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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23)화 (23/123)

23화

류하는 웃으며 색실을 풀었다. 제하는 이제 조금 멍해졌다. 남녀노소 홀릴 만한 외모이긴 하구나. 제하는 순간 억울해졌다.

“어떻게 이런 분을 내내 별궁에만 두시고…….”

“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하는 서둘러 얼버무리며 속으로 국왕을 욕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분이 궁궐에 계시면 만천하에 드러내야지! 이건 월국의 영광이라고! 존경받아야 마땅한 아름다움이란 말이다!

“제하야, 나 실 끊는 것 좀 도와줄래?”

“네, 마마!”

제하는 적극적으로 나섰고, 류하는 친우끼리 하듯 재잘대며 어울렸다.

일국의 공주가 품위를 잊고 일개 궁녀와 시시덕거리다니, 누가 본다면 비웃을 만했다.

하지만 뭐, 어때. 아무도 보지 않는걸. 오직 온만이 문밖에 있었고, 그는 결코 류하를 비웃지도, 제하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제하는 한참 뒤에 떠났고, 그러면서 문이 다시 여닫혔다.

류하는 잠시 시선을 들었다. 그녀는 훔쳐보듯 시야에 새겼다. 뒷모습, 윤곽, 어느덧 익숙해진 단단한 어깨와 올곧은 목까지.

이후, 다시 문이 닫혔다. 단절된 공간에 오도카니 앉아 류하는 하염없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고작 문 하나일 뿐인데. 사실 별로 멀지도 않으면서, 도저히 닿을 수가 없었다.

류하는 손에 쥔 자수틀을 내려다보았다. 류하는 바늘을 만지며 잠자코 상상했다. 지금 문밖에 있는 저 사내의 모습을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자수로 옮기는 모습을.

류하는 자수를 구겨 버렸다. 고운 꽃무늬가 일그러졌다.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그들은 한곳에 머물렀다.

시체 떼의 습격을 받고 나서 사흘쯤 됐을까. 여느 때처럼 성실하게 공주의 처소 앞을 지키던 온은 염려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공주마마?”

며칠 전 악몽에 붙들려 괴로워하던 신음과는 또 달랐다. 뒤척이는 소리, 끙끙대는 소리, 또다시 돌아누우며 이불 바스락대는 소리 등이 번졌다.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온은 문에 조심히 손을 대고 간곡하게 불렀다. 귀찮다는 생각도, 의심하는 생각도 없이, 그저 걱정스러웠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안에서 탁한 음성이 들렸다. 온은 못 미덥다는 뜻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함부로 공주의 처소에 들이닥치지 못해 바깥에서 무력하게 서성이는 꼴이었다.

류하는 한숨지었다. 문가에 그림자가 일렁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중인 듯한데, 그를 달래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아예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실수였다. 이렇게까지 문 바로 앞에 붙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그러니까. 이렇게 문에 밀착해 있을 필요 없다고요.”

류하가 말을 더듬었다. 어두워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벌건 대낮에 마주했다면 정말 창피했을 것이다. 스스로 느껴질 만큼 얼굴이 뜨거웠기에.

“송구합니다. 앓는 소리가 들려서요.”

온은 중얼대며 시선을 피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동작이 조금 더뎠다. 당신의 입술에서 풍기는 내음이 너무 달콤해서 그런가. 일순, 위험한 생각을 했다.

“별거 아닙니다.”

류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사실 별거기는 한데, 온에게 털어놓기엔 너무 껄끄러웠다.

“혹 편찮으신 건 아닙니까? 필요하시다면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온은 여전히 시선을 애매한 허공에 둔 채 정중히 아뢰었다. 류하는 고집을 부리는 온을 잠시 뚱하게 보다가, 마찬가지로 정중히 요청했다.

“그러면 의원 말고, 궁녀 아이를 시켜 온수 병을 하나 가져오라고 시켜 주겠습니까?”

“온수 병이요? 몸이 추우십니까? 아궁이에 불을 지피라고 할까요?”

윽, 하나씩만 물어봐. 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달아 질문하자 류하는 내심 진저리쳤다.

하지만, 사실 싫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이토록 걱정한다는 사실이.

“몸이 추운 건 아니고요, 배가 조금 아파서 온수 병을 끌어안고 있으면 도움이 될까 합니다.”

현재 류하는 달거리 중이었다. 어쩐지, 지난 며칠간 몸이 퍽 찌뿌둥했었다.

최근에 하도 많은 일이 겹치면서 주기를 세는 것도 잊고 있었다. 선명한 통증이 이제야 그녀를 상기시켰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온은 즉시 행동에 착수했고, 류하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를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당직을 서던 궁인을 불렀고, 곧 온수 병을 들고 돌아왔다.

“받으십시오.”

“고맙습니다.”

손끝이 잠시 겹쳤다. 스치는 온기는 온수 병의 영향일까, 아니면 애틋한 체열일까. 영영 알 수 없었다. 둘 중 아무도 미처 깊이 생각하기 전, 그 순간은 끝났다.

“복통이 너무 심해지면 말씀하십시오. 곧장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온은 진지하게 청했고, 류하는 이 무지하고 다정한 사내를 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정말 다정해. 차라리 아니었다면 좋았을걸.

“그대는 참 자상한 사람이군요.”

류하가 속삭이자 온은 당황했다. 상대방이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아서만은 아니었다. 훨씬 근본적이고 고통스러운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대의 아랫사람이 부러울 지경입니다.”

