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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22)화 (22/123)

22화

“제하야, 이럴 때는 아첨도 좀 할 줄 알아야지.”

“네?”

“됐고, 옷 갈아입는 거나 도와주렴.”

‘나 안 무섭니?’라고 윗사람이 물어보면, ‘세상에, 무섭기는요, 하나도 안 무서우세요’라고 빈말로라도 잡아떼는 게 보통 아닌가.

‘얘는 황궁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단단히 교육해야겠군.’

류하는 제하의 명줄을 위해 다짐하며 마저 얼굴을 닦았다. 제하는 이어서 공주의 옷시중을 들었다.

“사람이 많이 죽었니?”

이번에도 꽤 뭉툭한 질문이었다. 류하의 허리끈을 묶던 제하는 주춤하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저도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얼핏 듣기로, 죽은 자가 너덧을 넘어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친 사람은 훨씬 많지만요.”

너덧이라니. 류하는 조용히 놀랐다. 의외로 적은 숫자였다.

물론 아무리 숫자가 적어도 누군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변함없기에, 궁녀의 애도는 마땅했다. 류하도 죽은 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하면 명치끝이 아렸다.

그러나 냉정하게만 생각했을 때, 최소 수십의 시체 떼에게 습격당한 것치고는 얼떨떨할 정도로 적은 피해였다. 류하는 슬픔과 별개로 의아함을 품었다.

‘왜?’

그만큼 휘국 호위들의 대응이 훌륭해서?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해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시체들이 어설퍼서.’

그것들은 잘 훈련된 군대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육체만 되살아난 송장 떼에 불과했다.

지략이나 전술 따위 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그들은 오히려 전투가 익숙한 인간 병사들에게 밀렸다.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

시체들을 되살려 조종한 자가 인간이든 아니든, 정확한 의도가 뭐든, 적어도 어제 공격의 목표가 확실한 멸절은 아니었다고 류하는 짐작했다.

상대편을 완벽하게 쓸어버리고 싶었다면 차라리 숙련된 군사를 보냈어야 했다.

애초에 지난밤 류하가 고민했듯, 고작 후궁 후보의 행렬을 습격함으로써 누군가 이득을 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전날의 기습에 구체적인 살의는 없는 듯했다. 그건 실험, 그래, 그저 실험이었다. 연습이라고나 할까.

마치 누군가 실험 삼아 시체들을 되살리고선 실전 연습 겸 그것들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류하는 거기까지 상상했다. 상상만, 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물증 없는 추측은 가설로만 그쳤다.

“공주마마, 다 되었습니다.”

궁녀의 음성이 공주의 상념을 끊었다. 류하는 추론을 중단하며 짧게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내가 여기서 더 궁리해 봤자 뭐하랴. 류하는 문득 밀려드는 무력감을 느꼈다.

전날의 기괴한 습격이 실험이든 뭐든, 류하가 강대국 황제의 첩실로 팔려 가는 힘없는 공주라는 현실은 여전했고, 그녀는 지독한 체념에 짓눌렸다.

순식간에 암울해진 류하의 심중에 한 조각 서글픈 갈망이 깃들었다.

휘온.

그의 이름과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한 번씩 할퀴고 지나갔다. 물리적인 흉기처럼.

류하는 통증을 외면했다.

온은 부상자 및 생존자의 상태와 사망자의 수를 확인했다. 이후, 본인과 류하 공주가 간단히 숨을 돌리자마자 바삐 이동을 재개했다.

최대한 빨리 이 으슥한 산길을 벗어나는 게 목표였다. 비록 어제 이후로 내리 조용하긴 하지만, 기괴한 죽음의 기억이 어린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온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마을로 내려갔다. 그곳의 촌장은 황족의 인장으로 신원을 증명한 온에게 숙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를 고분고분 제공했다.

거기서 여정은 당분간 중단되었다. 온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더 움직이는 게 무리라고 판단했다. 적어도 며칠은 쉬어야 했다.

공주와 대장군, 그리고 그들에게 딸린 군졸들과 궁인들은 뜻밖의 휴식 아닌 휴식을 얻었다.

온은 황제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전언을 보냈다. 전언에는 시체들의 공격과 공주의 이능에 관한 내용도 별수 없이 포함되었다.

황제께 사실대로 고해바치면서도 온은 마음이 불편했다. 형님이 사술을 쓰는 공주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온은 종종 시체를 되살리는 사술에 대한 고민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사술 자체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온은 어렵지 않게 여러 선례를 떠올렸다.

비슷한 저주나 술법은 역사상 얼마든지 있었다. 사교의 교주가 신도들을 끌어모을 때 사용하는 가장 전형적인 수법이기도 했다. 나타날 때마다 탄압받아 결국 사라졌지만.

온은 근처에 서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련된 책을 찾아보고 싶은데.

‘수도에 도착하면 황궁 서고를 좀 뒤져 봐야…….’

온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사고를 뚝 그쳤다.

황궁의 서고는 당연히 모두에게 개방되는 곳이 아니었다. 설령 개방되더라도 서고의 모든 곳에 다닐 자격은 오직 황제에게만 부여되었다.

5년 전 황태자 자리를 박탈당한 뒤로 온의 출입권은 훨씬 제한되었다.

가끔 그 사실을 본인도 잊었다. 태자로 살던 시절이 아니었던 시절보다 훨씬 길었으므로, 온은 때때로 이렇게 상념에 빠졌다가 철렁하는 마음으로 상기하곤 했다.

온은 억지로 마음을 추슬렀다. 그때, 온이 지키는 문 뒤에서 담백한 음성이 들렸다.

“제하야.”

“네, 마마!”

