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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9)화 (19/123)

19화

“그런데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밤새도록 여기서 기다려야 해요?”

류하가 불쑥 물었다. 자신의 이능과 도주 가능성에 대한 까다로운 얘기를 해치우고 나자, 그제야 다른 것들에 대해 걱정할 여유가 생겼다.

“아마 그게 최선일 겁니다. 꽤 멀리 추락한 것 같은데, 어두운 산길을 헤매는 것보다는 아침까지 버티는 게 낫습니다.”

물론, 류하가 원한다면 당장 효과적인 횃불을 만들어 길을 밝히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온도, 류하도 암묵적 합의에 따라 그 방법은 언급조차 삼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궁인들은…….”

류하는 퍼뜩 겁먹었다. 무장한 군졸들보다는 힘없는 궁인들, 특히 월국의 사람들이 걱정됐다. 제하의 얼굴이 머릿속을 채웠다.

“아까 마마의 일격이 시체 떼를 해치웠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전부 유능한 병사들입니다. 뒷수습 정도는 충분히 알아서 잘할 겁니다.”

온이 류하를 달랬다. 류하는 별로 안심하지 못했다.

뒷수습이라 하면 아마, 시체를 거두고 부상자를 돌보는 일일 것이다. 사상자를 생각하자 명치끝이 콱 조였다.

“아마 그쪽에서도 저와 마마를 찾으러 아침에나 움직일 겁니다. 밤에 함부로 산을 타다간 부상자만 늘어날 수 있다는 건 그들도 알 테니까요. 그러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어차피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별로 없습니다.”

온의 중저음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고, 그의 말투는 또렷하며 망설임이 없었다. 군대 지휘관의 명료한 화법과 황태자 시절의 매끄러운 웅변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류하는 온의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 서서히 침착해졌다. 온의 말마따나,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류하는 다소 몽롱한 체념에 사로잡혔다. 비밀을 들켜 버렸고, 더는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이 사내와 묵묵히 마주 앉아 아침을 기다리는 것뿐.

하여, 그녀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기다림 자체가 점점 불편해졌다.

“그러니 그동안 잠시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저는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저 사내 때문에 불편했다. 쓸데없이 차분하고 쓸데없이 정중하며 쓸데없이 가까이 앉아 있는 저 사내.

류하는 온의 반응이 혼란스러웠다. 아까 자신을 낯선 사람 보듯 보던 것과 살짝 화내는 어투로 말했던 걸 제외하면, 자신을 향한 그의 태도가 너무 한결같았다.

내가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냈잖아. 게다가 그대 나라의 황제를, 그대의 친형을 속였어.

그런 나를 그 어느 때보다도 꺼리지 못할망정, 어째서 그대는, 변함없이 덤덤한 듯 다정할까.

“내가 지금 잠이 오게 생겼습니까?”

그 다정함이 거북해서, 어쩐지 두려워서, 류하는 괜히 구시렁댔다.

“외간 사내와 단둘이 남은 자리에서 잠들다니요. 게다가 이렇게 열악한 곳에서.”

뜻밖의 생트집에 온은 눈썹을 치켰다. 그가 뚱하게 받아쳤다.

“외간 사내가 아닌 마마의 호위이자 곧 가족 될 분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놈의 가족 타령. 류하는 심사가 한층 꼬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저 사내가 얄미웠고, 야속했다.

이대로 자신이 꼼짝없이 황제와 혼인한다면 온의 인척이 될 거라는 사실을 당사자의 입으로 확인받는 게 참 싫었다.

“뭐, 어쨌든. 별로 잠이 올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우리 대화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대화요?”

“네, 대화요. 그대가 먼저 아무거나 얘기해 보세요.”

거참, 까다로운 공주였다. 이제는 다짜고짜 대화 소재를 요구하는 류하 앞에서 온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뭐든지요. 그대의 고국이 궁금합니다.”

곧 나의 감옥이 될 곳이니까. 류하는 쓰린 뒷말을 되삼켰다. 그녀는 이제 완벽하게 체념했다. 그녀는 기어코 휘국에 갈 운명이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앞으로 내가 살게 될 곳인데, 부끄럽게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부디 그대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복자매를 대신해 제물로 바쳐진 천덕꾸러기 공주는 배움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월국 왕은 류하를 휘국 황실에 시집보내면서 그 나라에 대해 상세하게 교육하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공주의 호위이자 예비 시동생인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그녀의 스승까지 되게 생긴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곧, 진지하게 운을 뗐다.

“휘국에는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미신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류하는 호기심을 느꼈다.

“실제로 주변에 단풍잎을 잡아서 첫사랑이 이루어진 사람이 있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물어본 적이 없어서요.”

뭐야, 재미없어. 류하의 흥미는 빠르게 식었다. 온은 공주의 불퉁한 표정을 보고 조금 난감해졌다.

“말씀드렸다시피, 어차피 미신에 불과합니다. 고작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잡았다고 첫사랑이 이루어질 리 없잖습니까.”

“그대는 정말 낭만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군요.”

류하는 통탄했다. 온은 그 노골적인 비난에 마음이 상했다. 이제는 그도 다소 불퉁해져서 꿋꿋이 받아쳤다.

