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왜 이렇게 거슬리지. 왜 이렇게 갑갑하지? 온은 혼란스러웠다.
여기, 처음부터 폐하의 신부로 정해진 여인이 내게 자신의 정혼자에 관해 묻고 있다.
팔려 가듯 시집가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혼자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아니, 오히려 팔려 가듯 시집가는 상황이기에 더욱 궁금한 게 많을 수 있다.
갑작스레 결정된 혼인인 만큼 정보가 부족할 테니까. 아는 게 많을수록 마음의 준비도 쉬워질 테지.
그러니 지금 공주가 제게 황제 폐하에 관해 질문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온은 속이 울렁였다.
‘뭐야, 이 사람?’
한편, 류하는 너울 뒤에서 조심히 온의 반응을 살폈다.
이번에도 그냥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갈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대체 갈등할 게 뭐가 있다고.
‘쳇,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폭군으로 알려진 황제 따위, 정보를 구걸하면서까지 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어. 정말로 그자와 혼인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또한, 문답을 핑계로 대장군과 조금 가까워질 수도 있을지 모르는데.
‘어차피 둘 중 하나야. 얌전히 황궁에 끌려가 후궁이 되든가, 그 전에 도망치든가. 어느 쪽이든 대장군과 얘기를 해 보면 도움이 될 거야.’
만약 류하가 실제로 후궁이 된다면, 좋든 싫든 엄연한 황실의 인원이 되어 황제와 부부로 지내고 황궁의 다른 여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건 필시 전쟁과 같은 삶일 거라고 류하는 정확하게 짐작했다.
맨몸으로 전쟁터에 던져질 수는 없지. 류하는 무기로 쓸 정보가 필요했다.
약소국에서 온 백지상태의 이방인 공주라, 듣기만 해도 너무 만만해서 자칫하면 먹잇감이 될 자였다.
무력함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되도록 무지함을 피하고 싶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대장군과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다 보면 덤으로 이자와 조금 더 친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있었다.
겸사겸사 정보도 모으고 인맥도 쌓기 위해 대장군을 불렀다. 그런데 류하의 가장 중요한, 사실상 유일한 인맥인 대장군은 그녀의 질문을 듣자마자 묘하게 싸해졌다.
‘내가 뭐 실수했나?’
류하는 초조해졌다. 황제에 대해 질문하는 게 그렇게 무례한 일인가? 아니, 내 남편 될 사람인데 그 정도도 못 물어보나.
류하는 당혹을 느끼며 온을 쏘아보았다. 이 거추장스러운 너울 때문에 자신의 불안과 혼란이 제대로 전해졌는지나 의문이었다.
그사이 온은 자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정확히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온이 물었다. 얼핏 들으면 평소처럼 정중한 음성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살짝 날이 선 느낌이었다. 류하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침착하게 되물었다.
“폐하께서 어떤 걸 좋아하시고 어떤 걸 싫어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행여 내가 나도 모르게 그분께 실례되는 일을 할까 두렵습니다.”
황제의 호불호를 미리 파악해 그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그의 총애를 얻어 힘을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최소한 뒷방 신세는 면했으면 좋겠다.
“그분께선 후궁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내명부의 질서에 복종하고 황손의 출산에 집중하길 바라시지요.”
온은 다소 냉담하게 답했고, 류하는 조용히 배알이 뒤틀렸다. 황손의 출산에 집중한다, 는 대목 때문에.
‘젠장, 그러니까 꼭 내가 새끼 치는 가축 같잖아.’
뭐, 진실에서 그리 크게 빗나가는 비유는 아니었다.
이미 부인이 넘쳐나는 황제가 굳이 얼굴도 모르는 이웃 나라 공주를 후궁으로 들이는 이유는 뻔했다. 정략혼을 구실로 월국을 통제하기 위해, 또한 후계를 얻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
현재 황제는 황후 외에 여섯 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 아직 아들을 낳지 못했다. 황제는 딸이 둘이었는데, 첫째는 황후 소생이었고 둘째는 후궁이 출산했다.
만약 조만간 황자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황제가 오랜 고집을 내려놓고 대장군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꽤 많은 이들이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명부의 질서에 복종하고 황손을 출산하는 건 후궁의 당연한 의무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 외에도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릴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대에게 묻는 겁니다.”
류하는 어렵사리 평정을 유지했다. 제게 황제의 아이를 낳는 데나 집중하라고 덤덤하게 훈계하는 온의 태도가 어쩐지 아팠다. 왜 이렇게까지 아픈지,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폐하께서는 내명부의 여인들에게 까다로운 분이 아니십니다. 공주마마께서 최소한의 마땅한 예의를 갖추신다면 폐하의 노여움을 살 일이 절대 없을 겁니다.”
온은 뚝뚝하게 대답했고, 류하는 위화감을 느꼈다. 폭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만큼 여인들도 거칠게 대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 사람들에겐 상냥하다는 건가.’
류하는 쓴웃음을 삼켰다. 월국 포함, 제국 바깥의 비교적 작고 약한 나라들은 그토록 괴롭혀 왔으면서.
