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재수 없어.’
그래, 너희의 풍요와 심미는 가히 동경할 만하지. 그러나 그 풍요와 심미를 가능케 만들었던 전쟁과 착취는 동경의 대상과 거리가 멀었다.
그 전쟁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 온 약소국의 공주는 싸늘한 혐오를 열심히 감췄다.
혹시, 부왕이 나를 후궁으로 넘긴 게 이런 효과를 바라고 그런 건 아니었을까? 애국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나를 월국의 절절한 충신으로 키워내고 싶었던 거지.
이방인의 신분으로 황궁에 들어서자, 없던 향수도 생겨 철철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공주마마, 이제 나오십시오. 환복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나마 현재 류하를 모시는 자들은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첫날 그녀의 심기를 긁었던 이들과 달리 은근히 깎아내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자들은 그래도 훈련이 제대로 된 이들인가 보군.’
물론, 이들이 속으로는 이방인 공주를 얼마나 어떻게 업신여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류하는 어쨌든 황제의 후궁이 될 자고 외국에서 온 귀빈이니, 그런 류하를 대놓고 푸대접하는 건 궁인들 스스로 황실의 체면을 깎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잘 아는 이들인지, 궁인들의 모든 언행은 완벽하게 정중했다.
오히려 월국 별궁에 있을 때마다 더 애지중지 다뤄지는 느낌에 류하는 기분이 묘해졌다.
“이제 치장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곧 대전에서 전갈이 오면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를 뵈러 가시게 될 겁니다.”
“그래, 알겠다.”
류하는 차분하게 답하면서도 내심 긴장했다.
황제와 황후라. 여태까지는 자신이 기어코 황궁에 끌려오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정신이 팔려서 그 두 사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과의 만남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뒤늦게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공주마마께서는 참으로 미인이시군요.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맙다. 하지만 아무리 미인이여 봤자 황후 전하에 견줄 만하겠느냐? 전하께서는 내 나라에 소문이 전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라 들었는데.”
궁인이 공손히 아뢴 칭찬에 류하는 살짝 웃으며 매끄럽게 받아쳤다.
류하의 뺨에 분을 바르던 궁인이 멈칫하며 쳐다보았다. 그러다 황급히 시선을 떨구며 깍듯이 대답했다.
“네, 마마. 황후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분이시지요. 그러나 마마께서도 무척 아름다우시니, 혹여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심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난 별로 그자의 마음에 들고 싶지 않은데.’
류하는 속으로 우울하게 대꾸했다. 겉으로는 황후에 대한 담담한 칭송을 이어 갔다.
“그런 선녀 같은 분을 국모로 두었으니, 제국의 백성도 참 복이 많구나.”
“황송합니다, 마마.”
사실, 헛소리였다. 황후가 미인이라고 해서 제국의 백성이 복이 많은 건 아니지. 황후의 얼굴이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미리 제국의 궁인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굽히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후궁들이면 몰라도, 황후 앞에서는 괜히 자존심을 내세워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고작 외모에 대한 칭찬이라니, 정말 얄팍한 수단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내가 황후를 대적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궁인들이 깨닫고,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트려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의 황궁 생활이 조금은 덜 피곤할 것 같았다.
‘문제는 다른 후궁들인데.’
황후야 내명부의 주인이고 황제의 정실이니, 아예 처음부터 자신과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적으로 돌리느니 차라리 자기 자신을 유순한 아랫것으로 각인시키는 게 훨씬 나을 터.
하지만 다른 후궁들은 달랐다. 황제의 딸을 가져 비로 승격됐다는 그 후궁은 좀 논외일지 몰라도, 법적으로 자신과 완벽하게 동급인 다른 다섯 명의 후궁들.
황후와 황비에게는 굽히고 들어갈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여인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건 사양이었다.
외모가 선녀 같네 어쩌네, 그런 말로 드높이는 건 황후 하나로 충분했다.
‘일단 나를 향한 태도가 어떤지 파악하고, 방침을 짜야겠어.’
황제의 후궁들이 어떤 성향인지, 자신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인지 어떤지 류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직 얼굴도 몰랐으니 당연했다.
만약 그들이 제게 이미 새 식구로서 호감을 품고 있다면, 류하도 이에 맞춰 살가운 분위기로 편승하면 될 테고.
만약 그들이 자신을 깔보거나 경계하는 추세라면, 이에 걸맞은 전략이 필요했다.
‘내일 환영회에서 만날 테니까, 그 사람들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물론, 환영회에서 기껏해야 말 몇 마디 섞어 본다고 그 사람들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지금보다는 상황이 낫겠지.
“마마, 단장을 마쳤습니다.”
“고맙다.”
류하는 면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흠, 예쁘네. 류하는 자랑도 쑥스러움도 없이 담백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류하의 어머니를 절세미녀라 불렀고, 류하는 자신이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의심한 적 없었다.
눈앞에 이토록 뚜렷한 증거가 있는데, 어찌 의심하겠어.
