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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20)화 (20/123)

20화

당분간 둘 다 조용했다. 화염은 잔잔히 불탔고, 주변에는 그윽한 어둠이 고였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은 숲에 가로막혀 땅에 닿지 못했다.

온은 본인의 솔직한 심정을 억누르느라 바빴다. 그의 머릿속에는 류하의 첫사랑에 관한 온갖 질문이 맴돌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한편, 류하의 뇌리도 시끄러웠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첫사랑에 관한 생각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누구지?’

류하는 망자들을 떠올렸다.

‘대체 누가 시체들을 조종한 거야?’

아까 산길에서 목숨을 걸었을 때, 류하는 분명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아니, 그건 분명 이질적이면서도 그리운 기운이었다. 그립다니. 정확히 무슨 기운인지도 모르면서.

‘절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어.’

땅속에 파묻혀 반쯤 썩은 송장들이 군대처럼 일어났는데, 자연스러운 현상일 리가.

‘애초에 시체를 그곳에 매장한 건 제국의 군대라 쳐도, 그것들을 저딴 식으로 되살려 활용한 이는…….’

누굴까? 대체 누구지?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잡히기만 해 봐.’

공주의 눈빛은 서늘했다.

‘죽여 버릴 거야, 진짜.’

류하는 소중한 이의 죽음을 기억했다. 나와 함께 숱한 순간을 웃고 울고 떠들며 견뎌 온 이의 종말을, 그 차가운 결별을.

식어 버린 시신을 붙들고 그리워하며 간신히 견뎌 낸 헤어짐이다. 참으로 지독한 슬픔이었다.

단언컨대, 그런 슬픔을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이라면 감히 시체를 헤집어 망자를 모욕하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을 벌여서 얻는 게 뭔데?’

황제의 후궁 후보와 한 줌의 군졸들과 궁인들, 그들을 해쳐서 대체 무엇을 얻었는데? 무엇을 이루었어? 대단한 정치적 결과도, 엄청난 경제적 이득도 없었는데.

류하의 눈빛은 이제 서늘하기보다 서글펐다. 그녀의 마음에 죄악감이 스몄다.

‘미안해요.’

한때 누군가의 소중한 이였을 당신들을 그런 식으로 찢고 태워서 미안해요.

나 역시 망자를 모욕했어. 살기 위해 그러했어.

죽은 이를 향한 나의 극악한 무례가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는 나와, 내 맞은편에 묵묵히 앉아 있는 저 사내를 지켰어.

류하는 시선을 들었다. 별처럼 푸른 모닥불 너머로 남자의 고요한 윤곽이 보였다. 온은 류하의 눈길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류하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피곤하시면 주무셔도 됩니다.”

온이 타일렀다. 류하는 그의 얼굴을 빠끔히 훔쳐봤다.

“제대로 누울 수 없으니 불편하시겠지만, 눈을 조금이라도 붙이시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온의 태도는 다시 덤덤한 듯 다정했다. 류하는 온을 우울하게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야 털어놓지만, 내가 잠들면 이 불도 꺼집니다. 그러니까 나는 잘 수 없어요.”

도깨비불을 피운 자의 의식이 끊기면 불꽃 역시 바로 꺼진다.

자기 힘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아까는 대충 둘러댔지만, 이쯤 되자 그냥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불이 꺼지면 제가 다시 지피면 됩니다. 전장에 있을 때 야영을 많이 해 봤거든요.”

온의 자백은 뜻밖이었다. 그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류하는 이제 황당해했다.

“아니, 그런데 왜 아까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게,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온은 절절매며 변명했다. 아까부터 연달아 압축적으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자신의 불 피우는 재주를 고백할 틈을 놓쳤다.

류하가 고작 손짓 한 번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데 정신이 팔려 막상 다른 방식으로 불을 피울 생각을 못 했다. 실제로 여태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고.

류하는 이제 억울한 눈빛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불을 밝힐 방법이 있었다면 절대 이 시퍼런 화염을 전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참, 빨리도 말해 주네요.”

“송구합니다. 이제라도 제가 불을 지펴 볼 테니 마마께서는 조금 쉬십시오.”

“……됐어요. 기왕 지핀 거 계속 둘게요. 어차피 잘 생각도 없습니다.”

만약 온이 자신을 괴물 보듯 보거나 계속해서 낯설게 대했다면 곧장 불을 껐을 텐데, 류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보석을 녹여 만든 것처럼 새파란 불꽃이 내리 그 신묘한 색으로 타오르게 두었다. 온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

결국, 화염은 밤새도록 불탔다. 마침내 새벽이 밝을 때까지.

두 남녀는 대체로 잠잠했다. 졸거나 잠든 사람은 없었다. 시선은 때로 스쳤다가, 때로는 어긋났다. 아주 가끔 몇 마디가 오갔다. 예컨대.

“월국의 겨울에는 정말로 눈이 내리지 않나요?”

“네. 태어나서 눈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휘국에서는 여인들도 승마를 배운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휘국에서 승마는 남녀와 상관없이 필수 소양입니다. 적어도 귀족들에게는요.”

그러다 다시 조용해졌다.

그들이 함께 보낸 첫 번째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서로 닿지도 않은 채, 그러나 분명 나란히 공존하며.

같은 밤하늘 아래 깨어 있는 자들이 더 있었다.

사내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으깨진 살점을 유심히 살폈다. 관찰을 마친 그가 한숨과 함께 일어섰다.

“태우고, 찢고, 별걸 다 했네.”

별빛이 묵묵히 내려다보는 골짜기에 살아 있는 자는 단둘이었다. 사내 하나, 여인 하나.

