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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5)화 (15/123)

15화

“으윽…….”

본능적인 공포가 온몸을 옭아맸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류하는 신음을 짓씹었다.

특별한 건지 괴이한 건지 모를 자신의 타고난 능력 덕에, 아까부터 류하는 줄곧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갑갑하고 살갗이 서늘한 건 대장군을 보면 느끼는 영문 모를 떨림 때문이라고 처음에는 넘겨짚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점차 불안이 깊어졌고, 모종의 사특한 기운이 전신을 짓누르는 느낌에 제대로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품위도 상식도 전부 잊고 미친 사람처럼 무작정 마차 문을 두드렸다.

정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제때 벗어나기만 했더라면.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끝내 빠져나가지 못했고, 골짜기를 가득 채운 죽은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대열을 갖춰라! 무기가 없는 이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궁수들도 검을 뽑아 엄호해!”

온은 어느새 다시 전장 한복판에 있었다. 그래, 여기는 분명 전장이었다. 한데 저것들은 대체 무슨 종류의 적군이지?

거의 참신하기까지 했다. 참신하기 이전에 처참했지만.

“물러서지 말고 바로 베어라! 바로 급소를 노려!”

“으아악!”

“사, 살려 줘!”

장수의 정연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군졸들은 하나씩 공포에 굴복하며 여기저기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풍부한 실전 경험은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태 그들은 무장한 병사들과 싸워 봤지, 사지가 썩어 뚝뚝 문드러진 각양의 시체들과 맞서 본 적 없었다.

마찬가지로 썩어 너덜거리는 옷을 두른 검붉은 송장들이 잿빛 눈을 번뜩이며 몰려들었다.

온은 악취 나는 송장의 목을 베어 쓰러트리며 고민했다.

‘이것들은 대체 뭐지?’

시체들의 전투력은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사실, 전투력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도 퍽 민망한 동작이었다. 전부 뻔하고 서툰 몸부림뿐이었다.

온과 온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전장에서 살아남는 데 이골이 난 노련한 전사였지만, 상대편은 그저 시체에 불과했다. 죽은 뒤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아수라장으로 내몰린 가련한 고깃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병사들이 망자의 무리에 밀리는 건, 시체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것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능숙하게 시체의 사지를 찢어도 그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무너지거나 피를 쏟으며 죽는 대신 다시 꾸역꾸역 돌진했다.

하긴, 이미 한 번 죽은 이들인데 어찌 다시 죽을까.

“머리를 베거나 몸통을 끊어라! 그럼 움직임이 더뎌진다!”

그나마 온이 신속하게 터득한 요령은 적의 시야와 동작을 방해하는 쪽이었다.

저것들도 시각을 통해 공격 경로를 정하는지, 머리가 날아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자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몸통을 반으로 똑 쪼개 놓는 것도 효과적이었다. 사지가 분리되어 바닥에 넝마처럼 던져진 그들은 곧 장수들의 말발굽에 으깨졌다.

“꺄아악!”

“으악!”

그러나 시체들은 솟아나는 독버섯처럼 거듭 새롭게 나타났다. 급기야 대열 안쪽에 피해 있던 궁인들까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퍽!

“공주마마!”

비명이 아닌 나무 뜯기는 소리에 온은 경악하며 외쳤다. 그는 시체 하나를 더 베어 쓰러트린 뒤 말고삐를 휘어잡아 방향을 틀었다.

“마마! 공주마마!”

빈틈 따위 허락하지 않으려 했는데. 저 혐오스러운 존재가 당신의 털끝에라도 스치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울여 방어했거늘.

어느새 시체 하나가 군사들의 대열을 뚫고 공주가 탄 마차를 공격했다. 문과 벽을 뜯어내고, 썩어 문드러진 팔을 그 틈새로 쑤셔 넣으며.

온은 검으로 시체의 팔을 끊었다. 안에 웅크려 있던 류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대장군은 망가진 문을 마저 허물고 공주에게 손을 뻗었다.

“공주마마, 밖으로 나오십시오.”

구세주를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오직 비명에 둘러싸여 시체 냄새만 맡다가 멀쩡히 살아 있는 저 사내가 제게 다가오자 숨통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류하는 단숨에 손을 맞잡았다. 온은 단단한 악력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공주의 고운 손에 흙먼지가 옮겨붙는 게 온은 퍽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류하 본인은 살아남느라 바빠서 흙먼지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온은 한 손으로 류하의 손을 받치며 검을 든 팔을 굽혀 류하의 허리에 감았다. 몸이 훅 들리는 느낌에 류하는 아찔해졌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귓가에 스치는 사내의 음성에 거칠어진 숨결이 섞였다. 상황이 동반한 공포감 때문에 류하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어느새 류하는 말 위에 안착했고, 뒤에서 온은 그녀를 감싸며 보호했다.

“꽉 잡으셔야 합니다.”

직후, 온은 다시 검을 들어 또 다른 시체를 베었다. 피 대신 가무잡잡한 살점이 튀었다. 류하는 눈을 감는 걸 잊었다. 적나라한 참상이 어지러웠다.

“마차와 수레에서 말을 끊고 전부 승마해라! 군졸들은 가장 가까운 부상자를 챙겨! 이동하며 공격한다.”

호위해야 할 공주를 품에 감춘 채 온은 다급히 목청을 높여 전략의 전환을 알렸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붙박여 싸우다간 이대로 골짜기에 매장당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차라리 좁은 산길을 벗어나 평야로 나가야 했다.

‘거기서는 궁수들이 힘을 쓸 수 있겠지.’

