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명석하고 냉철한 황후니, 정략혼을 통해 힘을 쌓으려는 황제의 뜻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랴.
다만, 마음이 찢어졌다.
<황후. 내가 그 여인들을 연모해서 곁에 두는 게 아님을 알지 않습니까.>
륜은 화은의 시선을 피하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하지만 그들과 동침하시잖아요. 화은은 차마 겉으로 씹어뱉지 못했다. 꾹 다문 입술 아래 새카만 마음이 들끓었다.
<나는 그대와 한 약조를 어긴 적 없습니다. 나는 오직 그대 하나만 마음에 담았습니다.>
황제의 음성은 자상하고 진중했다. 하지만 화은은 그가 내리 자신의 시선을 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이에 대해 화낼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 비참했다.
<내 평생의 유일한 정비는 오직 그대 하나뿐입니다, 화은.>
가끔 남편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면, 그거 하나로 만족하며 이를 악물고 물러서야 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지. 륜. 휘륜. 꿈속에서만 입 안에 굴려봤어.
그리고 이제 그이의 일곱 번째 후궁, 여덟 번째 아내가 될 공주가 오늘 도착할 예정이었다.
공주에 대해 황제와 황후, 그리고 소수의 최측근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능을 사용한다더라.
대장군이 공주를 데리고 오던 중에 되살아난 시체들에 습격받는 괴이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공주가 더욱 괴이한 힘을 사용해서 그들을 모두 구했다고 한다.
워낙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일단은 비밀에 부쳐졌다. 여섯 명의 후궁은 시체나 이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새 식구의 도착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렸고, 황후 혼자 긴장했다.
도술을 부리는 연적이요, 이방 나라의 공주라. 그래, 확실히 신선하기는 했다.
대체 정확히 어디가 얼마나 신선할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일만 남았다.
류하는 창밖을 훔쳐보았다. 화려한 성문이 압도적이었다. 그 뒤로 펼쳐지는 활기찬 저잣거리, 높다란 건물, 그리고 마침내 궁궐까지. 하나하나 기억에 남기고 감탄할 만했다.
‘여기가 휘국의 수도구나.’
류하의 마음은 심연까지 가라앉았다. 토할 것 같았고, 울고 싶기도 했고, 그냥 이대로 조용히 잠들 듯 죽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류하는 다시 창밖을 흘긋했다. 대장군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말에 올라 차분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거리를 횡단하는 나의 예비 시동생. 조만간 나와 가족으로 묶일 사람.
눈물이 한 방울 넘쳐 공들인 화장이 번질까 봐, 류하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입술을 깨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연지를 발라 몹시도 고운 색이었다.
오늘 그녀는 휘국의 황제와 황후를 처음으로 알현한다. 자신의 남편과 남편의 아내를 동시에 마주하는 자리라니, 해괴했다.
하긴, 황족의 혼사가 원래 제정신으로 이뤄지는 일은 아니긴 하지.
‘싫어.’
류하는 솔직하게 생각했다. 그 처절한 진심의 가장 큰 원인은 지금 마차 옆에서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류하의 눈시울이 다시 더워졌다.
‘정말, 정말 싫어.’
몇 주 전, 달빛 아래 고백과 다름없는 말을 듣고 나서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저 사내 때문에.
고작 적국의 황족 따위에게 넘어간 제 멍청한 심장 때문에, 류하는 내내 괴로웠다.
물론, 온이 류하를 완전히 없는 사람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대장군의 역할은 공주를 가까이서 모시며 호위하는 거니까.
온은 필요할 때 류하에게 말을 걸었고, 류하가 마차에서 내리면 손을 잡아 주었고, 혹 불편한 점은 없으시냐고 꿋꿋이 묻고는 했다. 그뿐이었다.
오직 온 본인과 류하만 느낄 수 있는 장벽이 둘 사이에 있었고, 그 거리감에 잠겨 류하는 나날이 익사하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그대의 아내 될 사람이 부럽습니다.>
정말이지 바보처럼,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서는.
<용서하세요.>
그런데, 있잖아. 만약 시간을 되돌려 같은 찰나에 놓였다면, 내가 다르게 말할 수 있었을까?
<부디 용서하세요.>
아무리 왕족답게 진심을 감추는 법을 알아도. 머리로는 내가 정말 미쳤다고 완벽하게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이 마음은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데.
스무 살 애송이 공주에게 첫사랑의 열병은 가혹했다. 내가 더 성숙하고 노련한 사람이었다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지킬 수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안도할 점은, 온 대장군이 절대로 자신의 고백을 황제나 다른 사람에게 일러바칠 수 없다는 것.
공주 혼자만의 짝사랑이라는 점을 해명해 봤자 소용없었다. 어쨌든 황제의 여인이 될 자의 마음을 흔들었으니, 대장군은 불경죄에 달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만약 누군가 그때 내 말을 엿듣기라도 했다면, 나뿐 아니라 대장군까지 위험에 처하는 건데. 류하는 자신의 주둥이를 질책했다.
어쨌든, 온이 고발할 일은 없었다. 달빛에 뒤섞인 고백은 그렇게 영영 묻힐 것이다. 고백받은 사내와 고백한 여인의 심중에 진득한 자국만 남기고.
‘그나마 다행이야. 나 혼자 좋아하는 거라서.’
류하는 자신을 애써 달랬다. 혼자라는 그 말이 더욱 아프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며.
‘나 혼자 멍청하게 흔들린 거야. 나 혼자 정리하면 돼.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만 정리하면 들킬 일도 없어.’
