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공주마마, 이건 제 피가 아닙니다.”
온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그는 군인의 냉정한 감각을 동원해 자신의 몸 상태를 조심스레 가늠했다.
아마 곳곳에 시퍼런 멍이 들었겠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긴 것 같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렇게 피를 철철 흘릴 만한 상처는 없었다.
“당신 피잖아요.”
그것도 모르다니, 바보. 온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류하는 당황으로 눈빛이 멍해졌다. 온이 손을 뻗어 류하의 입가를 건드렸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당신이 각혈한 피입니다. 아마 같이 구를 때 제 옷에 묻었겠죠.”
사내의 엄지가 여인의 입술을 쓸었다. 역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류하는 숨을 삼켰다. 그 자그마한 들숨의 떨림이 온의 손끝을 간질였다. 온은 퍼뜩 굳었다.
“송구합니다.”
그는 서둘러 류하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내가 방금 대체 뭘 한 거지.’
혼란과 자괴감이 꾸역꾸역 치밀어 그의 이성을 더욱 흐리게 했다.
그저 공주의 입가에 눌어붙은 핏자국이 가슴 아파서. 혹시라도 제 손길이 그 아릿한 흔적을 지워낼 수 있을까, 무심코 다가갔던 것 같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까?”
류하가 속삭였다. 이제 그녀는 떨지 않았다. 대신 스산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온을 빤히 응시했다.
“무엇을, 말씀이신지.”
온의 음성도 덩달아 나직해졌다. 그는 어느새 표정이 지워진 시선으로 류하를 맞바라보았다.
“내가 뭘 뜻하는지 알면서 나를 떠보지 마세요. 그냥…… 그냥 지금 그대 머릿속에 있는 바로 그 질문을 하세요. 내 눈치를 보면서 시침을 뗄 필요 없습니다.”
의도한 것보다 말투가 뾰족하게 나왔다. 울컥하는 마음에 류하는 씹어뱉듯 온을 다그쳤다.
몸의 통증이 점차 익숙해지고 자신과 온이 둘 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조금은 가시고 나자,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가능하다면 영영 잊었겠지만, 그러기엔 절망이 너무 짙었다.
괴기스러운 시체 떼. 울부짖는 사람들. 허공을 찢어발긴 새파란 불꽃. 그리고 자신을 괴물 보듯 보던 시선, 시선, 시선.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온은 마침내 질문했다. 그의 시선은 남들과 달랐다. 그는 류하를 괴물 보듯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괴물이 아닌 낯선 사람을 보듯 류하를 직시했다. 그 사실이 오히려 괴로웠다.
“내가 미리 말했으면, 어떻게 했을 건데요? 당신들의 폐하께서 주술사에게 장가든다 하여 좋아했을 겁니까? 아니면 내가 사특한 계집이라 하여 진즉 쳐 죽였겠습니까?”
류하는 나직이 절규했다. 온의 무감하던 시선에 일순 무언가 일렁였다. 한층 깊어진 어둠 속에서, 류하는 그 흔들림을 보지 못했다.
“대륙의 어느 나라에서도 사술이 환영받은 사례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모친은 나를 낳았다는 이유로 별궁에 유폐됐고, 나도 살면서 별궁 밖으로 나가 본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왜 숨겼냐고요? 내가 왜 숨겼을 것 같습니까?”
균형을 갖추지 않은 힘은 그저 지독한 약점이었다.
다른 힘은 하나도 없이 신기한 능력 하나만 덩그러니 지녔다 한들, 그것으로 내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계 정복이라도 꿈꿔 볼까? 군대도 명분도 없는 내가, 어떻게, 그리고 왜.
류하는 기필코 세계 정복 같은 거창하고도 한심한 꿈을 꿔 본 적 없었다. 소중한 어머니와 단둘이 평화롭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정확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 힘이 처음부터 그 기회를 박탈했다.
다른 건 다 약한데 이상한 힘 하나만 강해 봤자 위험인물로 낙인찍힐 뿐, 자신을 배척하고 탄압하는 세력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평생 숨기고 살았을 겁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게 없으니, 이번에는 예외를 만들었을 뿐이고요.”
류하는 악다문 잇새로 쏘아붙였다.
그래, 목숨보다 소중한 게 없으니, 시체들한테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사술을 썼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돌아온 건 또 다른 죽음의 위협이었다.
“그래서, 이제 나를 어찌할 겁니까?”
황제의 후궁에게 기이한 힘 같은 건 필요 없다. 황궁의 여인은 그저 어여쁜 꽃처럼 존재하면 그만, 계집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며 권력을 허락받지 못하니.
그저 반반한 인질 정도로만 생각했던 소국의 공주가 알고 보니 사술을 부리는 위험인물로 판정됐으니, 류하는 제국의 판결이 두려웠다.
솔직히 말해서, 나 같아도 불안했을걸. 땅을 깨트리고 불꽃을 퍼붓는 일개 후궁이라니, 혹 탈출이라도 생각하면 골치 아프다.
아니면 혹시, 힘을 숨긴 채 휘국의 황제 곁에 숨어들어 고국을 위해 황제를 시해하고자 했던 월국의 자객이라면?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월국 임금이 제 영토를 위협하는 황제를 해하기 위해 공주의 힘을 숨겨 일부러 후궁으로 바친 거라고 휘국 측에서 우긴다면, 약한 쪽은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는 당연히 말씀드려야 할 테고.”
이건 온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황제의 신하였고, 류하는 황제의 예비 신부였다. 온은 이번 일을 황제에게 보고할 마땅한 의무가 있었다.
