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27)화 (27/123)

27화

‘빼앗기긴 뭘 빼앗겨.’

륜은 마치 자신이 월국의 진귀한 보물을 빼돌린 것처럼 말했는데, 류하는 그게 참 거슬렸다.

내가 보물이야? 물건이냐? 월국의 귀족이든 휘국의 황제든, 멋대로 탈취할 대상이 아니었다.

“황송합니다, 폐하.”

구구절절 길게 말했다가는 트집 잡힐 거리가 늘어날까 봐 류하는 최대한 간결한 답변을 택했다.

어차피 류하는 오늘 갓 황궁에 도착한 애송이 후궁이었고 상대방은 높으신 황제 폐하니, 괜히 수다스럽게 굴면 무례하게 보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대의 유일한 특별함이 미색은 아닐 텐데.”

륜은 나긋하게 말을 이었고, 류하의 긴장은 이제 색채를 조금 달리했다. 왜 황제가 대장군을 이 자리에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도술을 부렸다며?”

그래. 그냥 예쁘기만 한 계집이라면 인형처럼 후궁전에 처박아 뒀겠지만, 그 계집이 주술사이기도 하다면 그렇게 가볍게 대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대가 여기 오기 전에 대장군의 증언을 들었어.”

그렇구나. 저자는 증인이었어. 현장에 있던 자로서, 황제와 함께 나를 검증하러 이 자리에 나온 거야.

여기까지 깨닫자 류하는 안도했다. 황제가 나와 대장군의 관계를 의심하는 건 아니구나.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딱히 의심할 것도 없지. 나와 대장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건 아니잖아. 나 혼자 바보처럼 좋아하고, 더더욱 바보처럼 고백한 거지.

생각이 다시 온을 향하자 류하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러나 황제 내외와 대면한 자리에서 우울한 상념에나 빠져 있을 수는 없으니,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고 긴장을 되찾았다.

“지진을 일으키고 불꽃을 피운다라. 그냥 듣기만 해도 놀라운 재주일세. 만약 직접 목격했다면 더 놀라웠겠지?”

그래서? 그래서, 원하는 대답이 뭐야. 류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바르쥐며 잠자코 머뭇댔다. 그녀는 무어라 반응할지 몰라 일단 고개만 숙였다.

“그런 힘은 어디서 배웠나? 월국 왕실에서 왕족에게 주술을 가르친다고 들은 적은 없는데.”

륜은 여전히 온화하게 웃는 낯이었으나, 류하는 시선을 내리고 있었기에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설령 확인했더라도, 더욱 소름만 돋았으리라.

‘자칫하다간 월국 전체가 트집 잡히게 생겼어.’

현재 월국을 비롯한 대륙의 무수한 나라들이 강대국인 휘국에 충성을 맹세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왕실이 몰래 주술사를 양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충분히 반역죄로 몰릴 수 있었다.

“……주술을 따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구중궁궐에서 자란 제가 뭐 하러 그런 것을 배웠겠습니까? 다만 언제부턴가 제게 이런 힘이 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 어머니와 부왕께서 함구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전까지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래,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자. 어설픈 거짓을 꾸며 화를 부르느니 담백한 고해가 오히려 유리했다.

“그럼 월국의 왕도 그대의 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륜은 사근사근한 어투로 계속 질문했고, 온은 류하 본인만큼이나 긴장했다. 그건 걱정이었다. 공주와 공주의 고국을 위한 걱정.

예비 형수를 위해 이렇게나 근심하는 자기 자신이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릴 적에 제가 힘을 쓰는 것을 한 번 보신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어렸고, 궁궐에서 편히 자라며 위험한 일을 겪지도 않았지요. 그때 제가 보인 힘은 고작해야 뜰에서 꽃을 피우는 정도였습니다. 부왕께서는 이를 기괴하게 여기셨지만 위험하게 여기시진 않으셨고, 이후 제가 그분의 명에 따라 힘을 숨겼기에 더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적국의 황제 앞에서 자국의 임금을 변호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국왕 그놈을 내 아비로 생각하지도 않고, 나와 어머니를 별궁에 방치한 그놈을 미워하기까지 했는데.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악감정과 별개로, 정말 외국에 나왔더니 전에 없던 애국심이 샘솟기도 하나 보다.

월국의 왕이 공주의 위험한 힘을 알고도 이를 숨긴 채 황제에게 시집보내려 했다고 오해받는 건 싫었다. 그러다 황제를 기만했다는 이유로 침략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폐하께 미리 고하지 않아서 송구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미천한 힘인지라 굳이 아뢰지 않은 것이지, 맹세코 폐하를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저자세로 나가자. 류하는 최대한 가냘프고 간곡한 음성을 꾸몄고, 시선은 꿋꿋이 낮게 수그렸다. 륜은 그런 그녀를 집요하게 탐색했다.

“미천한 힘이라 했는가? 그대의 그 힘이 내 신하들을 구했어. 적을 무찌르고 인명을 구할 만큼 대단한 능력인데, 어찌 미천하다고 포장하지?”

