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하긴, 그것도 그래요. 본인이 원해서 그 길을 떠났겠어요?”
다른 후궁이 나직이 수긍했다. 그러자 옆에서 다른 여인이 말조심하라는 뜻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 훤아에게 수긍한 후궁은 퉁명하게 덧붙였다.
“그냥 부왕이 시키니까 떠밀려서 왔겠지.”
분위기는 단번에 어색해졌다. 몇몇은 저 후궁을 원망했지만, 몇몇은 남몰래 안쓰러워했다.
저 후궁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 모두 연정 때문에 혼인한 건 아니니.
그러나 이 유독 삐딱한 후궁, 수연은 남들보다 속사정이 훨씬 심했다. 그걸 아는 다른 건 다른 후궁 중에 훤아뿐이었다. 그리고 훤아는 당연히 침묵했다.
“그나저나, 황후 전하가 조금 늦으시네요. 연통을 넣어야 할까요?”
화제를 전환할 겸, 다른 후궁 하나가 태연한 척 물었다. 그때, 고아한 음성과 함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럴 필요 없네.”
궁인이 문을 열자 황후 본인이 다과회 장소로 들어섰다. 후궁들이 전부 일제히 기립했다. 다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훤아가 후궁들의 대표로 정중하게 아뢰었다. 작년에 황손을 출산한 뒤로 훤아는 후궁의 최고 품계인 비(妃)로 격상되었다. 내명부에서 그녀는 황후 바로 다음이었다.
“내가 조금 늦었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황후 전하.”
“앉게.”
황후, 화은은 단정히 미소하며 손짓했고, 후궁들은 다과가 놓인 식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화은이 상석에 앉았다.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다른 여인들은 황후가 끔찍하게 불편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이야기가 한창이던 것 같은데. 뭐 재밌는 소재라도 있나?”
화은은 빙긋 웃으며 후궁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묻는 황후는 아름다웠다.
혼례를 위해 입궁해서 처음으로 황후 전하를 알현했던 후궁들은 하나같이 경악하거나 감탄한 기억이 있었다.
황후 전하가 저런 절세미녀이신데, 고작 정치적 이유로 간택된 우리가 저분을 제치고 황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폐하의 총애를 얻어 궁에서 권력을 잡아 보겠다는 야무진 꿈은 버리도록 하자. 차라리 아들을 낳지 않기를 기도하자. 그냥 가늘고 길게 사는 거야.
괜히 황자를 출산하여 황후 전하의 경계를 사고 아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움터에 뛰어들 이유는 없지.
게다가, 우리가 아들을 낳아 봤자 서자 아니더냐. 물론, 아무리 서자라 해도 황태자 자리를 약속받을 수 있겠지. 만약 적자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중 하나가 아들을 낳았는데 나중에 황후께서 황자를 출산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후궁들을 비롯한 제국의 숱한 사람들이 황제가 어떤 식으로 보위에 올랐는지 기억했다.
그는 맏이로서 권좌를 약속받아야 마땅했지만, 서자라서 오히려 목숨을 위협받다가 끝내 부친을 베고 왕좌에 올랐다. 그리고 적자였던 원래 황태자는 신하의 자리로 밀려났다.
다시는 그런 피바람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사람들의 깊은 갈망이었다. 후궁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자가 태어날 거라면 적자가 없는 게 낫고, 언젠가 황후 전하가 아들을 낳을 거라면 우리는 딸만 낳는 게 안전하다. 아예 자식이 없어도 나쁘지 않고.
그래서 후궁들은 황후 앞에서 늘 숨죽였고, 그녀에게 미움받지 않고자 했고, 어서 황후 전하께서 건강한 황자 아기씨를 출산하시길 기도했다.
권력은 필요 없어. 그냥 가늘고 길게, 평화롭고 풍족하게 살자.
그러려면 황실의 후계 구도가 어서 안정돼야 하는데, 지금 황제는 딸만 둘이었다.
이러다간 온 대장군을 황태제로 책봉하자고 누군가 기어코 청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황송합니다, 전하. 오늘 도착 예정인 월국의 공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새 식구가 될 자가 어떤 여인인지 궁금해서 우리끼리 잠시 추측하느라 바빴습니다.”
화은의 질문에 훤아는 조심스레 답했고, 화은은 다시 싱긋 웃었다. 그 우아한 미소는 황후의 눈에 닿지 못했다.
“굳이 미리 이것저것 넘겨짚느라 힘을 뺄 이유가 있겠나? 내일이면 직접 만날 수 있을 테니, 궁금증은 그때 풀어도 늦지 않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하.”
훤아는 깍듯이 대답했고, 나머지 후궁들은 공손한 가면 아래 초조함을 숨기며 어서 내명부의 다과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후궁들끼리 모이는 건 괜찮은데, 황후 전하가 끼는 순간 모든 게 살얼음판이었다.
휘국의 후궁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서로 고만고만하게 무력한 데다가 딱히 권력욕도 없고, 황제를 연모해서 혼인한 게 아니기에 질투한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황후는 륜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고, 명실상부 륜의 즉위를 도운 가장 큰 공신이었다. 단지 여인이라는 이유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리고 화은이 륜을 마음 깊이 사모한다는 사실은 내명부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름답고 우아하신 황후 전하가 우리를 보며 웃을 때마다 속으로 대체 어떤 생각이실지 상상하기도 무서워서, 후궁들은 매번 숨이 막혔다.
특히 황제와 몸을 섞어 딸까지 낳은 훤아는 화은을 마주할 때마다 수명이 주는 느낌이었다.
그런 곳으로, 그런 소용돌이 한복판 속으로 류하 공주가 오고 있었다.
