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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6)화 (16/123)

16화

주변에서 군졸들과 궁인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시체는 늘어났다. 그것들은 목이 잘린 뒤에도 바닥에서 기괴한 방식으로 꿈틀거렸다. 누군가 섬세하게 제작한 지옥도 같았다.

“마마는 제 곁에만 있으시면 됩니다.”

다정한 대장군이 타일렀다. 아아. 류하는 고개를 들어 온을 바라보았다.

여태 앞뒤를 보며 시체들을 경계하던 온은 문득 시선을 내려 공주를 눈에 담았다. 눈빛이 얽혀들었다.

“제가 어떻게든 지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 용감한 사내의 시선은, 떨고 있었다.

류하는 온의 눈빛에서 자신과 똑같은 공포를 읽었다.

자신들이 어쩌다 이런 상황에 닥쳤는지도 모른 채, 낯선 땅에서 낯선 존재들한테 찢겨 죽는 것에 대한 공포.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류하는 생각했다.

이 사내가 이런 식으로 죽게 두고 싶지 않다고, 류하는 생각했다.

류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충고를 떠올렸다.

사내를 유혹하는 것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 말고. 정말로 처절하고 간절했던 충고. 사실상 어머니의 유언과 다름없는 말.

<류하야. 그 힘은 절대로 남 앞에서 쓰지 마. 절대.>

아아,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사람들은 널 두려워해서 죽이든, 널 이용하려고 가두든, 아니면 이렇게 평생 외면하고 꺼리겠지. 제발 그렇게 살지 마.>

제게 조용히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죠. 이 괴이한 능력을 반드시 숨기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어머니. 조용히 살든 시끄럽게 살든, 저는 어쨌거나 살아야겠어요.

<너를 낳은 걸 후회한 적 없어. 그래도, 네가 이런 힘을 타고나게 둔 건 미안해.>

아니에요, 어머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어쩌겠어요? 어차피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힘도 아닌데. 얼굴도 모르는 생부의 것이지.

정말 쓰고 싶지 않은 힘이었지만, 자신을 살리고 대장군을 살리고 군졸들과 궁인들을 살리는 게 먼저였다.

류하의 눈이 새파랗게 변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류하야.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저자는 네 아비가 아니란다.>

월국의 현왕은 호색한이었고, 암군이었다. 휘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 백성과 영토를 야금야금 먹힐 만했다.

물론 제국의 침략과 본국의 쇠락이 국왕 개인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류하는 어린 나이에도 무능한 ‘아버지’가 창피했다.

<네 친아버지는 따로 있어. 내가 살면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야. 아, 사실 사람인지는 모르겠어. 그분은 신이 아니었을까?>

어린 류하는 돌연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고 멍해졌다. 내게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그럼 소문이 사실인 거야? 정말로, 나는 부왕의 친딸이 아닌 거야?

<그렇게 아름답고 강력하고 신비로운 분이라면 인간이 아니라 신에 가까울지도 몰라. 그래서 네가 특별한 거야, 류하야.>

류하의 모친은 어린 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귀엽고 당차고 사랑스러운 내 딸. 너를 보면 나의 연인이 떠올라.

같잖은 왕명에 따라 억지로 후궁이 돼야 했던 내게, 그분은 삶의 한 줄기 빛이었어.

<너는 잡귀의 딸이나 요괴의 자식이 아니야. 그런 우스운 모략은 그냥 무시해도 좋아. 다 헛소문이야. 자기만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려고 하는 편협한 작자들의 비난이지.>

땅을 끌어다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읽으며 비를 부르고. 파랗고 예쁜 불꽃을 밤하늘에 띄우고. 어릴 적의 류하는, 그런 것들을 했다고 한다.

모두가 잊고 있던 미천한 뒷방 후궁의 여식이 갑자기 도술을 부린다 하여 궁궐에 해괴망측한 소문이 퍼졌다.

실은 공주가 왕의 딸이 아니고, 얼굴 반반한 후궁 계집이 요괴를 꾀어 동침한 결과로 태어났다더라.

낭설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공주가 제 딸이 아님을 증명할 뚜렷한 방법이 없던 왕은 그들을 내치거나 죽이지 않고 별궁에 가두었다.

류하 본인도 거의 평생 그게 당연히 자신과 어머니를 깎아내리기 위한 헛소문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영문 모를 힘은, 글쎄, 그냥 일종의 돌연변이 아닐까.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주를 받았다거나.

그런데, 정말로 내 아비가 요괴 비슷한 존재였다, 이거지.

<너는 특별해, 류하야.>

잡귀의 딸이라는 비공식적 낙인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어.

<네 아버지도 특별했어. 너는 그분을 닮은 거야.>

어머니는 짧게나마 함께했던 연인을 그리며 우수에 찬 눈빛을 지었지만, 류하는 그저 잠자코 경악했다. 내가, 정말로 그런 부정한 혈통을 타고났다니.

그딴 특별함 따위, 원한 적 없어.

내게 이런 힘이 있어서 어머니가 왕에게 버림받고 나는 평생 그 별궁 구석에서 자란 거라면, 이딴 힘 따위, 그냥 없었으면 좋겠어.

딸의 힘을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옛 연인을 그리던 류하의 어머니도 결국 죽기 전에는 류하에게 신신당부했다. 힘을 드러내지 말라고. 소중한 비밀로 감추라고.

자신의 딸이 특별하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웠으나, 그 아이가 그 특별함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여태 류하는 어머니의 유언을 오롯이 본인의 의지로 성실히 지켜 왔다.

튀고 싶지 않았고,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계가 분명한 능력이니, 실질적으로 써먹을 데도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터져 버렸다.

“으아악?!”

“이게 무슨……!”