“만약 진정 사랑을 이루고자 한다면 상대방을 향한 헌신과 배려로 그럴 생각을 해야지, 고작 낙엽 한 장에 의존하면 어떡합니까? 떨어지는 단풍잎을 잡으려 할 만큼 간절한 마음이 사랑을 이루는 거지, 그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을 리는 없지요.”

정말 지나치게 자기다운 분석이었다. 류하는 내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이번에는 꽤 사적인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대도 단풍잎을 잡으려 할 만큼 간절했던 적이 있나요? 첫사랑을 이루기 위해?”

온은 입을 다물었다. 류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기다렸다. 남의 연애담만큼 재밌는 화제가 없다는 게 동서고금의 공통된 진리였다.

동시에, 류하는 조금 무서웠다. 온의 첫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게. 그가 과거에 누군가를 연모했다는 사실을 그의 입으로 듣는 게.

“……없습니다, 그런 거.”

온이 중얼거렸다. 민망한 탓인지, 얼굴에 옅은 홍조가 돌았다. 류하는 당황했다.

“없어요?”

여태 누군가를 좋아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무려 스물두 살에?

물론, 류하도 올해 스무 살이나 먹고서도 변변찮은 연애담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적어도 과거에 황태자 온은 한평생 갇혀 살지는 않았다.

“없습니다.”

온이 거듭 말했다. 그의 얼굴은 계속해서 붉었다. 선연한 도깨비불 너머 류하는 온의 혈색이 똑똑히 보였다. 저 말간 복숭아색이, 너무나도 곱게.

불현듯 류하의 얼굴에도 열이 몰렸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호, 혼담이 오간 사람도 여태 없었습니까? 그대 나이면 혼인도 먼 얘기는 아닐 텐데요.”

류하는 본인의 쾅쾅 날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온의 홍조를 망각하고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런데, 막상 그러고 나서 후회했다. 혼담이라니. 혼인이라니. 다른 이의 남편이 되는 휘온이라니. 숨이 막혔다.

“혼담이야 몇 번 있었습니다. 제가 태…….”

온은 무심코 대답하다가, 그쳤다. 그의 뺨에서 홍조가 확 가셨다.

류하는 돌연히 핏기를 잃은 온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뭐가 문제인지 문득 깨닫고 가쁜 숨을 삼켰다.

“아.”

바보 월류하. 평생 별궁에 갇혀 외부와 거의 단절된 삶을 산 대가로, 그녀는 가끔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류하는 온이 원래 황태자였다는 사실을 가끔 잊었다. 휘국의 황제가 어떤 방식으로 즉위했는지 들어서 알고는 있으나, 워낙 어렴풋이만 접했기에 때로는 기억이 흐려졌다.

당연히 혼담이야 오갔겠지. 태자 시절에 태자비를 들이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니, 온이 아직 소년일 때 무수한 명문가 여식이 그의 신부 후보에 올랐으리라.

더는 함부로 지껄여선 안 될 문제였다. 가볍게 언급할 만한 과거가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류하는 끝내 웅얼웅얼 사죄했다. 온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당신은요?”

온이 갑자기 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 모닥불만 바라보던 류하는 소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네?”

“마마께서는 첫사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감히 여쭈어도 될까요?”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살려 보려는 나름의 발악이었다. 한데, 온은 질문을 입에 담자마자 후회했다.

‘첫사랑?’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공주마마의 첫사랑이라. 공주마마의, 첫사랑. 그분이 과거에 좋아하신, 어쩌면 연모했을 미지의 사람.

꿈틀거림이 심해졌다. 온은 애써 외면했다.

“나요?”

류하는 멍하니 되물었다. 첫사랑이라니, 내내 별궁에만 있던 내게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뭐, 있기는 있습니다만. 딱히 지금 그대와 얘기하고 싶지는 않군요.”

있긴 있지, 첫사랑. 내가 옛날에 즐겨 읽던 염정 소설의 남자 주인공. 한동안 그 사람 때문에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이미 다 지난 일이니, 어차피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자신이 구태여 온을 속였는지 류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허언에 가까웠다. 소설 주인공을 첫사랑으로 포장하다니.

그냥, 자신이 얼마나 쓸쓸하고 볼품없는 삶을 견뎌 왔는지 온이 너무 자세하게 알지 못했으면 했다.

그래도 첫사랑쯤은 가능했던 삶을 살았구나, 그가 그렇게 오해해 줬으면 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알았지만, 무의식중에 애타게 외면했던 걸지도 모른다.

온에게는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값싼 동정을 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저렴한 연민과 저열한 조롱은 참을 수 있어도, 이 사람만큼은 제게 그럴 여지조차 없었으면 했다.

그때도 온은 류하에게 유일했고, 특별했다. 류하 본인이 차마 인정하지 못한 그때도.

“그렇겠지요. 억지로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온은 부드럽게 수긍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공주가 과거의 연정에 대해 털어놓기를 거부한다면, 자신은 그분의 침묵을 존중하리라.

형님이자 주군의 여인 될 자의 과거를 캐물을 자격 따위 제게 없으므로.

마음이 다시 소란스레 요동쳤다. 온은 본인의 진심을 향해 눈과 귀를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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