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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28)화 (28/123)

28화

“그럼 이제 그대도 물러가도록 해. 지쳤으니, 쉬어야지.”

“네, 폐하.”

온은 황제와 황후에게 차례로 묵례한 뒤 알현실을 떠났다. 단둘이 남겨지는 즉시, 화은이 륜을 돌아봤다.

“그래서, 보시자마자 감탄사가 나올 만큼 그리도 절색이었습니까?”

<절색이군.>

그 부드러운 한마디. 그 한마디가 화은의 심장에는 비수처럼 꽂혔다. 황제를 보는 황후의 눈빛이 포악했다. 아니, 포악하기보다는 처절했다.

“하긴, 제가 어찌 폐하를 탓하겠습니까. 폐하가 눈이 있듯 저도 눈이 있는걸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하더이다. 게다가 아직 나이가 스물이라더니, 싱그럽더군요.”

화은은 륜을 빤히 보며 또박또박 씹어뱉었다. 시선으로, 또한 말투로 원망하며.

그 어여쁜 공주를 보고 당신은 당신의 솔직한 감상을 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한다고, 적어도 내 앞에서는 뱉지 말았어야 한다고, 그렇게 비난했다.

“황후. 어찌 그리 화를 냅니까.”

륜이 부드럽게 중얼댔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황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당기는 힘에 간격이 좁아졌다. 상체가 맞닿았고, 곧 입술이 포개졌다.

“방금 그대가 내게 한 말을 다른 이가 똑같이 되풀이했다간 당장 불경죄로 목이 날아갈 겁니다. 하지만 그대는 멀쩡하죠. 그대도 그대가 멀쩡하리라는 걸 미리 알았고요. 아닌가요?”

뜨거운 입맞춤, 느직한 속삭임. 숨결이 뺨을 간질이며 견고한 품이 몸을 덮었다.

속절없이 사로잡힌 화은은 륜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도저히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황제인 내게 존대를 듣는 이도 궁의 늙은이들을 제외하면 그대 하나뿐이고, 벌건 대낮에 내가 품위를 잊고 이토록 이리 나오게 만드는 이도 그대 하나뿐입니다. 그걸로도 모자라나요?”

이제는 륜이 원망하는 어투였다. 그러나 턱을 부드럽게 싸쥐는 손과 입술 틈으로 밀고 들어가는 말캉한 혀는 원망과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애원, 속죄, 욕망, 이런 것들이 걸맞았다.

“황후.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해할 건가요?”

륜은 잔뜩 덥게 속삭였다. 화은은 지아비의 품에 갇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위로 올라가 륜의 뺨을 더듬다가 목을 그러당기며 그를 제게 더욱 밀착시켰다.

겹겹의 비단옷 아래 단단한 형체와 응축된 열기가 느껴졌다. 화은이 눈을 가라떴다.

“그래요, 정녕 품위를 잊으셨군요.”

화은은 느리게 중얼대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지긋한 자극이 느껴지자 륜은 헛숨을 삼켰다.

화은은 쓴웃음을 그리며 말랑한 가슴을 붙였다. 남편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당신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제게 어떤 약조를 하셨는지.”

화은은 말의 마디마디를 짓씹듯이 아뢰었다. 부부의 뒤엉킨 시선은 피차 비슷한 농도로 혼탁했다. 그러나 각자에 스민 감정은 서로 사뭇 달랐다.

“저 하나만 연모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 하나만 마음에 담겠다고 하셨어요. 그 약조 하나만 믿고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시겠나요?”

아내는 너무 간절했고, 남편은 너무 답답했다. 자기 하나만 연모해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사내는 조금의 꾸밈도 없이 허탈하게 고백했다.

“황후, 나는 그대 말고 다른 이를 마음에 담아 본 적이 없어요.”

황후의 얼굴에 냉소가 만개했다. 그토록 서글피 웃으며, 화은은 륜은 밀어냈다.

“연정도 없이 그토록 많은 여인과 몸을 섞으셨다니, 듣는 제가 다 억장이 무너집니다.”

진심이기도 했고, 비꼬는 말이기도 했다. 륜은 언제 그리 뜨겁게 다가왔냐는 듯 새침하게 멀어지는 아내를 빤히 보다가, 딱딱하게 요구했다.

“어서 아들을 낳으세요.”

화은은 이를 악물었다. 그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륜도 이를 모르고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 내가 동물처럼 후궁들과 돌아가며 합방할 이유도 없어질 테니.”

정치적 동맹뿐 아니라 후계가 필요해서 여태 여섯 명이나 후궁을 들였다.

이제 무려 일곱 번째 후궁을 간택한 지금, 아직도 황제는 딸만 둘이었다.

“아들은 제가 어떻게든 낳겠습니다. 낳겠으니, 그 전에 폐하께서는 대장군이나 좀 어떻게 해결해 주십시오.”

황후가 쉭쉭거렸다. 그러자 황제의 눈빛이 처음으로 위험해졌다.

“쉬이, 황후.”

륜이 화은의 입술에 검지를 얹었다. 그 접촉은 아까처럼 후끈하지 않고, 서늘했다.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륜은 의복을 정돈하며 본인도 조금 물러섰다. 부부 사이에 다시 거리가 벌어졌다. 화은은 이제 쓴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황제의 일곱 번째 후궁이 황궁에 당도한 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

온은 명령대로 일과 후에 대전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궁녀가 대장군의 등장을 알리자 안에서 입장을 승낙하는 황제의 음성이 들렸다. 온은 안으로 들어갔다.

“아우님. 오셨습니까?”

