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리고 가윤아, 한 가지 더.”
사내는 이제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누가 봐도 애써서 꾸며낸 위태로운 미소였다. 가윤은 조용히 마주 보았다.
“언제까지 나한테 존대할 거야?”
파랗고 명랑한 눈에 간절함이 넘실댔다. 가윤이 허락만 한다면 곧장 폭포처럼 흘러넘칠 간절함이었다.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도깨비한테는 나이도 위계도 상관없다고.”
그러니 벽을 허물고 내게 다가와. 그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나를 응시하지 마. 사내는 속으로 간곡히 덧붙였고, 기다렸다.
“그리고 저도 누누이 말씀드렸지요. 어찌 생명의 은인에게 말을 낮추겠습니까.”
기다림의 결과는 늘 같았다. 그녀는 항상 그가 다가오는 만큼 멀어졌다.
“앞으로도 존대하겠습니다, 주안 님.”
이래서 사내는 늘 차라리 웃기를 택했다. 네 앞에서 솔직하게 상처받는 것보다는 나아서.
“그래, 맘대로 해.”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는 게 힘들었다.
“이제 슬슬 자리 뜨자.”
끝내 마음을 접고 목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으니, 감사하기로 여겼다.
“네, 주안 님.”
가윤은 꼬박꼬박 존칭을 덧붙이며 거리감에 쐐기를 박았다. 주안은 잠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감췄다.
공주도 대장군도, 인간도 도깨비도, 밤하늘의 침묵 아래 공평하게 묻혔다.
제3장. 예비 형수와 예비 시동생
아침이 왔다. 긴긴밤 끝에 찾아온 햇빛이었다. 지난밤은 영원처럼 늘어졌지만, 동시에 찰나처럼 짧게 느껴졌다.
류하와 온은 자신들의 몰골이 정확히 얼마나 추레한지 아침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옷에는 핏자국이 가득했고, 살갗에는 흙먼지가 잔뜩 눌어붙었다.
류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정돈하며 민망한 마음에 온의 시선을 피했다. 어제 잃어버린 너울의 존재가 괜히 아쉬워졌다.
‘짜증 나.’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심기가 불편했다. 온 앞에서 이런 엉망인 모습으로 있는 게 싫었다.
이런 상황에 자신의 외모가 대체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그래도, 괜히 거슬렸다.
애초에 무의식중에 온에게는 깔끔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부터가 위험 신호였다. 류하는 그 신호를 무시했다.
‘미치겠네.’
한편, 온은 류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류하 본인과 마찬가지로 류하의 외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뭇 달랐지만.
‘어떻게 저런 꼴로도…….’
온은 자신의 평가가 너무 위험해지기 전에 내적 탄식을 뚝 그쳤다. 적어도 그의 겉모습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했다.
“안기십시오.”
“네, 네?”
류하는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온은 공주를 향해 양팔을 뻗은 채 주춤했다.
“그게, 안기시라고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 그래. 그런 뜻이구나. 저 성실한 호위는 공주가 험한 산길을 두 발로 걸을 필요가 없도록 그녀를 양팔로 안아 들고 움직일 심산이었다.
류하의 얼굴이 미친 듯이 붉어졌다. 지금 그녀는 황제의 후궁이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쪽팔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온도 문득 새빨갛게 변색했다.
안기십시오. 제가 안아 드리겠습니다. 그게 어떤 음란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이해하고 나자, 극렬한 수치심이 그를 꿰뚫었다.
아, 내 사고방식은 썩었어. 나는 쓰레기야. 두 사람은 동시에 똑같이 자책했다.
“그, 제 말뜻은, 걷기 힘드실까 봐…….”
“아아, 네, 물론이죠. 고맙습니다.”
어제 온이 류하를 감싸고 구른 덕에 심한 부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류하의 몸은 여전히 군데군데 격하게 쑤셨다.
어릴 적부터 무예를 단련하고 지난 몇 년간 전장에서 구른 온과 달리, 류하는 신체적으로 꽤 연약한 편이었다. 별궁에 유폐된 삶이 딱히 강인함을 요구하지는 않으니.
온은 그 사실을 알아봤다. 어제에 이어 공주가 또 무리한다면 두 번째로 기절이라도 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그녀를 안고 이동하겠다고 권한 것뿐이었다. 정말이야.
“어, 음, 그럼. 부탁합니다.”
류하는 혼탁하게 중얼대며 쭈뼛쭈뼛 다가왔다. 온은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한쪽 팔로 류하의 어깨를 감쌌고, 나머지 팔로 류하의 다리를 받쳤다.
그의 품에 담긴 그녀는 몹시 말랑하고 따스했다. 온은 그 감촉과 온기에 너무 집중하지 않으려 애썼다.
“공주마마, 제 목에 팔을 두르셔야 합니다.”
“네?”
“제 목에 팔을 두르시라고요. 안 그러면 떨어지십니다.”
온은 음침하게 재촉했다. 류하는 뜨악한 표정으로 온의 목에 뻣뻣하게 팔을 둘렀다.