살아남은 군졸들과 군인들이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는 시체들 때문이 아니었다.

땅이 진동했다. 지면 아래 묻혀 있던 나무뿌리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툭툭 튀어나와 시체들을 찢었다.

어떤 시체들은 통째로 불탔다. 도깨비불처럼 푸른 화염이 허공에서 펑펑 터지며 송장들을 잡아먹었다.

인간들은 멀쩡했지만, 그래도 놀라서 고함을 지르며 나무뿌리와 불꽃을 피하려 애썼다. 나무와 불은 어차피 스스로 인간들을 피했다.

온은 품에 안고 있던 공주를 반사적으로 밀쳐냈다. 공주의 몸이 불꽃에 담근 듯 뜨거워진 탓이었다.

온은 눈을 휘둥그레 치뜨고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의 두 눈은 파란 별빛 같았다.

“공주마마.”

너무 놀라서, 그저 믿을 수가 없어서, 주변의 시체들이 조각난 것을 기뻐하지도 못하고 온은 하염없이 류하를 쳐다보았다.

류하는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싶었다. 내가 저 사내와 다른 모든 이들을 살렸으니, 기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한계가 분명한 능력이었다. 무한정 쓸 수 있는 도술이 아니었다. 도술인지, 사술인지, 뭔지.

한 번 힘을 쓰고 나면 열이 펄펄 끓고 눈앞이 핑핑 돌고 사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따금 조금씩만 사용하면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말 온 기세를 다해 기력을 쏟아붓고 나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살고 싶어서 쓴 힘인데, 퍽 모순적이게도.

그리고 현기증이나 울렁거림보다 더한 건, 바로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었다.

“아…….”

자신을 괴물 보듯 보는 사람들의 눈빛 앞에서 류하는 울컥 피를 토했다.

“공주마마!”

온이 다급히 외쳤다. 그가 절박하게 다가왔다. 류하는 빠르게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그의 표정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다행이야. 만약 그대의 눈에서 다른 이들과 같은 표정을 확인했다면, 꽤 많이 비참했을 거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류하는 쓰러졌고, 온은 그녀를 품으로 받았다. 견고하면서도 거칠지 않다고 류하는 생각했다. 자신을 감싸는 온의 팔에 대해 그렇게 단정하며, 류하는 혼절했다.

그리고 그때, 땅이 무너졌다.

공주의 기괴한 힘은 사람들을 살렸다. 땅을 부수고 불꽃을 쏟아 정체불명의 시체들을 찢어발김으로써.

이때 부서진 땅은 폭삭 붕괴해 전에 없던 낭떠러지를 만들었다. 안 그래도 산세가 험한 흙길이었다. 지형이 가파르게 뒤틀렸다.

“대장군님!”

누군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른 이들도 경악하며 온의 직함을 부르짖었다.

정작 온 본인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했다. 그는 류하를 감싼 채 함께 추락했다.

거친 비탈길을 데굴데굴 구르며 온은 아득하게 생각했다.

아, 이번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죽을 수도 있겠다고. 여태 지겹도록 잦은 전투는 무사히 넘겼으면서, 고작 이런 곳에서.

적어도 지금 자신의 품에 너덜너덜하게 담긴 공주는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소원을 마지막으로 온은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고, 정신을 잃었다.

지독한 꿈이었다. 아니, 사실 꿈이 아니었다.

차라리 악몽이었다면 좋았겠지만, 통증이 너무 선명해서 류하는 이게 전부 생시임을 알았다.

류하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사위가 어둑했다. 시공간의 개념이 워낙 뒤죽박죽 섞인 탓에, 당분간 그녀는 그저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오싹한 느낌에 퍼뜩 움찔했다.

“대장군.”

그녀가 탁하게 속삭였다. 목구멍에 가시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아팠다. 각혈의 후유증이었다.

“대장군?”

류하와 온은 흙더미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어둠의 깊이로 가늠하건대, 그새 해가 진 듯했다. 둘 다 거의 반나절을 기절해 있었다는 뜻이었다.

“온 대장군.”

류하는 이제 점점 겁에 질렸다.

신통력을 들켰다는 사실보다도, 피를 토하고 구른 탓에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는 상황보다도, 옆에 쓰러진 사내의 침묵이 훨씬 두렵고 끔찍했다.

“대장군, 제발…….”

류하는 온의 밑에 거의 깔려 있었다. 그가 자신을 안고 구르느라 그렇게 됐다는 사실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류하의 공포가 짙어졌다.

류하는 힘겹게 사내를 밀어냈다. 온의 몸이 옆으로 툭 뒤집혔다. 류하는 창백해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품이 피에 젖은 게 보였다. 이제 류하는 호흡조차 버거웠다.

“대장군, 온 대장군!”

안 돼. 이건 아니야. 그대가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안 되잖아.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야. 고작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그대가 잘못되기를 바란 적 없어.

“대장군!”

“……아까도 계속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마마. 사람 귀에 대고 소리치지 마십시오.”

가느다란 저음이 불만을 토로했다. 류하는 실소하듯 탄식했다.

“일부러 남의 청력을 손상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부디 자제해 달라고 청하고 싶습니다.”

온은 희미하게 중얼대며 간신히 눈을 떴다. 전신을 조각냈다가 방금 기워 붙인 듯이 아팠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겨우 질문했다. 그를 잠시 쳐다보던 류하는 울컥했다. 그녀는 이제 온을 쏘아보며 앙칼지게 되물었다.

“지금 내가 괜찮은지가 문제입니까? 그대는 피를 이렇게 쏟았으면서!”

류하는 덜덜 떨리는 손길로 온의 갑옷을 스치듯 만졌다. 검붉은 빛깔이 어둠 속에서 봐도 불길했다. 이에 온은 역으로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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