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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4)화 (14/123)

14화

월국의 수도에서 휘국의 수도로 향하는 최단 경로는 월국에서 휘국으로 곧장 이어지는 게 아니라 두 나라와 맞닿은 다른 작은 나라를 걸쳐갔다.

제국의 통행증을 지닌 대장군의 일행은 당당히 외국의 영토를 가로질렀다.

그날, 그들은 오랜만에 야영하지 않고 어느 작은 고을의 여관에서 묵게 됐다. 딱딱한 잠자리에 시작부터 질려 버린 류하는 속으로 무한히 안도했다.

“측간에 다녀오고 싶구나.”

행장을 풀고 식사를 마친 뒤, 공주는 궁녀들에게 말했다. 궁녀 두엇이 일어나 총총히 뒤따랐다. 류하는 한숨을 삼켰다. 아, 측간에도 혼자 가지 못하는 왕족의 삶이여.

류하는 별수 없이 궁녀들을 데리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그 골짜기에 귀신이라도 산다는 뜻인가?”

“진짜 그렇다니까? 몇 년 전에 근방에서 큰 전투가 있었잖아. 그때 제국 군대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을 붙잡아 죽이고 그 골짜기에 묻어 버렸다고…….”

“예끼, 이 사람아, 괴담도 적당히 해야 재밌는 거야.”

이어서 여럿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행객들인 듯했다. 류하는 조용히 주춤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투? 제국군?’

류하는 곱씹었다. 곱씹을수록 안색은 싸늘해졌다. 그 게걸스러운 제국 군대는 휩쓸고 지나지 않은 곳이 없구나. 류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대륙에 그토록 숱한 죽음을 부른 황제 놈의 낯짝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 동생에 따르자면 현명하고 다정한 자라는데, 과연.

‘그토록 다정한 자가 제 아비를 죽여?’

물론, 류하도 제 아비란 작자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자주 있었다. 하지만 충동적인 살의를 품는 것과 그걸 냉정하게 실천으로 옮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대장군은, 대체…….’

무슨 심정이었을까.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황태자 자리를 빼앗기고 피를 나눈 아비를 잃었으며 자신을 낳아 준 어미를 인질로 붙잡힌 그는, 어떤 심정으로 내 앞에서 형의 이름을 높였을까.

온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렸다.

형은 동생을 살리기는 했지만, 원래 동생의 몫이었던 차기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으며 동생의 친모를 인질 삼아 그를 부하로 부리는 중이었다. 그는 결코 동생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장군으로서 묵묵히 제 형을 섬기며 남들에게 황제를 칭찬하는 말을 전하는 그 사람의 심정이 과연 어떨지, 류하는 헤아려 보려 애썼다. 그 결과 실패했고, 마음만 아팠다.

‘……그 사람은 생각하지 말자.’

류하는 내적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렇게 물방울을 털어 내듯 그 사람의 전부를 떨쳐 내고 싶었다. 고작, 하찮은 물방울을 털어 내듯.

처음에는 그저 막무가내로 유혹해 어떻게든 환심을 사 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저놈만 꼬드길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이 터무니없는 혼인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접근한 것뿐인데, 그런데.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말 몇 마디를 끝으로, 스치는 눈빛과 맞닿은 손길과 한두 번의 다정함을 끝으로, 이런 마음에 빠질 수가 있나.

족쇄에 매인 것 같았다.

류하는 몸도 마음도 무겁게 묶여 터덜터덜 나아갔다.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평야는 적어지고 날카로운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아기자기한 언덕길과 같던 비탈이 점차 깊어지고 높아졌다.

“공주마마. 잠시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열한 번째 날, 마차 밖에서 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류하는 흠칫했다.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 것만 같았다.

내가 절대로 일부러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나도 진심으로 멈추고 싶다고 그를 붙잡고 구질구질하게 해명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네, 물론이에요.”

겉으로 그녀는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대답했다. 갑갑해서 걷었던 너울을 잽싸게 다시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이 열렸고, 온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제부터 산길로 이동할 겁니다. 여태 평지에 있었을 때보다 마차가 더 심하게 덜컹거릴 텐데, 너무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세상에, 이것보다도 더 덜컹댄다고? 류하는 하마터면 왕족의 품위를 잊고 어린애처럼 울먹일 뻔했다. 실제로 류하는 그저 빙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대장군. 미리 말해 줘서 고마워요.”

마차가 이미 충분히 덜컹거려서. 너무 흔들려서. 그래서 이렇게 속이 울렁이는 거야. 결코 그대의 얼굴을 봐서 그런 게 아니야. 결코, 절대, 아니야.

온은 류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전, 그녀가 웃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너울 너머 분홍빛 입술을 하염없이 응시했을 때처럼. 찰나가 그렇게 흘렀다.

“그럼 남은 여정도 편안하십시오.”

그 찰나가 끝나고, 온을 시선을 거두며 물러났다. 문이 다시 닫혔다. 류하는 또 혼자였다. 문을 열면 바로 밖에 그대가 있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류하는 잠자코 입을 틀어막았다. 왜 비명이 차오르는지, 울음이 터질 듯한지, 왜 이토록 필사적으로 숨죽여야 하는지 본인도 알지 못했다.

일행은 산길을 타고 골짜기에 진입했다. 대낮에도 음습한 곳이었다.