한쪽은 착취하고 한쪽은 보살피는, 그런 이중적인 황제가 점차 진짜로 궁금해졌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마께선 일국의 공주로 길러지신 품위 있는 분이니, 분명 폐하의 총애를 얻으실 겁니다.”
기계적으로 말을 잇던 온이 멈칫했다. 류하도 조용해졌다. 각자 영문도 모른 채 숨이 막혔다. 공주가 황제의 총애를 얻길 빌어 준 대장군도, 그 대장군의 말을 가만히 듣던 공주도.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북한 마음에 바보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대체 뭐가, 왜, 이토록 거북한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류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냐고, 이 바보야.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태평하지 말하지 말란 말이야. 남의 일이라고, 그딴 덕담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지 말라고.
폐하의 노여움을 살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분명 폐하의 총애를 얻으실 거라고?
황제와 혼인하러 떠나는 여인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찬사였지만, 어쩐지, 기분이 더러웠다. 참 새삼스럽게.
“걱정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그대의 말을 들어 보니, 폐하께선 분명 궁의 여인들에게 현명하고 다정하신 분이겠지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형이 동생을 반이라도 닮았다면, 그는 분명 자상할 겁니다. 또한 준수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할 이유는 없겠지요.
뒷말은 몽땅 되삼켰다. 내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널 것 같아서.
“네. 그분은 현명하고 다정하십니다.”
온은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공주에게 못 할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다정, 다정이라. 현명한 건 모르겠고, 다정하다니. 너무 뻔뻔한 허언이었다.
아직도 아비의 피로 칼을 칠한 채 권좌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형의 모습이 선했다.
그가 황제가 된 후 일으킨 정복 전쟁 때문에 대륙 곳곳에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 황제를 두고 눈앞의 이 어린 공주님께 다정함을 논하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속으로 꽤 비웃으시겠군. 저주하시거나.’
온은 괴롭게 짐작했다. 월국의 공주를 상대로 휘국의 황제를 칭송하는 것만큼 잔혹한 촌극은 없을 터. 월국을 비롯한 대륙의 수많은 약소국이 휘국 탓에 백성과 영토를 잃었다.
“다행입니다. 어서 폐하를 뵙고 싶네요. 그토록 현명하고 다정하신 분이니.”
류하는 자신이 뭐라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표정 없이 떠들었다. 그러다 자신이 정말로 후회할 만한 말을 뱉기 전, 입술을 꾹 물었다.
“더 하문하실 건 없습니까?”
온은 덤덤히 여쭈었다. 하문할 게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바랐다. 지금 공주 앞에서 버티는 게 물리적인 고역이었다. 기분 탓인지, 실제로 속이 메슥거렸다.
“지금 당장은 없군요.”
류하는 단정하게 대답했고, 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이제 공주 앞에 있을 핑계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문득 아쉬움을 느꼈다.
‘하, 젠장.’
“내 질문에 성심껏 답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대장군.”
“황송합니다, 마마.”
내가 정말 미쳤나. 온은 진지하게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아까는 제발 공주의 시야에서 벗어나길 빌었으면서, 막상 떠나야 하자 아쉬움을 느끼다니.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며 변덕이 심하다더니, 여기 자신이 완벽한 예시로 존재했다.
게다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도 전부 차마 제대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불경하니, 온은 잠잠히 고통받았다.
“이제 가서 쉬셔도 됩니다.”
제발 꺼지세요. 아니, 내 곁에 남으세요. 류하는 속으로 갈팡질팡했다. 왜? 그 이유를 제대로 파헤치는 순간 자신은 갈가리 찢길 것을 알고, 류하는 인내했다.
“그럼, 평안한 밤 되십시오, 공주마마.”
류하는 예의 바른 인사를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대도요.”
온의 시선이 류하의 얼굴을 짧게 스쳤다. 그러나 야속한 너울이 사이를 가로막아, 눈빛은 흐리게만 전해졌다.
온은 떠났다. 류하는 잠시 가만있다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담담하게 명령했다.
“너희는 이제 목욕물을 가져와라.”
“네, 마마.”
빌어먹을 목욕. 이제 할 때마다 온이 생각났다.
그 뒤로도 어색한 밤들과 어색한 나날이 흘렀다.
제2장. 도깨비불
여덟째 날이 끝나고 아홉째 날이 시작될 무렵, 일행은 월국의 영토를 벗어났다.
‘잘 있어. 안녕.’
류하는 괜한 아련함에 속으로 인사말을 속삭였다.
안녕,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땅이여. 동시에, 수천 가지 의미를 품은 땅이여.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며 추억 하나 쌓지 못했지. 동시에, 내 평생이 추억이었어. 어머니가 함께 계셨으니까.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월국의 모든 게 류하에게 의미를 잃었다.
민초와 교류해 본 적 없는 그녀는 백성을 사랑할 줄 몰랐고, 부왕에 대한 삐딱한 시선 때문에 왕실에 대한 자부심도 없었다.
민중을 아끼지도 않고 지배층을 존중하지도 않으니, 월국은 그저 그녀에게 이름뿐인 국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었다. 대체 고향이라는 게 뭔지, 뿌리라는 게 뭔지, 원래 인간이란 이토록 감성적이고 엉뚱한 존재인지, 공연히 눈시울이 아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