 됐습니다.”

륜은 혼잣말처럼 부드럽게 속삭인 뒤, 잔을 채우고 술을 마셨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온은 되묻지 않았다. 대신 본인도 술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나저나, 아우님. 내가 아우님의 의견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월국의 공주 말입니다.”

온은 하마터면 술을 쏟을 뻔했다. 그는 침착하게, 참 침착하게 술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5년 전부터 표정 관리가 매우 능숙해져서 다행이었다.

“주술을 배운 적이 없는데 주술을 썼다고 했죠. 짐작 가는 점이라도 있습니까?”

다행이다. 다행인가? 온은 속이 너무 떨려서 똑바로 생각하는 게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황제가 차갑게 웃으며 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 감히 네놈이 짐의 여인을 탐냈느냐고 윽박지를 것 같았다. 정말로 날붙이가 목을 누르는 듯한 망상마저 들었다.

“당시 마마의 눈이 파랗게 변했습니다. 도깨비 혼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도깨비?”

온은 침착하게 아뢰었고, 륜은 눈살을 찌푸렸다. 온은 제대로 호흡하는 데 집중했다. 륜은 골똘한 표정으로 술잔을 만지작댔다.

“요즘 이종족 혼혈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대전쟁 전에나 흔했던 일이지요.”

“그래서 더더욱 알려지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공주마마 본인도 모르시는 눈치였습니다.”

“흐음.”

륜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무엇을 그리 깊이 생각하시느냐고 온은 묻지 않았다.

더는 황태자도 아닌 일개 대장군인 그에게, 감히 이 나라의 지존이 어떤 것을 생각하는지 궁금해할 자격은 없었다.

황궁에 도착하면서 그의 역할은 끝났다.

그에게 내린 황명은 월국의 공주를 황궁으로 무사히 데려오는 거였고,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나자 더는 할 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다시 내 분수를 알고 눈과 귀를 닫아야지.

공주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고, 사술에 관해 고민하지도 말자.

앞으로 더는 전쟁도 없을 예정이라니, 장수의 역할도 조만간 끝날 것이다. 이제 그는 정말로 무력한 황족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군요.”

륜이 문득 말했다. 그의 태도는 여전히 다정했다.

“남은 술을 다 마시고, 돌아가서 쉬세요.”

륜은 남은 술을 동생과 자신의 잔에 미련 없이 부었다.

“드세요.”

온은 순순히 잔을 기울여 술을 삼켰다. 뜨거운 느낌은 조금 덜했다. 살짝 취했나 보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아우님.”

륜은 눈매를 쌩긋 접으며 인사했다. 온은 자신과 닮으면서도 닮지 않은 저 얼굴을 묵묵히 보다가, 공손히 답했다.

“환영 감사합니다, 폐하.”

집이자 진창으로 돌아왔다.

온 대장군은, 또는 온 황자는 5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마 죽어서나 잊히겠지.

처소에 웅크려 덜덜 떨던 열일곱 살 소년을 그의 이복형, 즉 그날 새로 황제가 된 사내의 부하들이 손수 끌어냈다.

아니, 끌어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새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온을 정중하게 모셨다.

온은 그들의 손에 들린 피 묻은 검을 보고 잠자코 순복했다.

새 황제의 부하들은 황제의 이복동생을 대전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온은 바닥에 다소곳이 놓인 둥근 형체를 발견했다. 부친의 머리였다.

“왔습니까, 아우님?”

그리고 대전의 용상에 편안하게 앉아 몸과 검에 피를 두르고 얼굴에 우아한 미소를 그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복형이 있었다.

“인사드리세요. 우리의 아비 되시는 분입니다.”

온은 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보다 다섯 살 위인 형에 대한 극심한 공포는 오히려 온을 침착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해탈한 듯, 아무 감정도 표정도 없이 륜을 덤덤하게 응시할 수 있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내가 죽였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우님이 이 제국의 주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온은 공식적으로 황태자였다. 온은 선황의 유일한 적자였고, 다른 황자들은 전부 후궁 소생이었다.

아무도 황녀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직 사내에게만 권좌를 허락한 세상이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우님.”

륜이 낭랑하게 물었다. 그때 그의 눈은 묘하게 평온했고, 심지어 안타까운 기색을 품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고 애달파서 미칠 지경이라는 기색이었다. 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보위를 이어받으세요. 그리고 바로 내게 양위하시죠. 그렇게 하신다면 태후마마와 아우님의 목숨은 지켜 드리겠습니다. 이건 약속이에요.”

