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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8)화 (18/123)

18화

“제가 모닥불 피우는 법을 몰라서요.”

류하는 구태여 변명했다. 온은 푸른 불꽃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류하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상 빛이 생겨 온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지금,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주술은 언제 익히신 겁니까?”

불꽃을 지켜보던 온이 문득 물었다. 류하는 마지못해 그를 돌아보았다. 온은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뒤얽혔다.

“따로 익힌 적 없습니다. 내게 왜 이런 힘이 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류하는 반만 진실을 말했다. 첫 문장만 사실이었다. 두 번째 문장은 거짓에 가까웠다.

“혹시 마마의 외친 중에 신통력을 타고난 자가 있었습니까?”

질문이 이어졌다. 온은 왕의 딸로 알려진 류하가 부친으로부터 힘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고 외가 친척들에게만 관심을 가졌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글쎄요. 내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알다시피 미천한 외가를 두었기에, 애초에 그 집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거든요.”

이번에도 류하는 대충 참과 거짓을 얼버무렸다.

류하의 어머니는 거의 평민이나 다름없는 몰락 귀족의 딸로, 생계를 위해 상궁으로 입궐했다가 빼어난 용모로 왕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

이때 그녀의 친정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병들거나, 도망친 뒤였다. 류하는 그들을 알지 못했다.

어차피 류하의 외가에 대해 캐묻는 건 무의미했다. 제게 왜 이런 힘이 있는지 모른다는 류하의 변명은 부정직했으니.

‘절대 알려지면 안 돼. 이것만큼은, 절대.’

왕의 딸이라서 왕족 대접을 받는 그녀가 사실은 왕의 딸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그녀는 밑바닥에 처박히리라.

‘아마 그때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지.’

류하는 암울하게 판단했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거에 비하면, 지금 이능을 들킨 건 차라리 귀여운 축에 속한다고.

소국의 공주라는 신분으로도 이미 제국 군졸들과 궁인들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데, 알고 보니 공주도 아니었다? 황제를 속인 채로 그에게 시집가려 했다? 알려지는 순간 사형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류하가 왕의 딸이라는 대전제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다른 사람들이 굳이 의심하지도 않는다는 것.

온 역시 류하의 모친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신통한 피를 타고났다고 추측해 볼 뿐, 류하의 아비가 다른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온이 알기로, 또한 다른 모든 이들이 알기로 월국 왕실의 혈통은 신통력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주는 국왕을 통해 힘을 물려받은 게 아니다. 분명 모친의 유전일 거야.

‘공주가 실은 왕의 친딸이 아니라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별궁에 유폐되어 지낸 거라는 소문이 있기도 했지만…….’

말도 안 돼. 왕녀가 왕의 딸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온은 자신이 예전에 월국의 ‘저주받은 공주’에 대해 주워들었던 낭설 한 조각을 떠올렸다가, 곧장 내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끝내 헛소문으로 판정되어 자취를 감췄지. 사실이었다면 공주가 아직 살아 있었겠어? 정말로 헛소문일 뿐이야.’

왕의 후궁이면서 다른 이와 간통해 딸까지 낳은 여인과 그 여인의 핏줄을 살려 둘 리가 없지.

결국 무근거한 모함으로 밝혀져서 공주와 공주의 어미가 그나마 살아남은 거였다.

‘그러니까, 공주가 따로 주술을 익힌 적이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외가를 통해 신통력을 물려받았다는 건데.’

온은 류하를 유심히 살폈다. 어느새 골똘해진 그는 류하를 똑바로 보는 게 왠지 모르게 괴롭다는 사실도 잠시 잊었다.

‘모친이 도깨비 혼혈이라도 되나?’

생각이 이어졌다. 아까 류하가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같은 색의 불꽃을 조종하는 걸 보고 온은 딱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도깨비불. 도깨비불을 닮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긴 하지. 도깨비가 인간들 사이에서 자취를 감춘 지 벌써 수십 년째야.’

도깨비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종족이 요즘 인간과 도통 섞이지를 않았다. 몇 세대 전 종족 간에 크게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이종족을 향한 배타심이 더욱 심해진 탓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아.’

가설이 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동시에, 가설이 틀렸다는 증거도 없었다.

‘오히려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더더욱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피가 섞였을 수도 있어.’

다들 터무니없는 생각이라 여기며 의심조차 하지 않는 일일수록, 오히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날 수 있었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인간에게 접근한 도깨비가 있었다면. 그 도깨비의 자식이 류하의 모친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류하의 도술을 나름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로써 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류하의 비밀에 거의 정확하게 근접했다.

하지만 그 역시, 왕녀의 아비가 왕일 거라는 당연한 대전제는 버리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바빴다. 갑자기 저들을 덮친 시체 떼. 목숨을 잃은 군졸들과 궁인들. 공주의 기이한 힘.

그리고 바로 그 공주에 대해, 온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왜 도망치지 않으십니까?”

온은 뭉툭하게 물었다. 이번에도 그의 시선은 류하를 똑바로 향했다. 류하는 멍해졌다.

“뭐라고요?”

그녀는 정녕 헷갈려서 반문했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온은 여전히 그녀를 직시하며 질문을 반복했다.