“나를 기어코 황궁까지 끌고 갈 생각입니까? 아니면 귀찮게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나를 베실 건가요.”
류하는 우울하게 씹어뱉었다. 온의 안색이 단숨에 굳었다. 류하는 그가 꽤 화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공주마마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온은 저음으로 받아쳤다. 그의 목소리도 그의 낯빛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류하는 여전히, 온이 자신에게 화났다고 생각했다. 감히 황제를 속이고 이런 위험한 힘을 숨긴 버르장머리 없는 이방 공주에게.
우습게도, 그런 와중에도 류하는 온을 믿고 싶었다. 자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그의 약속을. 그저 빈말일지라도, 기만일지라도, 동아줄처럼 붙잡고 싶었다.
“내가 어떤 것을 걱정하는지 알고나 말하는 겁니까?”
그를 믿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음성은 낮고 거칠게 나왔다.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할까 봐.
그대가 내 편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 그대의 형은 황제고, 그대의 고향은 제국인데.
“마마께서 힘을 드러내신 대가로 신변을 위협받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온은 직설적으로 되물었다. 류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온은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는 저와 제 부하들과 양국의 궁인들을 구하셨습니다. 수단이 어찌 됐든, 폐하의 백성이 마마 덕에 목숨을 건진 겁니다. 그건 그 어떤 것으로도 상쇄될 수 없는 공로입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했다. 류하는 점점 더 안심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원래 별로 순진하지 않은 성격 탓인지, 경계심을 완전히 버리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대는 아직도 화난 눈빛인걸. 류하의 심장이 아프게 비틀렸다.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제가 폐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는 지어미 될 자를 버리는 비겁한 사내가 아닙니다. 나라 간의 혼약을 함부로 깨트리는 무책임한 분은 더더욱 아니고요.”
온은 끈질기게 타일렀다. 이제 류하는 기분이 나빠졌다.
기분이 나쁘다니,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상한 반응이라 류하는 잠시 당황했다.
‘기분이 나빠?’
자신이 이능 때문에 핍박받을까 봐 두려운 것도 아니었고, 그저 속상했다. 짜증이 났다. 온이 자신을 보며 나라 간의 혼약을 운운하고, 자신을 황제의 지어미 될 자로 칭하는 게.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그게 핵심인 것도 아니며, 저 사내는 나를 달래기 위해 저런다는 것을 아는데, 왜, 어째서. 납덩이를 삼킨 듯 거북할까.
“그리고 제가 아는 폐하라면, 이번 일을 최대한 조용히 덮고 지나가려 하실 겁니다.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이번 일을 공론화하지 않는 이상, 폐하께서 마마를 해할 명분은 없습니다.”
온은 신중하게,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득했다.
죄인을 처벌하려면 죄목을 밝혀야 하며, 내내 사특한 힘을 숨겨 온 계집의 목을 치려면 그 사특한 힘이 정확히 뭔지 드러내야 했다.
일국의 공주가 도술을 부릴 줄 알며, 그 공주가 이번에 휘국 황실에 시집온다는 엄청난 사실을 황제가 과연 섣불리 폭로하려 할까?
아니. 온은 뭇사람의 생각보다 제 형을 잘 알았다.
형님은, 적어도 당분간은, 필시 공주의 힘을 감추려 할 것이다. 본인 혼자만 알고 있다가 적절할 때 패로 써먹기 위해.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는 괜찮으실 겁니다. 황궁에 가셔서도 안전하실 겁니다.”
온은 거듭 강조했다. 류하는 잠잠했다. 안도해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 아팠다. 왜일까.
“그리고, 제가 마마를 벨 일은 없습니다.”
온의 말투에 옅은 분노가 묻어났다. 그의 눈빛도 잔뜩 날카로웠다. 류하는 온의 그런 모습이 생경했다.
온화하지는 않았어도 항상 담담하며 정중하던 자인데, 지금 그는 언성만 높이지 않았을 뿐이지 명백하게 그녀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제가 지켜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까 류하가 여기서 자신을 벨 거냐고 반항하듯 따진 뒤로, 온은 내리 분노를 느꼈다.
“그게 제 일입니다. 마마를 지키는 거.”
당신은 내 곁에만 있으면 된다고, 내가 어떻게든 지키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아까 시체들과 싸울 때도 분명 그렇게 약조했거늘.
“마마를 황궁까지 무사히 모시고 가는 게 제가 폐하께 받은 임무인데, 어찌…….”
당신을 베다니. 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은, 내…….
“……어찌, 마마를 해침으로써 황명을 어기겠습니까.”
당신은, 내, 형수님 되실 분이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는 완전히 암흑이었다. 서로 표정을 읽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서로 이렇게나 가까이 있으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이따금 스치는 체온과 들리는 숨소리로 비좁은 간격을 가늠할 뿐.
“나를 죽이라는 황명이 떨어지면 곧장 복종하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류하는 냉담하게 지적했다. 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받는 시선을 류하는 알 길이 없었다. 그만큼 어두웠으므로.
“어쨌든, 알겠습니다.”
류하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여전히 온은 침묵했다. 류하는 작게 한숨짓더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청했다.
“제가 불을 지피겠습니다. 괜찮겠지요?”
“……뜻대로 하십시오. 제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할 필요가 없기는, 무슨.’
류하는 속으로 힘없이 비웃으며 팔을 살짝 휘저었다. 새파란 불꽃이 공중에서 피어나 지면에 안착했다. 화염은 땔감 없이도 흥겹게 불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