태후마마? 온은 더디게 이해하고 창백하게 질렸다. 부친이 죽었으니 이제 그의 모친은 황후가 아닌 태후였다.

륜은 온의 친모를 손아귀에 쥐고 우아하게 협박했다.

“아우님. 나는 그대와 나의 우애를 시험대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륜은 나긋하게 타일렀다. 온은 서서히 덜덜 떨었다. 이제는 무섭다기보다 서러워서 명치끝이 욱신댔다.

“나는 아우님을 존중하고 신뢰합니다. 아우님은 늘 나를 지키고자 하셨죠. 아우님의 마음 좁은 어미가 나를 죽이려고 지겹도록 자객을 보낼 때마다 아우님은 근심했고, 괴로워했어요. 나도 그걸 알아요. 나는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저 모두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랐을 뿐인데.

폐하의 적자인 나도, 장자인 형님도 전부 행복하길 바랐어. 내 모친이 나와 피를 나눈 형제를 경계할 때, 나 혼자 동화적인 소망에 붙잡혀 있었어.

“아우님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륜은 진심으로 고백했다. 그는 계속해서 웃는 낯으로 이복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빙그레 접힌 눈꼬리가 처절했다. 그는 절규하듯 타일렀다.

“내 주군이 되려 하지 말고, 내 충신이 되세요. 그럼 평생의 부귀영화를 보장합니다.”

온은 제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권좌를 절박하게 탐낸 적도 없었고, 어머니를 지키고 싶었다. 또한, 본인이 살고 싶었다.

“……제국의 새로운 주인께 충성합니다.”

온은 탁하게 쉬어 버린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짰다. 부친의 피로 끈적해진 바닥 위에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저의 모든 것이 폐하께 속하나이다.”

그는 제게 한때 자상했던 형을 도저히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어서, 비통한 마음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아우님.”

륜은 부드럽게 치하했다. 그는 계속 입술로만 웃었다. 눈빛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살기 위해 살생을 저지른 자의 표정은 절대 예전과 같아질 수 없었다.

“성군이 되겠습니다. 약속하지요.”

새 황제가 엄숙하게 덧붙였다. 바닥을 보며 두려워하는 아우에게 그는 조곤조곤 설명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과 국경 밖의 미개한 민족은 나를 폭군이라 칭할 겁니다. 황실의 평안과 제국의 부흥을 위해 나는 그런 벌레 같은 것들이야 주저 없이 짓밟을 테니까요.”

아아, 형님. 아니에요. 그건 성군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의 검을 흠뻑 적신 우리 아버지의 피는, 벌써 파멸을 얘기하고 있어요.

“내가 벌이는 모든 숙청이, 또 이끄는 모든 정벌이 전부 이 나라와 황실의 무구한 영광을 위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약속합니다, 아우님.”

아니에요, 형님.

온은 속으로만 안타깝게 반박했다. 그러나 겉으로 그는, 온전한 체념만을 드러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그때부터 온 황자는, 한때 차기 황제였던 그는, 살육으로 옥좌를 차지한 이복형의 가장 믿음직한 충견이 되었다.

황궁에서의 첫 밤, 류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낯선 곳이라서. 누군가가 그리워서. 그리워하는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제하를 비롯한 월국의 궁인들이 자신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고향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눈물겹게 반가웠다.

한평생 별궁에 처박혀 살 때는 매일 같은 궁궐에 있으면서도 서로 무심하게 지나치던 사람들이, 생경한 이국의 황궁에 옹기종기 던져지자 서로 단짝이라도 되는 듯 기꺼웠다.

제하는 공주의 이부자리를 정돈하며 북쪽은 너무 춥다고 작게 구시렁댔고, 류하는 절대 제국 궁녀들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불평하지 말라고 침착하게 타일렀다.

제하는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겸허히 받아들였다. 아직 어려서 철이 없긴 했지만, 제하도 기본적인 상식은 있었다.

제하가 월국의 구석진 별궁에서 일할 때야 그녀가 뭐라 떠들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이방인이자 월국의 대표인 공주님을 모시는 이였으니, 모든 행동이 훨씬 조심스러워야 마땅했다.

어쨌든, 류하는 그나마 친숙한 이들의 시중을 받으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류하는 한참을 뒤척였다. 그러다 마침내 알 수 없는 꿈속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류하는 휘국식의 반찬이 차려진 조반을 들고 휘국 궁녀들과 월국 궁녀들의 시중을 받아 목욕을 했다. 뭐, 월국 궁녀들도 곧 휘국 궁녀들이 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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