류하의 의복은 소매가 길었다. 그러니 온의 목덜미에 닿은 건 류하의 옷이었지, 그녀의 맨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너무 뜨거웠다.
공주와 대장군은 침묵하며 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장군만 걸었고, 공주는 매우 불편하게 그에게 매달려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대장군님!”
“하, 진짜, 우리가 얼마나…….”
류하의 소원은 곧 이루어졌다. 한데, 막상 소원이 성취되자 류하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아쉬움이라니, 말도 안 돼.’
류하는 본인의 속마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온의 부하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온의 예측대로 그들은 아침까지 겨우 기다렸다가, 날이 밝자마자 한 쌍의 실종자를 찾아 산속을 뒤지던 참이었다.
“여기, 공주마마를 모셔라.”
부하들을 발견한 온의 첫마디였다. 서로 막 생사를 확인한 사이치고는 퍽 매정하다고 류하는 생각했다. 병사들도 같은 마음인지, 안도와 섭섭함이 섞인 말투로 따졌다.
“대장군님,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
“나는 괜찮고, 공주마마부터.”
온의 무뚝뚝한 명령조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대장군의 냉정함은 익숙해도 신경질적인 모습은 생경한 병사들은 저마다 조금씩 주춤했다.
류하도 내심 당황했다. 온의 말투만 듣자면, 마치 그가 부하들의 안위나 본인의 상태보다 그녀의 안정을 걱정하는 듯했다.
곱씹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충직한 호위니까. 유능한 부하니까.
그는 황명을 받고 형의 후궁 후보를 보호하는 중이니, 그가 류하에 대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배려는 자연스러웠다. 이상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한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왜 이리도 불행할까. 묵직한 불행감이 류하를 옥죄었다. 이거야말로 당연하지 않았고, 부자연스러웠고, 너무나 이상했다.
“네, 모시겠습니다.”
혼란스럽고 살짝 상처받은 와중에도 병사들은 즉각 복종했다. 온은 류하를 땅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류하는 살짝 비틀댔고, 온은 곧바로 손을 뻗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듯 지탱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류하는 휘국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그러면서 폐부에 새카맣게 고인 터무니없는 원망을 도려내려 애썼다.
왜 나를 내려놨어? 왜 나를 끝까지 안고 가지 않아? 온은 부하들을 발견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류하를 넘겼다. 아까는 걷지도 못 하게 했으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불만이 너무 유치해서, 류하는 진저리를 치며 솔직한 마음을 외면했다. 때로는 솔직함보다 자기기만이 덜 괴로웠다.
“공주마마!”
비명 같은 부름이 들렸다. 류하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안도했다. 제하였다.
병사들은 온의 기대에 넉넉히 부응했다. 그들은 산속에서 그나마 평평한 지대를 찾아 천막을 치고 부상자들을 지키며 시신을 보호했다.
어제 그나마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궁인들은 지치고 창백한 얼굴로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제하는 멀리서부터 류하를 알아보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제하야.”
류하는 반갑게 속삭였다. 아, 그새 나도 모르게 저 아이한테 꽤 정을 붙였나 보다. 비교적 말짱한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쁜지.
마음 같아선 자기도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씩씩하게 맞이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정말로 몸에 힘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자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물론, 단지 긴장이 풀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제 그녀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술을 부렸다가 피를 토하고 기절한 뒤, 왠지 모르게 자신을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사내와 밤을 꼴딱 지새웠다.
비록 천덕꾸러기였어도 신체적으로는 곱게 자란 공주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들이었다. 게다가, 가장 버거운 건 따로 있었다.
시선. 또 시선. 어김없이 시선.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괴물 보듯이. 낯설어하며. 반감과 공포가 섞인 호기심으로.
그나마 그녀를 전과 다름없는 눈빛으로 보는 이들은 제하를 비롯한 몇몇 월국 궁인뿐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온 역시.
그러나 류하는 지금 온을 등지고 있었기에, 그의 시선이 어제처럼 덤덤한 듯 다정한지 알 수 없었다.
“마마,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제하가 애타게 탄식했다. 류하의 눈빛이 묘해졌다. 무사해? 내가 무사하다고?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류하는 나직하게 말했다. 차마 웃어 줄 수 없었다. 그러기엔 시선이, 시선이, 극소수를 제외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역병처럼 지겨웠다.
온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함께 보낸 밤의 끝에, 예비 형수와 예비 시동생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류하는 천막을 배정받았다. 제하가 류하를 시중들었다.
류하는 궁녀가 대령한 온수로 얼굴과 손발을 간단히 씻었다. 당장 제대로 목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일단 세수로 만족해야 했다.
“제하야.”
“네, 공주마마.”
“너, 나 안 무섭니?”
제하가 건네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던 류하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무디게 툭 뱉은 질문이었다. 빙빙 돌려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제 내가 어떤 식으로 그 징그러운 것들을 처치했다고 생각해?”
시선, 시선, 시선. 류하는 전과 다른 의미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씀드리면 거짓입니다만. 어제 그 시체들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니 공주마마께 백 번을 감사해도 모자랍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솔직해. 류하는 거의 감탄하며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