차라리 내가 그대의 부하 장수라면 좋겠어. 그럼 그 누구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그대를 마음껏 흠모할 수 있지 않을까.

전우애와 존경을 핑계로, 그대의 곁을 맴돌 수 있지 않을까.

“저보다도 고귀하게 되실 분이 제 아랫사람을 부러워해서 어쩌시려고요.”

온은 부드럽게 받아쳤다. 그는 다시 류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현재 류하는 너울을 쓰고 있지 않았다.

황제의 소유라 하며 함부로 볼 수도 없게 가려 두었던 얼굴이, 지금은 달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마는 폐하의 여인이 되는 겁니다. 그 누구도 마마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작 대장군의 부하 따위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온은 류하에게, 류하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조곤조곤 나직하게 쐐기를 박았다.

폐하의 여인이라고.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당신은 내 형수가 되고, 나는 당신의 시동생이 될 거라고.

“……그렇다면 말을 수정하지요.”

류하는 자그맣게 대꾸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녀의 이성이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언젠가 그대의 아내 될 사람이 부럽습니다.”

아, 나는 목숨이 열 개쯤 되나 봐. 아니면 죽는 게 취미인가. 대체 뭐라는 거야.

깔끔하게 무시당한 그녀의 이성이 구석진 곳에서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다 들으면서도, 류하는 기어코 덧붙였다.

“그 정도면 내가 부러워해도 되겠습니까?”

온의 눈빛에 눌어붙은 감정이 대관절 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반문과 탄식과 애원이 뒤엉켜 그의 시선을 아득하게 칠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희게 표백한 듯하여, 눈이 부셨다. 류하는 잠시 눈을 감고 싶었다.

“용서하세요.”

류하는 간신히 속삭였다. 그것 외에는 달리 속죄할 길이 없었다.

“부디 용서하세요.”

거듭된 애걸 끝에 류하는 멋대로 문을 닫았다. 용서해 달라고 한 주제에 정작 용서의 말은 기다리지 않고, 온수 병을 꽉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어 흐느낌을 참았다.

온은 단 한 번도 류하를 부르거나 문을 다시 두드리지 않았다. 분명 그의 윤곽은 문밖에 일렁이는데, 숨소리조차 사라진 듯했다.

류하는 달거리의 통증마저 잊게 하는 좌절 속에 몸을 웅크리고 비명을 삼켰다.

류하는 그날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 차라리 잠들어 악몽을 꾸는 게 나았을 만큼 괴로웠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여정이 재개됐다.

제4장. 입궁

황실 후궁들이 으레 서로 사이가 나쁠 거라고 사람들은 넘겨짚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휘국 황제 륜의 여섯 후궁의 경우, 서로 사이가 나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늘 월국의 공주가 도착한다면서요?”

“네, 오늘은 일단 조용히 넘어가고 내일 축하연이 있대요. 기대된다.”

“공주가 와서 기대되는 거예요, 내일 연회가 있어서 기대되는 거예요?”

“당연히 연회가 있어서 기대되는 거죠, 하하. 연회가 열리면 음식도 있고, 술도 있고, 음악도 있고. 그냥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재밌겠죠.”

인류 역사상 벌어진 모든 피비린내 나는 궁중 암투는 한정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일어났다. 즉,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휘국 후궁들의 경우, 자신들의 분수를 알고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뭉쳤다.

자기 혼자 어떻게든 황제의 총애를 독점해 보겠다고 괜히 나댔다가는 나머지 다섯 후궁과 황후에게 제대로 찍히는 것이다. 그랬다간 역으로 위험해질 테고.

그러니, 차라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게 나았다.

“왜요, 나는 공주가 와서 더 기대되는데. 새로운 식구가 오는 거잖아요. 게다가 그 공주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는데요? 완전히 비밀에 싸여 있대요.”

“비밀은, 무슨. 그냥 천덕꾸러기인 거죠. 내가 듣기론 왕후의 딸 대신 그 공주가 오는 거라고…….”

“쉬이, 말조심하세요. 그렇게 예민한 문제를 함부로 떠들어서 쓰나.”

“그 공주가 왕후의 딸이든 뭐든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한미한 나라의 공주잖아요? 제국의 예법을 제대로 익히고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들이 각자 황제를 연모하여 입궁한 상황이면 모를까, 어차피 제국의 귀족 가문들과 황실의 정략혼일 뿐이었다.

다른 여인들이 내 지아비를 나눠 쓰든 무슨 상관이야. 별 감흥도 없는걸.

외려 같은 대국의 명문가 여식으로서 다들 유대감과 자부심이 충만한 이들이었다. 그러니 서로 친해지기도 쉬웠고, 남을 배척하는 건 더더욱 쉬웠다.

이미 저들끼리 오순도순 사이좋게 지내는 여섯 명 사이에 웬 약소국 공주가 일곱째 후궁이랍시고 끼어들게 생겼으니, 분위기는 이미 조금 싸늘했다.

“다들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세요. 공주가 얼마나 외롭겠어요. 월국부터 여기까지 거리가 먼데, 그 길을 혼자 떠난 거잖아요.”

여섯 명 중에서 가장 순하고 상냥한 훤아라는 후궁이 부드럽게 나무랐다.

훤아는 올해 두 살 먹은 둘째 황녀의 생모였다. 황녀는 아비의 미모와 어미의 선함을 골고루 물려받아 어린 나이부터 뭇사람의 애정을 골고루 누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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