연정이 이렇게 괴로운 일인 줄은 몰랐어.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어.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는 별궁에서 책으로만 연애를 배웠고, 막연하게 몽글몽글한 감정을 상상했었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거추장스럽고 위험천만한 마음이 바로 연정이라는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거야? 미리 대비했어야 했는데. 조금 덜 미련할 수 있었을 거야.
류하는 창밖을 한참 더 슬프게 보다가, 엉망이 된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마차가 황궁 문을 통과했다. 육중한 문이 닫혔다. 이제는 공주와 대장군이 갈라설 시간이었다.
온은 황제께 가서 자신의 도착을 고해야 했고, 류하는 궁녀들과 함께 후궁전의 새 처소로 가서 여독을 푼 뒤 알현을 준비해야 했다.
“공주마마를 처소로 모셔라.”
“네, 대장군님.”
그 건조한 지시를 끝으로 온은 돌아섰다. 절대, 절대로 마차를 돌아보지 않았다. 혹여 류하와 눈이 마주친다면, 여태 참고 참아 일그러진 마음이 속절없이 범람할까 봐.
당신을 생각하는 것도 괴롭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괴로워서, 결국 지난 몇 주간 고통 속에서 지냈다.
마차가 덜컹덜컹 멀어졌다. 온은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고삐를 그러쥔 손에 새하얀 뼈마디가 솟았다.
긴긴 여정 끝에, 이별이었다.
처소로 곧바로 안내된 류하는 마차가 후원을 가로지르는 틈에 창밖을 열심히 구경했다.
첫날의 그 건방진 궁녀가 과장한 건 아니구나. 후궁전의 뜰은 아름다웠다.
“공주마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새로운 궁녀들이 다가와 정중히 길을 안내했다. 류하는 묵묵히 뒤따랐다.
오랜 여행 끝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만큼 피곤했다. 그러나 그녀는 휘청대지 않고 버텼다.
휘국 황실에서 나는 월국의 대표, 절절한 애국심은 없지만 굳이 얕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나를 둘러싼 궁녀들 중에는 월국 사람을 처음 보는 이도 있을 테고, 약소국에서 팔려 온 공주를 시작부터 깔보는 자도 있을 테지.
‘나라 망신시키고 내 위신도 망치는 어리석은 짓은 벌이지 말자.’
류하는 온 때문에 잔뜩 구겨진 마음을 추스르며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여기서부터 전쟁터였다.
후궁전은 그 내부도 화려했다.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류하는 스쳐 가는 방들을 구경했다.
류하를 안내하던 궁인들이 드디어 한곳에서 멈췄다. 미닫이문이 열렸고, 류하는 안으로 들어갔다.
류하의 입장에선 다소 이국적인 느낌으로 꾸며진 실내가 눈앞에 나타났다.
‘하긴, 이제는 이게 이국적인 게 아니겠구나.
여기서는 내가 이방인이야.
“공주마마, 환복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환복을 마치신 다음에는 목욕하실 수 있도록 물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두 번째는 대답이 조금 더디게 나왔다. 목욕, 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창피한 기억에 불과했는데,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이불을 여러 번 걷어찼는데, 이제는 그 수치심마저 그립다니, 우스웠다. 그 사람이 류하를 그렇게 만들었다.
류하는 순순히 팔을 벌리고 휘국의 낯선 궁인들이 자신의 옷을 벗기도록 두었다.
문득, 제하가 보고 싶었다. 제하와 다른 월국 궁인들은 본인들의 처소로 안내되어 쉬는 중이었다.
‘그새 그렇게 정이 들었구나.’
류하는 낯익은 궁녀를 그리는 자신의 마음을 곱씹으며 속으로 조금 웃었다.
참 우습지. 정작 우리 둘 다 월국 별궁에서 지낼 때는 서로 말은커녕 눈빛조차 섞지 않는 사이였는데, 기껏해야 달포 만에 낯선 길에서 우리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그토록 종잡을 수 없는 거구나. 그래서 아마 이토록 바보 같은 과오를 저지른 거겠지.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 중 하필 그자를, 그 사내를 마음에 담다니.
“공주마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얇은 내의로 갈아입은 공주에게 궁인이 다소곳이 아뢰었다. 류하는 궁녀를 따라 침소와 바로 연결된 목욕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향긋한 훈김이 가득했다.
“물이 너무 뜨겁거나 차갑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 필요 없다. 온도가 딱 적당하구나.”
“황송합니다, 마마.”
류하는 궁인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입수했다. 따스한 물이 살갗을 핥자 그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을 감겨 드리겠나이다, 마마.”
“고맙다.”
능숙한 손길이 류하의 비단 같은 머리를 매만졌고, 류하는 익숙하게 목욕 시중을 받으며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겨우 후궁전일 뿐인데, 이 정도 규모와 수준이라는 거지?’
아직은 스쳐본 것이 전부지만, 후궁전의 후원과 실내는 매우 넓은 편이었고 풍기는 분위기도 세련되기 그지없었다.
물론 황제의 여인인 후궁들의 거처니 부족함이 없어야겠지만, 황제 본인이 머무는 대전도 아니요 황후가 머무는 내전도 아닌 고작 후궁전이 이토록 고급스러운 건 꽤 놀라웠다.
‘쳇, 제국 사람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이유가 있었네.’
류하는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에는 잔뜩 심통이 차올랐다.
자신이 월국 궁궐을 떠난 첫날, 황궁의 아름다움을 들먹이며 공주를 은근히 무시하던 궁인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의 한없이 높은 콧대를 곱게 봐줄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