온은 어느 민가의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가 호위하고 감시하는 류하 공주는 이 민가에 묵는 중이었다.

대장군과 나란히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궁녀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공주의 낭랑한 부름이 이어졌다.

“잠깐 들어와 볼래? 네 도움이 필요해.”

“네, 마마.”

제하가 온을 곁눈질하자 온은 들어가도 좋다는 뜻으로 짧게 끄덕였다.

제하는 말없이 꾸벅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벼운 동작에도 불손한 기색이 팍팍 묻어났다.

‘하여튼, 저 궁녀도 참…….’

온은 내적으로 혀를 찼다. 공주부터 궁녀까지, 골치를 썩이지 않는 자가 하나도 없구나. 표정이 저렇게 투명하면 어쩌자는 거야?

제하는 명백하게 온을 싫어했다. 사적인 악감정은 아니었다. 핍박받는 약소국 사람이 무시무시한 강대국 장군에게 습관처럼 품는 반감이라고나 할까.

자신과 눈이라도 마주칠 때마다 얼음처럼 굳는 저 궁녀의 시선이 온은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제게 불쾌해할 자격조차 없음을 알았다.

다만, 조금 걱정스러웠다. 설마 황궁에 가서도 저러는 건 아니겠지? 그곳에서는 솔직함이 약점이 되고 기만이 방패가 되었다. 순수한 호의는 정치적 계산에 짓밟혔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울며 웃는 이들은 십중팔구 그곳에서 불행을 맞이했다.

‘……공주도 처음에 참 당황스러웠지.’

그대가 진짜 온 대장군이 맞느냐고 당돌하게 묻던 첫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바쳐진 신부 주제에, 숨죽여 지내며 제 안위를 도모할 것이지. 그렇게 자신을 지킬 것이지.

평생 별궁에만 살았다더니, 아직 궁의 살벌한 생리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해서일까. 어쩜 그리 무모하고, 경이롭고, 눈부신 걸까.

겹겹의 가식으로 자신을 감싸고 남을 속이는 일을 해 보지 않아서일까.

만약 황제의 후궁으로 살아가며 그런 것들이 당신의 몸에 배면, 당신도 남들과 같아질까.

첫날부터 온을 놀라게 했던 공주와, 상대방이 싫은 티를 너무 어설프게 감추는 궁녀까지. 공주를 만나고 나서 전부 새로운 일뿐이었다.

온은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문 너머 류하 공주를 생각하자 절로 떠오른 바보 같은 미소였다.

온은 자신의 입매가 웃음기로 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싸하게 굳었다.

미소는 떠오르자마자 지워졌고, 그는 차가운 자책에 휩싸였다.

‘미친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방 안에서 공주와 궁녀가 도란대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번졌다.

온은 제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도 없어, 그저 눈을 감았다.

어느새 깊어진 마음이 두려웠다.

여정이 중단되면서 방 안에서만 지내게 되자 류하는 극단적인 심심함을 느꼈다.

마차로 이동할 때는 창밖을 보는 재미라도 있었지, 지금은 가구밖에 관찰할 게 없었다.

‘팔자 좋게 산책하고 싶다고 할 수도 없고.’

군졸 또는 궁인과 마주쳐 피차 거북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좀 뻔뻔한 성격이긴 하지만, 굳이 뻔뻔한 성격이라고 자랑하고 다닐 이유는 없으니까.

‘그럼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류하는 자수를 떠올렸다. 실용적인 바느질 말고, 예쁘지만 쓸모없는 꽃무늬나 하염없이 새기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자수. 시간 보내기에는 최고였다.

‘그래, 수라도 놓고 있자.’

결국 류하는 궁녀에게 부탁해 실과 천과 바늘을 얻었고, 꽃과 새와 토끼 같은 일반적인 무늬를 수놓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충분한 휴식 끝에 이제 몸은 많이 회복되었고. 황제로 억지와 혼례를 치러야 할 순간도 미뤄졌고. 시체들이 공격하는 일은 다시 없었다. 평화로웠다.

불과 며칠 전에 사람들이 송장에 물어 뜯겨 다치거나 죽었는데 이렇게 안온해도 되나 싶을 만큼, 류하의 마음은 잔잔했다.

사람은 끝내 이렇게 익숙해지는구나. 누군가 죽거나 다치거나 비극을 겪어도, 살아남은 자들은 어느새 무뎌진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류하는 울음 끝에 꾸역꾸역 버텼다.

상실감 때문에 죽을 것처럼 아파도 실제로 죽지는 않았고, 숨은 계속 쉬어졌다.

산 사람은 그렇게 살아갔다. 어쩔 수 없나 봐.

“제하야.”

“네, 마마!”

“잠깐 들어와 볼래? 네 도움이 필요해.”

“네, 마마.”

자수 중에 물어볼 게 생겨서 류하는 궁녀를 불렀다. 이제 실을 골라야 하는데, 어떤 색이 가장 어울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하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류하는 고개를 들었고, 잠깐 벌어진 틈 너머로 대장군을 스쳐봤다. 어느새 익숙해진 윤곽. 나를 지키는 뒷모습.

‘제발, 뒤돌아서 내게 등이 아니 얼굴을 보여 봐.’

류하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그녀가 본인의 소원에 흠칫 놀라기도 전, 문이 닫혔다.

“공주마마, 어찌 부르셨습니까?”

“아아, 응. 네가 색 좀 골라 줄래? 이거랑 이거 중에서.”

“제, 제가요?”

“응, 네가 보기에 가장 어울리는 걸로 골라 줘.”

제하는 한낱 궁녀인 자신의 의견을 구하는 공주를 놀랍게 쳐다보았고, 류하는 진지하게 답변을 기다렸다. 제하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저는요, 아마 이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이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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