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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2)화 (12/123)

12화

게다가 이건 외교적인 문제였다. 소국이 대국에 공주를 바치기로 했는데 그 공주가 도중에 사라진다면 둘 중 어느 나라가 책임을 강요당할지 자명했다.

그냥 부왕 혼자 책임지고 죽는 각본이었다면 류하의 망설임이 훨씬 덜했을 텐데, 최악의 경우 황제 놈이 전쟁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자 류하는 오싹해졌다.

‘물론,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전쟁이라도 난다면 가장 큰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민초에게 돌아갈 것이다.

류하에게 절절한 애국심은 없었고, 헌신적인 인류애도 희미했다.

그러나 그녀도 기본적인 양심쯤은 있었고, 졸지에 전쟁을 일으켜 나라를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역사에 기록되기 싫다는 마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절박했는데, 그런데…….’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청천벽력처럼 떨어진 혼인 명령 앞에서 냉철함을 유지할 정신머리는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무 살 앳된 공주에게 그 정도 냉철함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일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사내의 신부로 가축처럼 팔려 가기 싫었을 뿐이다. 그에게 달라붙은 폭군이라는 꼬리표도 싫었다.

정치니 외교니, 그런 것들은 지금껏 죄다 류하의 안중 밖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이제 와서 착한 척이냐고.’

성숙해지는 건 나중으로 미룰 걸 그랬다.

전쟁이 나든 말든, 아랫사람이 다치든 말든 나 하나만 생각하는 못되고 모자란 아이가 되어 훨훨 날아갈 걸 그랬다.

이제 와서 제하가 눈에 밟히고 온 대장군이 신경 쓰이고 월국의 백성에게 미안해지면 어떡해. 나는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백성인데.

류하의 시선이 마차 안에서 창밖으로 돌아갔다. 눈길이 닿는 곳에 대장군이 있었다. 한동안 제 시야에 담기는 것도 피하더니, 이제는 매번 잘만 보였다.

만약 내가 도망치면, 내 호위를 맡은 저자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황족이라 괜찮지 않을까?’

류하는 터무니없는 정당화를 시도했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이라도 휘국의 황제가 5년 전 어떻게 옥좌에 올랐는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현재 휘국의 황제는 적통이 아니었다. 원래는 온이 황태자였다.

사사건건 목숨을 위협받던 서장자(庶長子) 휘륜은 5년 전 부황을 비롯한 자신의 반대파와 배다른 황자들을 거의 전부 죽인 뒤, 스스로 황제가 되어 매서운 통치를 이어 가고 있었다.

거의, 모든 황제의 이복동생들이 죽임을 당했다. 륜이 가장 먼저 제거할 거라고 예측됐던 온은 오히려 살았지만.

온은 선황의 유일한 적자이자 법적으로 황태자였고, 그런즉 이복형 륜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다. 당연히 그를 죽여 없애서야 한다고 적잖은 충신들이 간언했다.

그러나 륜은, 끝내 온을 살렸다. 온의 친모를 인질 삼아 그를 개처럼 부려 먹으면서도, 어쨌든 살렸다.

누군가는 경악했지만, 누군가는 사실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륜이 온을 벴다면 오히려 놀랐을 것이다. 륜이 절대 온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처음부터 짐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복형을 죽이려 하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그 이복형을 적으로 돌리지 못한 물러터진 황태자가 있었다.

상냥한 태자는 서출인 륜에게도 예로부터 친절했다. 그 친절이 나중에 그를 살렸다.

잔혹한 전쟁과 냉정한 숙청으로 이름난 폭군 륜도 어쩌면 생각보다 제 이복동생을 닮았나 보다. 그 물러터진 황태자를 닮아, 결국 온을 죽이지 못했으니.

그러나 아무리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해도, 온이 황제와 황제의 충신들에게 몹시 견제받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별궁에 유폐된 황태후는 완벽한 인질이었다.

그런 사람이 황제의 신부로 정해진 소국의 공주를 놓치거나 빼돌린다면, 이번에는 과연 무사할까? 이미 5년 전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자인데.

아니. 절대로 완벽하게 무사할 수는 없겠지.

‘내가 도망쳐서, 저 사람이 위험에 빠진다면?’

류하는 다시 창밖을 훔쳐보았다. 곧은 자태로 천천히 말을 모는 온이 보였다.

저 무뚝뚝한 표정은 이제 차라리 익숙했다. 저자가 저런 냉랭한 얼굴을 하고 어떤 다정한 말을 속삭일 수 있는지, 류하는 이제 똑똑히 이해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런다면,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얻은 다음에, 과연 행복하고 평안할 수 있을까. 정말 양심의 가책 따위는 손톱만큼도 남지 않을까.

어쩐지,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의 자유가 저자의 고통을 부른다면 그 자유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참 이상해. 고작 사흘 전에 처음 만난 사람이잖아. 오늘은 불과 넷째 날이야.

저자는 내가 싫어하는 제국의 황족이고, 군인이고, 나를 억지로 신부 삼겠다는 황제의 동생이야. 내가 저자를 걱정할 이유는 없잖아.

류하는 자신이 대체 왜 저자를 걱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그사이 일행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향했고, 해는 중천을 거쳐 점차 지평선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간다.”

온이 말을 멈췄다. 군졸들과 궁인들이 복종했다. 마차가 덜컹대며 멈출 때, 류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하루가 이렇게 갔구나.

