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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29)화 (29/123)

29화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정치판이나 전쟁터에서 그렇게 굴면 망하는 겁니다, 아우님. 그대가 신입니까? 아니면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낙원에 살고 있나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오만하게 굴었습니까?”

륜은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 어쩌면 안쓰럽다는 듯,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바라보았다.

참 착하고 강한 내 동생. 그래서 더욱 똑똑히 알려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두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아우님. 우리 둘만 해도 그랬지요. 내가 살면 그대가 죽고 그대가 죽으면 내가 사는 상황이었습니다. 황실 암투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대를 전쟁터에 보냈습니다. 제발 좀 깨닫고 오시라고요.”

이번에는 온이 자신과 형의 술잔에 음료를 따랐다. 륜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 온도 순식간에 다시 잔을 비웠다. 갑갑하고 심란해서, 그렇게라도 해야 버틸 것 같았다.

“제가 살면 폐하가 죽고 폐하가 살면 제가 죽는 상황이었는데, 왜 저를 살리셨습니까?”

잔을 탁, 내려놓으며 온이 뚝뚝하게 물었다.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어서 시선은 비스듬히 내렸다. 애초에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내가 그때도 말했잖아요. 나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고.”

륜은 생긋 웃으며 나직이 상기시켰다. 형제는 동시에 같은 때를 떠올렸다.

5년 전, 아버지를 베고 난 뒤 동생을 내려다보며 형은 정중히 고백했었다. 나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며, 아우님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그대를 살려 써먹음으로써 은혜도 갚고 여러 차례 승리도 거두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그대는 꽤 명장이잖아요. 가는 족족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륜은 동생이 살아 줘서 고마웠다. 온은 충직한 장기짝이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피붙이였다.

사실, 5년 전에 패륜을 저지르고 나서 륜은 조금 지쳐 있었다.

내 손에 너무 많은 피가 묻었으니, 동생을 살려 둔다면 조금이나마 속죄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여겼었다.

“지난 5년간 그렇게 전장을 구르며 고생하고도 역심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아우님의 충정을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아우님이 내게 복종해 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대가 제게 저항했다면, 그대를 죽여야 했을 테니까요.”

모두를 지키려 했던 강하고 선한 내 동생. 륜은 자신이 그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아군을 지키기 위해 적군을 죽이고, 효율적인 승리를 위해 인륜조차 희생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만약 온이 딴마음을 품었다면, 륜은 슬퍼하며 동생을 베었으리라.

그럴 필요가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내게 쭉 충성해 주세요, 아우님.”

륜은 온을 똑바로 보며 간곡하게 타일렀다. 온은 차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와 내가 계속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온은 형의 진심을 의심할 수 없었다. 설령 의심했더라도, 어차피 아까 말한 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륜은 황제였고, 온은 어머니를 인질로 잡힌 상태였다. 동생은 형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황송합니다, 폐하.”

온은 형식적인 대답을 읊조렸다. 일단은 만족했는지, 륜은 더는 동생을 다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아우님. 조만간 아우님의 혼처를 물색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푸읍!”

륜은 상냥하게 화제를 돌렸고, 곧장 당황했다. 드디어 시선을 돌리며 잔을 입으로 가져간 온이 술을 덜컥 내뿜은 탓이었다.

“아우님, 괜찮습니까?”

“푸읍, 쿨럭, 켁! 괜찮습니다, 폐하. 쿨럭! 송구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감히 황제의 면전에 대고 침과 술을 뿌려댔으니, 엄청난 무례이긴 했다. 그러나 륜은 격분하는 대신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생을 걱정스레 살폈다.

“아우님, 혼인 생각이 그렇게 쑥스럽습니까? 나이를 스물둘이나 먹고 그래요? 얼굴이 빨갛습니다.”

“쑥스럽다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뭐요?”

“어찌 제가 감히 혼인을……. 폐하, 저는 후사를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이대로 폐하께 충성하는 걸로 만족합니다.”

온은 뒤죽박죽 말을 뱉었다. 혼사, 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른 사람이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그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후사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혼인하라고? 가정을 꾸리라고? 그러다 만약 내가 아들을 낳으면? 폐하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황족인 내가 떡하니 후계자가 생기면 어떡할 건데?

이미 황후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의 다른 측근들이 자신을 눈엣가시로 생각한다는 것도.

이유는 전부 같았다. 온은 륜을 빼면 선황의 유일한 아들이었고, 그런즉 륜에게 아들이 없는 지금 제위 계승자 1순위였으니.

그나마 륜은 아직 젊고 아내가 총 일곱 명, 이제는 여덟 명이나 되었으니 그가 곧 후사를 보리라고 신하들은 희망했다.

전부 딸이긴 했지만 자식을 이미 둘이나 두셨으니, 생식 능력에는 문제가 없음이 증명됐고.

그런데 이대로 시간이 흘러 륜은 계속해서 아들이 없고, 온의 아내가 황손을 낳으면 어찌 될까.