“도망치고 싶으셨던 거 아닙니까? 저였다면 진즉 시도했을 것 같은데요.”

지금껏 류하가 딱히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

물론 속으로 부단히 고민하긴 했지만, 그 사실을 온은 미처 몰랐다.

다만 그는 자신이 공주를 만났던 첫 번째 날에 그녀가 정녕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 정도로 이 혼인을 꺼렸으면서, 왜…….’

객관적으로 봐도 꺼릴 이유가 차고 넘치는 혼인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심지어 공주의 본국에서 폭군으로 소문난 남의 나라 황제에게 팔려 가는 일이었으니.

“당신의 의사라고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혼사잖아요.”

류하가 그저 평범하게 무력한 약소국의 왕녀였다면 그녀의 체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불을 지르고 땅을 부수는 기이하고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힘을 알아낸 지금, 온은 오히려 류하의 얌전한 동행이 수상쩍게 여겨졌다.

“왜 도망치지 않으십니까? 이제 보니 수단은 충분한 것 같은데. 기회도 분명히 있고요. 바로 지금 같은 때가 기회 아닙니까? 그런데, 왜.”

힘을 과하게 쓰고 나서 각혈하며 기절한 걸 보니 한계가 분명히 보이긴 했지만, 아까 보여 준 살벌한 위용의 일부만으로도 자기 한 몸 어떻게든 빼돌릴 수는 있을 텐데.

진심으로 궁금했다. 공주의 생각이, 그녀의 동기가. 그녀가 어떤 마음과 사고방식으로 움직이며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이 힘을 원한 적 없습니다. 정확히 어떤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써야 할지, 얼마나 써야 안전한지 굳이 시험해 본 적도 없고요.”

류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온은 집중해서 들었다. 류하는 말을 이었고, 그러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도망칠 생각 없어요, 대장군. 이런 힘에 의존해서는, 더더욱.”

이것도 참과 거짓의 혼합이었다. 원래는 도망칠 생각이 가득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글쎄.

여태 다양한 이유로 망설이느라 숱한 기회를 놓친 건 류하 본인이었다. 그러니 그 책임도 마땅히 본인이 져야 하리라.

저잣거리를 지날 때, 탁 트인 들판에서 야영할 때, 온천에서 목욕할 때, 전부 기회가 있었다. 땅을 흔들고 불꽃을 피워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류하는 그러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또한 어머니의 유언이 있어서 여태 구석진 별궁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다. 이능의 조절을 연습한 적도, 그 한계를 시험해 본 적도 없었다.

일단 도망치고 나면 나중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을 지키는 데 힘을 쓸 수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도망치는 과정 자체에 불안정한 능력을 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장군을 꾀려 했다. 사람의 힘을 빌려 도망치려고.

정 상황이 절박하면 이능을 쓸 생각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보루였지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다.

때로는 퍽 무모하고 충동적인 공주도 실은 영리하며 신중하게 굴 줄 알았다. 그 신중함이 자기 자신의 족쇄가 되었다.

“그러니까 나를 의심할 필요 없습니다.”

류하는 지친 목소리로 타일렀다. 힘을 들킨 이상, 끝났다.

그녀가 단순히 약소국 출신 예비 후궁이 아닌 자칫하면 제국에 위협을 가할지도 모를 주술사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휘국 황실은 눈에 불을 켜고 그녀를 주시할 터.

오늘 이전에 류하가 도주에 성공했다면, 황제가 화내고 여러 사람이 곤란해지는 것과 별개로 그 누구에게도 심각한 타격은 없었으리라.

월국 왕은 류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딸이 실종됐다며 혼비백산하지 않을 테고.

휘국 황제도 개인적으로는 류하의 손실을 통탄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후궁이 여섯이나 있는 그에게 월국의 공주는 그저 혹시 모를 보험 같은 존재였다.

황제에게 류하의 존재감이 그토록 가벼우니, 류하를 놓친 이들도 대단한 처벌을 받을 확률은 낮았다. 당연히 책임은 물어야겠지만, 다른 죄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 류하의 위치가 달라졌다. 전혀 달가운 변화는 아니었다.

‘못 하겠어…….’

불과 며칠 전, 류하는 자신의 도주가 휘국과 월국의 외교적 충돌로 이어질까 봐 걱정했다.

또한, 자기가 도망친다면 곤란해질 대장군 휘온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걱정과 죄책감이 이제는 배가되었다. 제법 뻔뻔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결코 모질지 못한 공주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발이 묶였다.

주술사인 내가 기어코 도망친다면, 나를 놓친 죄로 고초를 당할 군졸들과 궁인들.

또한, 휘국 황제가 나를 핑계 삼아 월국을 정벌하기라도 한다면, 죄 없이 죽어 나갈 백성들.

‘……못 해.’

그리고, 대장군 온.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 때문에.

“의심한 적 없습니다.”

류하의 가장 큰 족쇄가 말했다. 류하는 부드러운 숨소리를 흘렸다. 헛웃음처럼 들리는 그 소리는, 자세히 들으면 흐느낌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류하가 허탈하게 중얼댔다. 온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포기하며 다시 닫았다. 모닥불은 내리 선연한 빛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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