“포장이 아닙니다, 폐하. 저는 정말로 제 힘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까 아뢰었듯 저는 힘을 오랫동안 숨기고 살았고, 스스로 괴이하고 부끄럽게 여겨 제대로 시험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때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박하여 힘이 발현된 겁니다.”

“마마께서 본인의 힘을 잘 모르고 계셨다는 건 사실입니다. 아까 보고드렸듯이, 마마께선 힘을 쓰신 다음에 바로 기절하셨으니까요.”

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직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와 황후는 온을 쳐다봤고, 류하는 자신의 청각을 의심하며 주먹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그랬었지. 기억하고 있다.”

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온은 정중히 고개를 꾸벅였고, 곧장 다시 조용해졌다. 류하는 그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뭐야, 저 사람은? 왜 갑자기 끼어들어?’

사실상 황제가 공주를 심문하고 있는 와중에 일개 대장군이 끼어들어 의견을 내놓다니. 심지어 공주를 변호하는 내용이었다. 류하의 혼란이 깊어졌다.

‘정말, 이상한 사람…….’

왜 네 형이자 주군인 사람을 앞두고 내 편을 드는데. 마치, 나를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럴 리가.

류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황제에게 집중했다. 지금은 흔들릴 여유가 없었다.

“그대를 꾸짖고 싶어서 캐묻는 게 아니야. 다만 워낙 놀라운 일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더 자세히 알아야 제대로 치하할 수 있으니 질문한 것뿐이네.”

거짓말. 황제가 상냥하게 타이르자, 류하는 속으로 대꾸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달려들었으면서.

류하는 문득,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궁금해진 탓이었다.

나긋한 어투와 날카로운 언어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저 위험한 사람의 낯짝을 기억에 똑똑히 새겨 두고 싶었다.

어렴풋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저렇게 익숙할까 고민하던 류하는, 깨달음 끝에 마음이 철렁했다.

형과 동생이 서로 닮아서, 그래서 익숙해 보이는 거구나.

피가 섞인 형제라도 결국 서로 남이기에 황제 휘륜과 대장군 휘온의 생김새가 온전히 같지는 않았으나, 비슷했다. 멀리서 얼핏 봤다면 순간 착각할 정도였다.

‘……동생도 미남이더니 형도 마찬가지네.’

그런 쓸데없는 감상을 끝으로, 류하는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그대의 공로를 제대로 밝히고 공개적으로 포상하지 못하는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그대가 이능을 가졌다는 사실과 오는 길에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야 해서, 그대가 상을 받아야 하는 정황 역시 숨겨야 할 것 같아.”

“황송합니다, 폐하.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럼 습격 도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명할 거지? 류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사람들도 분명 가족과 친우가 있을 텐데.

류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록 잘 알지도 못했던 자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서럽게 만들었다.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분이 그렇게 사라지셨을 때, 나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이번에 죽은 사람들로 인해, 나와 같은 슬픔을 지닌 이들이 또 생겨났구나.

“습격 도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중간에 산사태를 만나 사망한 것으로 표시할 거네. 혹시 누군가 그대에게 묻는다면, 그리 알고 대답하면 돼.”

황제는 공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매끄럽게 대답했고, 류하는 수긍했다.

그래, 차라리 전부 별수 없는 자연의 탓으로 돌리는 게 황제에겐 가장 편리하겠지.

“혹시 여기까지 오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는가? 아니면 방금 둘러보고 온 처소에서 불만족한 부분이 있다던가.”

륜은 자상하게 질문했고, 류하는 이에 대한 수많은 솔직한 답변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후궁의 모범적인 태도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황궁에 도착하기 전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니, 어찌 부족한 점이 있겠습니까?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 만약 후궁전에서 지내다가 필요한 게 생긴다면 궁녀를 시켜 황후에게 전달하게. 내명부의 일은 황후의 소관이니까.”

류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내 황제를 향했던 시선이 이제는 옆으로 옮겨갔다.

하늘에서 온 선녀 같다더니, 궁녀가 과장한 바는 없었다.

류하는 황제 또래의 아름다운 황후를 짧게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고개를 도로 숙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저를 향한 황후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이겠지. 하긴, 호의적일 이유가 어디 있겠어.

부디 나를 미워하지 마세요. 류하는 묵묵히 탄원했다.

나는 당신의 자리를 탐내지 않아. 권력도 권위도 욕심내지 않을게. 그저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힘만 있으면 돼.

아예 여기서 도망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 물러가서 쉬도록 하게. 내일은 환영회가 있어서 더 바빠질 테니까.”

“네, 폐하.”

생각보다 일찍 보내 준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류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주를 처소로 모셔라.”

“네, 폐하.”

어느덧 소환된 후궁전의 궁녀들이 다시 공주를 모시고 퇴장했다. 방 안에는 황제, 황후, 대장군만 남았다.

“대장군, 오늘 저녁에 일과를 마치면 내 집무실로 와. 그대와 나눌 얘기가 있어.”

“네, 폐하.”

온은 공손히 대꾸했다. 그의 눈에는 표정이 없었다. 황후는 으레 그러듯 냉랭한 얼굴로 시동생을 외면했다. 이에 대해 황제도, 대장군도 아무런 지적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