온은 륜이 왜 아직도 단둘이 있을 때는 제게 고집스레 존대하는지 알지 못했다. 물어본 적은 없었고, 가설은 두어 가지 있었다. 하지만 가설은 어쨌든 가설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형제끼리 회포나 풀까 하여 가장 좋은 술로 준비했습니다.”

황제의 정복이 아닌 간단한 평복 차림의 륜은 편안하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온은 낯설어하지 않고 륜의 맞은편에 앉았다.

온은 공손하게 무표정했고, 륜은 옅게 웃는 낯이었다.

“역시 내가 먼저 마셔 봐야겠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

“왜요, 아우님,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아우님 술에 뭘 탔을지 어찌 알고?”

“폐하께서 그러시지 않으셨다는 걸 압니다.”

“그래도 의심은 한 번쯤 해 보는 게 좋습니다, 아우님.”

“의심해 봤자 피할 수도 없는데 뭐 하러 의심합니까?”

온은 나직하게 반문했다. 빈정거림보다는 진심이 더 컸다.

형님이 드디어 자신을 죽이겠다고 맘먹는 순간, 어차피 온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부디 어머니는 끝까지 무사하길 바라며 순순히 독을 삼키는 수밖에.

륜의 미소가 짙어졌다. 온은 자신들의 아비를 쏙 빼닮은 이복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렇게 닮은 얼굴로 아버지를 죽였다. 그날, 바닥에 피가 흥건했어.

아니다. 아니지. 형님은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니구나. 나를 닮았어. 내가 형님을 닮았어. 온은 시선을 내렸다.

“내가 이래서 아우님을 아낍니다. 예리한데, 묘하게 둔하니까요. 영리한데 우직해서.”

륜은 부드럽게 말하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맑은 곡주가 값비싼 도자기에 담겼다.

온은 잔을 집었다. 이 술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자신을 처단하고자 했다면 이것보다 훨씬 공개적인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온 대장군이 역모를 꾸며 목숨을 잃는 거라고, 그러니 누구도 감히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고 에둘러 공표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으면 태후마마를 빼돌려 도주하거나 나를 치고 황제가 될 생각을 해야지, 왜 여기 가만히 앉아서 그걸 다 받아 마십니까?”

총명한 나의 아우님.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도 빨랐고, 그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떠올리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러나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집요함, 타인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을 지키겠다는 악독함, 정공법이 없다면 속임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겠다는 교활함, 그런 것들이 부족했다.

“아우님. 내가 왜 보위를 이어받은 뒤에 그대를 장수로 임명했는지 아십니까? 어째서 그대를 전쟁터로 내몰았는지 아시나요?”

글쎄. 내가 전장에서 죽길 바라서? 그런데 그럴 거면 그냥 죽이면 됐을 텐데.

나를 제거하면서 겸사겸사 적군 몇몇은 덤으로 처리하고 싶었나? 하지만 그것도 쓸데없이 번거로운 방식이었다.

“아우님이 너무 물러서요. 그대에게 좀 더 단단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대가 더 강해지기를 바랐어요.”

온은 술잔을 움켜쥔 채 륜을 쳐다보았다. 륜은 본인의 잔을 기울여 단숨에 비웠다. 그가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전쟁의 본질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아군을 살리기 위해 적군을 벱니다. 효율적인 승리를 위해 인명을 숫자로 계산합니다. 최대한 다수를 지키려면 때로는 소수를 희생해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륜은 다섯 살 아래의 동생을 빤히 보며 인자하게 말을 이었다. 온은 내내 침묵을 택했다. 마땅한 반응을 찾는 게 어려웠다.

“아우님은 그걸 참 못했습니다. 저 애가 황제가 되면 황실이 개판이 되진 않을까, 제국이 망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성품이 온화해서 모두를 챙기려 들고, 그렇다고 우유부단한 것도 아니었어요. 차라리 그런 쪽으로도 물렀다면 나았을 뻔했네요. 그런데 아우님은 하필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완강했죠.”

황자들이 어릴 적, 황태자궁에서 귀한 패물이 사라진 적 있었다.

사람들은 특정 궁인 몇몇을 의심했고 황태자 온에게 수사를 청했지만, 황태자는 신중하여 성급한 행동을 경계했고 온후하여 아랫사람을 의심하는 것도 싫어했다.

결국 황태자는 궁인들을 문초하는 대신 수도에서 귀금속을 다루는 여러 가게와 전당포를 조사하여 장물로 넘겨진 궁의 패물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범인으로 지목당한 궁인들은 무고했다. 진짜 도둑이 붙잡혔고, 결국 죄 없이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에 대한 태도도 똑같았습니다. 선황 치하에 내가 누명을 쓰고 죽을 뻔한 적이 대체 몇 번입니까? 나중에는 세는 것도 잊었네요. 다 내가 아우님께 위협이 될까 봐 태후께서 친히 준비한 덫이었지요. 그때마다 날 가장 적극적으로 변호한 이가 아우님이었습니다. 퍽 우습지요. 기억하나요?”

기억했다. 결백한 이의 위기를 방관할 수 없어서, 차마 피붙이를 내치지 못해서, 온은 이복형을 지켰다.

다른 이복형제와 이복누이에게도 다정했던 그는 부황의 장자로서 제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나도 무르고, 너무나도 강한 성품이었다.

“그때 아우님이 태후의 뜻에 따라 나약하게 눈감았거나 태후와 함께 적극적으로 나를 도려내고자 했다면, 나는 죽었겠지요. 몇 번이고 그대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래서 참 고마웠고, 황당했습니다. 아우님의 그 어이없는 성품이.”

온은 참다못해 고개를 젖혀 술을 마셨다. 술이 목구멍을 긁을 때마다 뜨거운 느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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