“나와 공주마마를 엄호해라. 이랴!”

온은 가장 중대한 지시를 끝으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짐승은 앞으로 내달렸다. 처음 느껴 보는 속도감에 류하는 숨을 삼켰다.

‘젠장, 이게 뭐야……!’

언젠가는 꼭 기마를 배워 보는 게 소원이긴 했고,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순간이 참 짜릿할 거라고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대체 왜, 하필 첫 순간이 이딴 식이냐고!

‘으악, 제발, 살려만 주세요!’

평소에는 잘 찾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기가 퍽 죄송스럽긴 했지만, 지금 류하는 천지신명을 모조리 붙잡고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상해, 이상해, 진짜 이상해, 이 시체들은 뭐야, 대체……!’

원귀와 요괴에 대한 괴담은 들어 봤어도 썩은 시체들이 인육을 물어뜯는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류하의 본능이 괴이한 힘의 흐름을 알렸다. 류하는 다급히 눈을 들었다.

‘근처에서 누군가, 사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류하는 자신만의 직감으로 확신했다. 누군가 이 시체들을 근처에서 조종하고 있어. 그렇다면 누가, 대체, 왜?

“아악!”

상념은 오래갈 수 없었다. 뭉그러진 시체 하나가 류하와 온의 측면에서 뛰쳐나오더니, 두 사람이 탄 말의 다리를 깨물었다. 말은 자지러지며 쓰러졌다.

“윽……!”

류하는 신음을 깨물었다. 온 세상이 새까매지며 데굴데굴 뒤집히는 가운데, 무언가 단단하면서도 푹신한 무게가 류하를 감쌌다. 온이었다.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성실한 호위가 다급히 속삭였다. 류하는 그대야말로 괜찮은 거냐고 되물을 틈이 없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다 쉴 기세로 꽥 외쳤다.

“대장군, 뒤에, 뒤에!”

공주가 시끄럽게 경고해 준 덕에 목숨을 건졌다. 온은 한 팔로 류하를 감싸며 나머지 팔을 휘둘러 이빨을 드러낸 시체를 하나 베었다.

“으악, 저기 하나 더! 우측에요!”

지금 공주 때문에 내 왼쪽 고막이 터질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온은 류하의 목청에 감탄하며 몸을 반쯤 굴렸다. 이미 검붉은 점액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칼날이 시체의 목을 뚫었다.

“그래서, 괜찮으신 겁니까?”

두 번째 시체를 해치운 뒤 온이 류하를 흘긋하며 물었다. 아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니 지금 대답해라, 이런 태도였다. 류하는 기가 막혀서 딱딱거렸다.

“그대가 그런 질문을 반복할 시간에 옆이나 잘 살핀다면 앞으로 계속 괜찮을 예정입니다!”

류하는 사납게 대답하며 몸을 휙 숙였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공주는 바닥에서 검을 집으며 일어섰다. 목숨을 잃은 어느 군졸의 무기였다.

“검을 잡아 본 적은 있으십니까?”

온은 황당해서 되물었다. 동시에, 류하가 간절히 바란 대로 검을 내저어 시체를 하나 베었다. 또 다른 송장이 곧바로 뒤따랐다.

“내가 검을 잡아 봤을 것처럼 생겼습니까?”

류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잡아 봤을 리가. 보수적인 월국에서 여인은, 그것도 가장 인형처럼 있기를 강요당하는 왕실의 여인은 검술을 배우지 않았다.

“맨손으로 있기가 영 불안해서 그러니 그냥 잡고라도 있겠습니다. 보아하니 움직임에 정교함이라고는 없는 것들 같은데, 어찌어찌 휘두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류하는 어설픈 자세로 장검을 쥔 채 으르렁댔고, 온은 내심 놀랐다.

‘그새 저 송장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파악했단 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겁에 질려 사고가 멈췄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확실히 비범한 공주였다.

“맨손으로 계시기가 불안하다니, 저에 대한 질책이군요.”

온은 뚝뚝하게 대꾸하며 팔을 뻗었다. 류하는 그대로 그의 품에 빨려 들어갔고, 온은 공주의 얼굴을 제 가슴에 박은 채 공주의 뒤를 노리던 송장 하나를 그었다.

“제가 그만큼 호위로서 미덥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류하는 얕게 호흡했다. 그녀가 미숙하게나마 잡고 있던 검은 어느새 땅에 떨어졌고, 온은 발끝으로 그 검을 밀어 멀리 치워 버렸다. 그는 앞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주마마, 조금만 더 저를 신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호위를 믿지 못해 스스로 검을 들고 설치는 호위 대상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부류거든요.”

이런,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공주인데 내가 너무 세게 말했나? 몰라, 알 게 뭐야.

지금은 온도 예비 형수님께 예를 갖출 여유 따위 없었다. 시체가, 여전히 너무 많았다.

“차라리 무섭다고 울며불며 떼를 쓰십시오. 그럼 그냥 기절시킨 뒤 성심껏 지키겠습니다. 하여튼, 쓸 줄도 모르는 검은 그냥 버려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와 같이 나란히 황천길에 오르실 생각이 아니라면요.”

어쭈, 이놈이? 온의 품에서 류하는 눈을 부라렸다.

차라리 대놓고 빈정거리는 투라면 모를까, 조곤조곤 정중하게 정곡을 찌르는 언어 때문에 류하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할 틈도 없었고, 반박할 의지도 없었다. 어쨌든 이 사내는 여태껏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오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목숨을 구하고 구해지는 훈훈한 장면은 없이, 오직 피바다만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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