예쁘다는 이유로 딱히 덕을 본 적도 없고 자기가 잘나서 이렇게 예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니, 류하는 이런 얼굴을 갖고도 여태 별로 감흥 없는 삶을 살았다.
어차피 살면서 자신의 이 훌륭한 면상을 봐줄 사람은 주변에 어머니와 궁녀들 몇몇뿐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별궁에 유폐된 천덕꾸러기 공주에게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딱 한 명, 자신의 이 얼굴에 관심을 가져 줬으면 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대는, 나를 보며 예쁘다고 생각했을까?
지금 당장 그대를 찾아 소매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어.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지.
그저 운 좋게 타고난 부질없는 겉가죽일 뿐인데, 내가 외모로 먹고살 것도 아닌 이상 쓸데없는 특징일 뿐인데, 그렇게나 궁금해. 몹시도 중요해졌어.
그대가 나를 보며 예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마마, 이제 대전으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하지만, 그대가 날 예쁘다고 여긴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지금 내가 누구의 신부가 되기 위해 이 머나먼 땅까지 왔는지 잊을 수는 없겠지.
류하는 고운 얼굴을 고운 너울로 가리고 온몸에 고운 비단을 두른 채, 공주답게 고상한 자태로 궁녀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전혀 고상하지 않게 절규했다.
아, 아. 지금 황제 따위한테 가고 싶지 않아.
그리움의 대상은 너무나 분명해서, 절망스러웠다.
대전에 도착한 류하는 곧장 황제와 황후가 기다리고 있다는 알현실로 모셔졌다. 그곳에서 그녀는 뜻밖의 사람을 발견했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온 대장군이 그곳에 있었다.
류하는 문가에 굳어서 온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온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알현실 측면에 정중히 착석한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황제 폐하, 황후 전하. 월국의 월류하 공주마마이십니다.”
류하는 하마터면 알현실 상석에 자리한 황제와 황후를 통째로 잊어버릴 뻔했다. 궁녀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되돌렸다. 류하는 온에게서 시선을 뜯어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류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갖췄다. 목소리가 하나도 떨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속에서는 심장이 이렇게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데,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앉게.”
황제가 명령했다. 생각보다는 맑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폭군이라 하여 막연히 조금 더 걸걸한 목소리를 예상했는데.
류하는 시키는 대로 황제와 황후의 맞은편에 얌전히 착석했다. 그러면서 온을 흘긋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나는 분명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는 자리에 나아왔는데, 왜 황제의 동생이 여기에 있을까?
순간, 하나의 끔찍한 상상 때문에 류하의 명치가 차게 식었다. 토하고 싶을 만큼 무서워졌다.
‘서, 설마. 황제한테 들킨 건 아니겠지? 내가 저 사람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그대의 아내 될 사람이 부럽다고 말했다. 혹 누군가 엿들었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아니야, 아니지. 애초에 오해도 아니었다. 내가 언젠가 내 동서가 될 여인을 벌써 미친 듯이 부러워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쌍으로 추궁하러 부른 거야, 뭐야?’
그러나 황제가 감히 예비 시동생과 눈이 맞은 후궁 후보를 족치러 불렀다기엔 현재 분위기가 너무 평화로웠다. 온도 너무 멀쩡한 상태로 저기 앉아 있었고.
“너울을 벗어 보게.”
한편, 황제의 명령이 이어졌다. 이번에 류하는 온을 애써 무시하던 것도 잊고 그를 처음으로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황제가 생긋 웃었다.
“대장군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곧 모두 가족이 될 사이인데, 얼굴을 보인다고 해서 별문제가 있겠는가.”
아니, 그럼 왜 지금까지 꽁꽁 싸매고 다니라고 했어?
하긴, 여기까지 오는 길은 그렇다 치고 황궁에 도착해서까지 이토록 철저하게 내외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류하는 곧 혼례를 치를 테고, 정식으로 황실의 인원이 될 테니.
류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시 토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류하는 천천히 너울을 걷었다.
온은 공주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에게 닿는 제 눈길 하나하나가 공주의 죄가 되고 자신의 죄가 될까 봐.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 되면, 태후전에 유폐된 자신의 어머니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자신이 스치듯 잠시만이라도 공주의 얼굴을 눈에 담게 되면 제 눈빛이 흔들리고 마음이 범람하여 기어코 들키고 말까 봐, 온은 석상이 된 느낌으로 묵묵히 인내했다.
“하.”
공주의 얼굴을 마주한 황제가 나직한 실소를 흘렸다. 온도, 황후도 그 헛웃음이 불안했다. 류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절색이군.”
륜은 부드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류하도, 온도, 화은도 움찔하지 않으려 애썼다.
온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봤고, 화은은 류하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화은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
“그대와 같은 미인을 타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니, 그대 나라의 귀족 자제들이 꽤 배가 아팠겠어.”
륜은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류하는 자신의 불쾌한 기색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날까 두려워 표정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