나무들이 너무 긴밀하게 우거져 햇빛이 겨우 스미는 탓인지, 분명 화창한 봄날인데 이곳은 한겨울처럼 쌀쌀했다.

‘이 근처였지. 재작년 이맘때쯤 전투가 벌어진 게.’

천천히 말을 몰며 온은 불현듯 회상했다. 한창 그의 형이 공격적으로 영토를 늘리고 있을 때였다. 뭐, 형님이 언제는 공격적으로 영토를 넓히지 않았느냐만.

당시 온은 서쪽 국경에서 전쟁을 이끌고 있었고, 그런즉 동남쪽인 이곳에 들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에 대해서도 풍문으로만 접했다.

듣자 하니, 황제가 언짢아할 정도였다고 한다.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두는 건 좋은데, 이곳에 파견된 제국의 장수는 성정이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적국의 병사들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죽여서 골짜기에 파묻었다나.

그 일로 그 장수는 공신으로 인정받기는커녕 한동안 좌천까지 당했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황제는 제법 성을 냈었다.

‘맞아. 여기가 그곳이었지.’

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피비린내 풍기는 죄의식으로부터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와, 뭐가 이렇게 쌀쌀해. 여기 혼자 아직 겨울인데?”

“이게 다 원귀가 출몰하는 곳이라서 그래. 내가 듣기로는 실연당한 연인들이 이곳에 와서 목을 맨다는데? 그래서 밤마다 이곳에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야, 하지 마!”

“짜식, 겁먹었냐?”

대열 뒤쪽에서 군졸들이 숙덕숙덕 떠드는 게 들렸다.

‘그새 군기가 빠졌나.’

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동 중에 재잘대는 것을 따끔하게 꾸중하려 하는데, 놀라운 소리가 들렸다.

“대장군? 대장군!”

쾅쾅, 하고 문까지 두드리며 다급하게 부르는 공주님을 보라. 온의 눈이 커졌다. 주변의 다른 장수들과 군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장군, 잠깐 마차를 세워 보세요!”

품위 있는 왕족은 절대 저런 식으로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 저리 시끄럽고 경박하게 문을 두드리지도 않으며,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공주는 소국의 왕녀로서 제국에 조공처럼 끌려가는 중이었다. 여태 제 주제를 파악하고 대체로 얌전히 지내던 자인데, 왜 갑자기 저러는지 군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온은 이해하고 자시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너무 걱정돼서, 아니. 자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틈조차 없이 급하게 다가가 마차 문을 열었다.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대장군, 마차를 세워야 합니다. 아니, 마차를 아예 돌리세요. 다른 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이제는 온도 조금 황당해했다. 다짜고짜 경로를 바꾸라니, 이게 무슨 소리람.

사실상 포로 주제에 참 건방지다고, 그런 경멸 섞인 생각 없이 그저 순전히 당황스러웠다.

“이 길은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내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이 길은, 정말로…….”

류하는 허둥지둥 설명했다. 이때 그녀의 안색은 몹시도 창백했고, 온은 당혹감에서 걱정으로 건너뛰었다.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그는 형수가 될 여인의 몸에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류하의 어깨를 감쌌다.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고 싶은 마음이었다.

반면, 곁에서 어리둥절하게 지켜보던 다른 제국 사람들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돌연 헛소리를 늘어놓는 공주를 향한 시선이 절대 곱지 않았다.

“네, 나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그냥 어서 마차를 돌려주세요. 어서 길을 바꿔야 합니다, 대장군.”

류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아, 나도 이렇게 겁먹고 싶지 않아. 차분하고 명료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 그런데, 그래 봤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잖아.

내가 가끔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고 고백하면, 그대도 나를 괴물 보듯 볼 거잖아.

나를 잡귀의 딸이라 욕할 거잖아.

요괴의 핏줄이라 비난할 거잖아.

나와 내 어머니를 별궁에 가두고 외면하며 경멸할 거잖아. 내 기괴한 힘을 영영 비밀로 파묻고 나를 바깥세상에 내보내려 하지 않을 거잖아.

“대장군,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 부디 지금은 내 말에 따라 주세요.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으아악!”

비명이 애원을 잘라먹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핏물이 튀었다. 들끓는 신음은 예리한 쇳소리에 묻혔다.

이곳의 거의 모두가 군인이었다. 그들은 위험을 감지함과 동시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칼을 빼 들며 냉철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군인이 아닌 자들이 있었다. 궁인들의 비명은 누구보다 처절했다.

또한 구중궁궐에서 곱게 커서 흉측한 꼴이라고는 본 적 없는 공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은커녕 호흡조차 잊었다.

지면에서 시체가 툭툭 튀어나왔다.

“마차를 엄호하라!”

온은 단숨에 외쳤다. 그의 동작은 물 흐르듯 매끄러워, 류하는 하마터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잊고 홀린 듯 바라볼 뻔했다.

아수라장 가운데서도 온은 아름다웠다. 검집에서 검을 뽑는 동작은 어찌나 유려하고, 미지의 적들을 쏘아보는 시선은 얼마나 곧고 용맹한지.

류하는 그 모든 것들을 아주 짧은 순간에 관찰했다. 그 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은 류하를 떠밀었고, 마차 문을 닫았다. 류하는 안에 갇혔다.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공간이 막히기 전, 그 아름다운 사내가 속삭였다. 류하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채로 마차 안에 던져졌다.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홀로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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