“내리십시오, 공주마마.”

문이 열리고, 익숙한 음성과 익숙한 손이 다가왔다. 언제 이렇게 익숙해졌을까.

류하는 자신을 정중히 바라보는 대장군을 물끄러미 맞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표정은 없었다. 그저 황제의 후궁을 호위하는 자로서 예의 바를 뿐.

첫 번째 날에 한쪽은 무엄한 말을 하고 한쪽은 차가운 말을 했던 시간은 사라진 듯, 어제 참 민망한 차림새로 그의 앞에 섰던 순간은 흐려진 듯, 오직 깍듯함이 있을 뿐이었다.

류하는 온의 손을 맞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오직 깍듯함만 남았을지 몰라도, 맞닿은 손은 따스했다. 그가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그랬다.

만약 오로지 맨살끼리 닿는다면 얼마나 더 따뜻할지 류하는 궁금했다.

“공주마마,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식사를 먼저 들이라 할까요.”

천막으로 들어온 공주에게 궁녀들이 공손히 여쭈었다. 류하는 어제처럼 순서를 정했다.

“목욕물부터 대령하도록 해라. 먼저 씻고 싶구나.”

이번에는 대장군을 데리고 근처 물가까지 다녀오겠다는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저 번뇌만 남긴 채, 네 번째 날이 저물었다.

다섯 번째 날이 뒤따랐고, 여섯 번째 날이 밝았다. 일곱 번째 끝나갈 무렵, 류하는 전략을 바꾸었다.

“공주마마, 부르셨습니까?”

평소처럼 호위로만 곁을 맴돌 예정이었던 그는 예비 형수의 부름이 지극히 불편했다. 갑자기 처소에서 보자 하시다니. 그는 조심스럽게 입장했다.

“대장군, 앉으세요.”

류하의 음성은 차분했다. 그녀는 얼굴에 너울을 쓰고 있었다. 온은 그 너울의 존재에 감사했다. 지금 그녀가 겹겹의 옷으로 늘씬한 몸을 꽁꽁 휘감고 있다는 사실도 감사했다.

망측하게도 며칠 전부터 공주의 젖은 몸이 생각나서 꿈자리가 사나웠다.

“부름에 응해 줘서 고맙습니다.”

“고마워하실 이유 없습니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내가 어떤 생각으로 요즘 밤잠을 설치는지 아신다면 내 목을 베시겠지.

아니, 폐하께서는 눈감아 주실지 몰라도 폐하를 모시는 자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차피 그들이 나서기 전에, 온 본인의 양심이 그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여인에 대해 그런 음란한 망상이라니. 상대방이 알아낸다면 얼마나 끔찍해할까. 평생 모르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신이 말하지 않는 이상 공주가 알아낼 일도 없을 테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제로 잘 해내는 사람도 드물지요. 그 드문 인구에 그대가 속했으니, 내 감사가 이상한 건 아닐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공주는 어쩐지 너울 뒤에서 웃고 있는 듯했다. 반투명한 천 때문에 입술 모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은 자신의 느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공주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공주의 안색이 조금씩 붉어졌다.

“대장군,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대상과 대화하는 게 얼마나 갑갑한 일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빤히 보지는 말아 주세요.”

공주가 맑은 음성으로 침착하게 타이르자 이제는 온의 얼굴에 분홍빛이 스쳤다.

아, 이런. 상대방의 입술이 정녕 미소로 휘었는지 궁금해서 자기도 모르게 너무 골똘히 쳐다보았다.

“송구합니다. 최근에 군졸들과 궁인들에게 명령하는 게 습관이 되어 부지중에 무례를 범했군요. 용서하십시오.”

온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급조한 변명은 그럴싸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아랫사람에게 명령할 때는 어물쩍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직시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요새 그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고 둘러댈 수야 있겠지만, 그러기엔 여태 공주와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길었다. 어느덧 벌써 일곱째 날이었다.

“마음 놓으세요. 나도 당황해서 그런 거지, 그대에게 화난 게 아닙니다.”

많이 당황하긴 했지. 왜 저렇게 빤히 본 거야.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계속 제 입술을 쳐다본 느낌이라 류하는 괜히 민망해졌다.

쑥스러웠고, 간지러웠고, 하여튼 콕 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그대도 내심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갑자기 보자고 해서.”

류하는 매끄럽게 말을 이었고, 정곡을 찔린 온은 주춤했다.

그 당황의 주된 이유까지는 제발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을 보면 당신의 반쯤 벗은 몸이 간혹 떠올라 미치겠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부디 내가 그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걸 즐기는 악취미가 있다고는 오해하지 마세요. 단지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을 뿐입니다.”

“하문하십시오.”

온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자신과 공주를 둘러싼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서너 명의 묵묵한 궁녀들을 의식했다. 그들에게 물어서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인가?

“지난 며칠간 곱씹어 보니, 내가 내 지아비 되실 황제 폐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류하는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 온은 미세하게 굳었다. 그 자그마한 경직은 류하도, 궁녀들도, 심지어 온 본인도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오직 그의 무의식이 요동쳤다.

“그대는 폐하의 가까운 충신이요 가족이니, 그 누구보다 폐하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고 싶었어요. 정작 폐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채로 폐하와 혼례를 치를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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