이건 륜이 아직 힘없는 황자일 때의 이야기. 황후의 아들 온이 황태자이던 시절.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첫날밤부터 속삭인다는 말이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륜은 자신의 아름다운 새색시를 보며 말없이 눈썹을 치켰다.
<저는 내버린 여식입니다. 아무도 제가 귀해질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를 전하께 시집보낸 거죠. 툭하면 목숨을 위협받는 서장자의 비라니, 대체 누가 원해서 택했겠습니까?>
<이거, 내가 황족 모독죄로 고발하면 그대 목이 바로 날아갈 거라는 걸 알고는 있죠?>
륜은 마주 속삭였고, 흥미와 짜증이 섞인 눈으로 신부를 관찰했다.
신혼부부는 서로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아직 겉옷조차 벗지 않은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제 목 하나 날린다고 전하께서 얻으시는 게 뭡니까? 대체 무엇이 달라집니까? 저를 죽이지 말고 이용하세요. 저는 영특하고 이기적인 계집이니, 전하께 필시 도움이 될 겁니다.>
<이기적인 계집이 나한테 도움이 돼? 망발이 심합니다. 그대는 이기적이니 그대 자신을 위해서만 움직일 텐데, 그게 어떻게 나한테 도움이 된다는 거죠?>
<전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검을 잡을 수도 없고 관직에 오를 수도 없는 여인입니다. 계집이라는 이유로 금지당한 게 많죠. 반면에 전하는 어떠십니까?>
이제는 숨결이 스칠 만큼 가까웠다. 륜은 어느새 매료당한 시선으로 화은을 느리게 뜯어보았다.
목숨을 위협받는 황자와 한미한 가문의 여식. 피차 절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젊고 건장한 사내이시며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황족이십니다. 대체 뭐가 두려워서 망설이십니까? 죽을 날을 그저 기다리시는 겁니까? 얼마 전에만 해도 자객이 왔다 갔는데요?>
몇 주 전 륜은 ‘사고’로 크게 다쳤지만, 아무도 그게 사고였다고 믿지 않았다. 모두가 황후를 의심했지만, 아무도 황후를 정죄하지 않았다.
착한 황태자만 제 이복형이 제 모친 때문에 또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에 남몰래 괴로워했다.
<힘없는 황자의 비로 살다가 저도 함께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황제가 되십시오. 그럼 저도 곁에서 황후의 영화를 누릴 것입니다.>
발칙한 여인이 속닥였고, 황자는 신부가 마음에 겨워서 쌩긋 웃었다. 이어서, 입을 열어 질문했다.
<그것 외에도 혹시 바라는 게 있나요? 황후로서 누릴 영화 말고도.>
륜은 나긋하게 물었고, 화은은 그 질문이 의외라서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륜이 친절하게 부연했다.
<여러모로 목숨 걸고 내게 이런 말을 했을 텐데, 고작 황후 자리 하나로 그 보상이 충분하겠습니까. 다른 것도 말해 보십시오. 그대가 간절히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말입니다.>
화은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륜을 똑바로 보며 진지하게 아뢰었다.
<저는 그저, 전하께서 제게 주실 수 있는 최선의 답례이면 됩니다.>
륜도 잠시 고민했다. 이윽고, 그는 웃는 눈으로 아내를 보며 엄숙하게 약속했다.
<그럼 이 약조로 보답하지요. 평생 그대 하나만을 연모하고 마음에 담겠습니다.>
남편의 당당한 언약을 듣고 화은은 잠시 웃었다. 자신의 변함없는 연정을 스스럼없이 최선의 답례라 칭하는 저 황족다운 오만함이, 마음에 들어서.
<황송합니다, 전하.>
이후, 화은은 신랑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뒤로 시간이 흘러 황자는 황제가 되었고, 황자비는 황후가 되었으며, 륜은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고, 화은은 최상의 권위를 누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할까.
지아비가 제게 약속했던 최선의 답례가 무참히 깨어졌기 때문일까.
여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탐나서 황자를 유혹했고, 그를 황제로 만드는 데 온 힘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졌다.
처음에는 그저 권력욕이었는데,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갈망이라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륜은 화은을 존중했다. 신뢰했다. 황자 시절 그 누구보다 화은에게 의지했고, 목숨 걸고 화은을 위험에서 거듭 구했다.
그건 단순히 연정이나 욕정으로 치환할 수 없는 깊은 관계였다.
그들은 동료였고, 전우였고, 평생 서로에게 최고의 참모였다.
하지만 화은은 륜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후궁을 또 들이신다고요?>
월국의 공주와 혼인하겠다는 의사를 륜이 처음 밝혔을 때, 화은의 음성은 몹시 싸늘했었다.
<왜요, 여섯 명으로도 부족했나요?>
찻잔을 그러쥔 화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륜은 잠시 그 떨림을 물끄러미 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월국 농민들은 양질의 차와 담배를 재배하죠. 그쪽 시장이 열리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공주를 후궁으로 들이는 것도 정략에 불과했다. 월국 왕족을 인질로 잡아 두고 그쪽 시장을 압박하여 억지로라도 개방하기 위해.
여태 입궐한 여섯 명의 후궁도 전부 비슷한 이유로 황제가 손수 골랐다. 누구는 군권을 잡은 가문의 딸이었고, 누구는 상계 거물의 누이였다.
그런 식으로 륜은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조금씩 발판을 넓혔다. 미천한 외가를 둔 서자 출신 황제이기에, 혼인을 통한 동맹이 절실했다.
화은은 그런 점을 전부 이해했다. 머리로는, 머리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