“내가 말했잖아요, 아우님. 나는 아우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륜은 나직하게 타일렀다. 온은 굳은 낯으로 형의 시선을 피했다.

당신이 나를 의심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측근들이 나를 의심하니 어차피 결과는 같다고, 감히 아뢰지 않았다.

“폐하께서 황자 아기씨를 보시고 나면, 그 뒤에 혼인하겠습니다.”

온은 단호하게 간청했다. 황제께서 후계자를 얻으신다면 내가 혼인하여 아들을 한 명을 보든 백 명을 보든, 황태제 책봉을 운운하며 내게 접근하는 이들은 없겠지.

혼인. 혼인이라.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 외에도, 그 단어가 거듭 거슬리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온은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분을 떠올리며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하필 그 밤의 그 고백이 떠오르다니.

<언젠가 그대의 아내 될 사람이 부럽습니다.>

아아, 나는 천하의 바보로구나. 함께한 시간이 고작 달포에 불과한데, 심지어 그중 많은 시간을 침묵으로 허비했는데, 이토록 속절없이 꿰뚫리다니.

<용서하세요.>

아니요, 공주마마.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당신의 눈물을 보고 안쓰럽다 여기고, 당신의 얼굴을 보고 불경한 마음을 품으며, 당신의 고백을 듣고 마음이 내려앉은 어리석은 자는 저니까요.

닿지도 못할 이의 마음에 담겨 당신을 괴롭게 하고, 절대 거역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마음으로 죄지었습니다.

나는 내 형수님이 될 당신의 마음을 감히 흔들고 내가 마땅히 충성해야 할 황제 폐하께 무엄한 자가 되었으니, 그저 나의 고통으로 속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뭐, 아우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미룰 수야 있어요. 서두를 이유는 없으니까요.”

한편, 륜은 순순히 타협했다. 사실 스물두 살이면 딱 제국의 평균적인 혼기이긴 했지만, 한두 해쯤 미룬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온의 말마따나, 자신의 아내가 황자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나의 아내. 내게는 무려 일곱, 아니, 이제 곧 여덟 명인데, 그중 누가 내 후계를 낳는 역할을 맡게 될까.

누구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때로는 조급하기도 했다. 아니, 사실 그건 거짓이었다. 매우, 매우, 상관있었다.

부디 화은이 제 아들을 낳았으면 했다. 제 후계가 자신과 같이 서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게 륜의 솔직한 소망이었다.

후사를 위해 의무적으로 여인들과 동침하며, 하루빨리 화은이 아들을 낳아 이 지긋지긋한 행위도 끝났으면 했다.

몇 년 전 화은이 회임하고 마침내 딸을 낳았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실망했었다.

“천천히 찾아보십시오. 아우님은 억지로 마음에도 맞지 않는 여인과 정략적 이유로 혼인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여인을 찾았으면 해요.”

륜은 인자하게 타일렀다. 온은 륜의 권고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과 우회적인 경고를 동시에 읽어 냈다.

황제가 된 륜이 후궁을 고를 때, 양측의 마음은 별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륜은 이미 연모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제게 정치적으로 이로운 집안의 여식들을 골랐고, 그 여식들은 팔려 가듯 시집와야 했다.

동생이 그런 불행한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너는 이제 황태자가 아니잖아? 황제도 아니고.

굳이 권세가의 여식을 골라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억지로 혼인할 필요 없어. 어차피 너는 그러면 안 되잖아.

참한 여인을 만나 소박하게 연애하게 조용한 혼례를 치르렴. 그게 모두를 위한 최선이란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온은 륜의 권고 및 경고를 알아듣고 담담히 대답했다.

륜은 동생의 자유를 빌어 주는 듯했지만, 사실 자신이 혼인 상대를 고르는 데 있어 몹시 부자유함을 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힘 있는 가문과 혼약으로 맺어지려는 듯한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보였다가는,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와 두 분의 모든 측근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나한테 딸을 시집보내겠다는 사람이 있을지나 의문이군.’

온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나처럼 정치적으로 굉장히 예민한 위치에 있는 사위를 들일 정도로 배짱 좋은 귀족이 이 나라에 있으려나?

차라리 모든 논란을 피하려면 파격적으로 평민 여인과 혼인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또 다른 차원의 논란거리임을 온은 잘 알았다.

온은 황제 측의 견제를 피하려면 적당히 권력이 없어야 했지만, 동시에 너무 품위를 잃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황족이었다. 그리고 황족과 귀족처럼 체면치레에 집착하는 부류도 없었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그는 지켜야 할 최소한의 ‘수준’이 있었고, 평민 여인과의 혼약은 분명 그 수준 이하의 일이었다.

‘하하, 그냥 평생 총각으로 살다 죽는 게 낫겠네.’

온은 내적으로 자조했다. 이 어리석은 마음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차라리 그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 짧디짧은 시간에 친형의 여덟 번째 아내에게 마음을 뺏겨 버린 멍청한 사내는 나중에 멀쩡한 가정을 꾸릴 자격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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