여인은 무심한 눈으로 주변의 참상을 둘러보았다.

“호위병 중에 주술사가 있었습니까?”

여인이 덤덤히 물었다. 침착한 무표정이 비애를 감췄다. 비록 실험 삼아 시체를 되살리는 일에 동조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애도하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호위병 아니고 공주 본인. 그리고 주술사가 아니었어.”

사내는 낭랑하게 대답했다.

여인의 부탁을 받아 직접 시체를 인형으로 바꾼 사내는 보석처럼 눈이 새파랬고, 귀 끝은 뾰족했다. 그것 외에는 생김새가 인간과 같았다.

“공주는 타고난 거야.”

비록 반쪽짜리긴 하지만, 어쨌든 동족이더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하필 상대가 휘국의 후궁으로 팔려 가는 신세라 반가워도 아는 체를 할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휘국 황제가 재미있는 신부를 들였네.”

사내는 해맑게 키득 웃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복수였는데, 이제는 흥미까지 더해졌다.

“왜요, 까다로운 상대인가요?”

“아니, 약해빠졌어. 신통력으로만 따지면 형편없어.”

여인이 질문하자 사내는 단숨에 반박했다. 반쪽짜리 동족의 위협성에 대한 꽤 야멸찬 평가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힘 자체는 대단한데 제대로 쓰질 못하잖아. 남들은 구해 놓고 정작 본인은 탈진해서 쓰러지면 어쩌자는 거야? 그 사람들이 고마워하지도 않을 텐데.”

서로 사이좋게 지내던 대전쟁 이전이면 모를까, 인간이 도깨비의 힘을 보고 반가워할 가능성은 낮았다. 애초에 웬만한 도깨비의 힘을 알아볼지도 의문이었고.

“그런데 왜요?”

여인은 건조하게 물었다. 강하지도 않은데 변수가 되나?

재미있고 자시고, 어차피 힘없는 후궁은 복수에서 논외였다. 굳이 구하려 하지도 않을 거지만, 굳이 대적할 이유도 없었다.

“공주도 도깨비 피가 섞인 것 같아. 그리고 요즘은 도깨비 피가 귀하거든. 별로 해치고 싶지 않아. 그런데 계속 가다간 해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네.”

황제의 귀에도 분명 공주의 이능에 관한 소식이 들어갈 텐데, 그 영악한 인간이 과연 공주를 유용하게 써먹을 기회를 마다할까? 공주가 병기로 활용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너랑 한 약속이 먼저니까.”

사내는 명랑하게 웃으며 여인을 향해 돌아섰다. 여인은 담담히 맞바라보았다.

그 귀하디귀한 동족보다도 자신의 복수를 더 중히 여겨 주겠다는 당신의 말이 나를 얼마나 벅차게 하는지, 일단은 비밀로 감췄다.

“그나저나, 가윤. 괜찮아?”

사내는 유쾌한 기색을 거두며 여인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가윤이라 불린 여인은 묵묵히 눈빛으로만 되물었다. 무슨 뜻이냐고. 그리고 사내는 어차피 알아들었다.

“네가 원해서 하기는 했는데, 나는 아직도 너 걱정돼. 네 원한 풀겠답시고 다른 인간들 시체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거, 앞으로도 괜찮겠냐고.”

가윤은 시선을 내렸다. 사내는 가윤의 턱을 붙잡고 저 시선을 제게로 당기고 싶었지만, 그녀에겐 함부로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남몰래 꾹 참았다.

“……이들에게 미안하지 않습니다. 전부 황제의 군대가 억울하게 죽인 자들이니까요.”

가윤이 마침내 나직하게 고백했다. 사내의 얼굴에는 이제 웃음기의 흔적조차 없었다. 가윤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과 푸른색이 만났다.

“만약 제가 같은 방식으로 비명횡사했다면 죽어서라도 제국 연놈의 살점을 뜯어먹고 가는 걸 기쁨으로 여길 겁니다.”

가윤의 시선과 음성에는 홧홧한 열기가 있었다. 냉정한 표면에 내리눌려 안으로만 응축된 열기였다.

언젠가 그 열기가 폭발해 가윤 혼자 다칠까 봐 사내는 걱정했다.

그러나 자신이 걱정해 봤자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그녀 때문에, 그는 오늘도 억지로 무수한 언어를 되삼켰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가윤은 냉담하게 선을 그었다. 사내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괜찮아야 했기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가윤은 소중한 이의 죽음을 기억했다. 나와 함께 숱한 순간을 웃고 울고 떠들며 견뎌 온 이의 종말을, 그 차가운 결별을.

식어 버린 시신을 붙들고 그리워하며 간신히 견뎌 낸 헤어짐이다. 참으로 지독한 슬픔이었다.

그런 슬픔을 겪어 봤기에 진심으로 생각했다. 혼백이 떠나 버린 몸뚱이가 대체 무슨 소용이야? 내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데. 그리워해도 안아 주지 않는데.

만약 내가 내 가족과 똑같이 처참하게 죽는다면, 누군가 내 시체를 되살려 멋대로 헤집어서라도 원수를 갚아 줬으면 좋겠어.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망자에 대한 모욕이라. 참 부질없는 비난이라고 가윤은 믿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야. 죽으면 어차피 같을 수 없어.

내가 알고 아끼고 의지하던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기에, 썩어가는 육체 따위 내게 소중할 수 있을 리 없어.

“뭐, 이번에도 네 말을 믿을게.”

사내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말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네 뜻과 상관없이 네게 가장 이로운 선택이 뭔지 억지로 분석하고 넘겨짚지 않을게. 네 말 한마디로 됐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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