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악몽을 꾸다가 드디어 깬 건지, 아니면 아예 혼절하기라도 했는지, 천막 안은 이제 잠잠했다.
온은 불현듯, 공주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천막 문을 움켜쥐었다.
“네, 괜찮습니다.”
온은 하마터면 그대로 천막 문을 찢듯이 열어젖히는 무례를 범할 뻔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직전에 여인의 가냘픈 음성이 들려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다행입니다.”
온은 부드럽게 탄식하며 천막에 이마를 기댔다. 맞은편에서 공주는 잠잠했다. 온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지금은 괜찮으시다는 건, 아까는 괜찮지 않으셨다는 뜻입니까?”
다시, 류하는 잠잠했다. 그녀는 천막 안에 일어나 앉아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저 견고한 중저음이 그녀를 위로했다.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러니 생시로 돌아왔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저 현실적인 음성이 바로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라서, 그녀는 지극히 안도했다.
“하지만 이제는 깼으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세요.”
그래, 괜찮아. 개꿈도, 악몽도, 결국에는 다 꿈일 뿐이야.
아침이 오고 어둠이 걷히면 흩어지는 망령이야.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장막 밖에서 온은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면서도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인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아했다.
공주가 괜찮다는 것도 알아냈고 악몽을 꿨다는 정황도 파악했으니, 이제는 묵묵히 호위의 일로 돌아가면 될 것을.
어째서 나는 계속 여기 남아,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지.
“아니요, 내 몸은 멀쩡합니다.”
류하는 상대방이 보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빙긋 웃었다.
다정해라. 군인답지 않게 다정한 사내였다. 저렇게 꼬박꼬박 남 걱정도 해 주고.
“그럼 몸 말고 다른 곳은, 멀쩡하지 않으십니까?”
온은 또다시 선을 넘었다. 선을 넘는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멀쩡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류하가 부드럽게 답했다. 그녀는 온의 음성이 들려오는 천막의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그대가 있겠지.
“그대가 벌써 이렇게 내 안위를 챙겨 주니, 몸도 마음도 전부 편안합니다.”
류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벽을 쓸 뻔했다. 살갗이 스치기 전에 류하는 손을 거두었다.
“혼례를 치르기도 전부터 시댁 식구에게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편안할 수밖에요.”
공주의 온화한 음성을 듣고 온은 움찔했다. 시댁 식구. 그 어절이 묘하게 거슬렸다.
“당연한 일을 할 뿐입니다.”
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연한, 일. 형의 신부가 될 자를 보살피고 보호하는 마땅한 임무.
“우리는 곧 가족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온은 가만히 주먹을 바르쥐었다.
“그래요. 가족이 되겠죠.”
류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가족이라. 그 친밀하고 포근한 단어가 어쩐지 지금은 아득하기만 했다.
“그대 같은 인척을 두게 되어 영광입니다.”
류하는 꿋꿋이 말했다. 이제는 온이 조용했다.
“저도 공주마마 같은 분의 인척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제는 둘 다 조용했다.
예비 형수와 예비 시동생, 서로 누구보다 각별한 가족이면서도 누구보다 서먹한 사이가 될 이들.
류하는 온의 형제와 혼인하여 언젠가 온 본인이 신부를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을 상상했다.
온의 부인은 나의 동서가 되겠지.
나는 그 여인에게 같은 황실의 여인으로서 살갑게 대하고, 시동생의 경사를 축하해야 할 거야.
영문도 모른 채 숨이 막혔다.
“이제 주무셔야죠.”
온이 문득 말했다. 류하는 상념을 잊고 창백해졌다.
다시 잠들었다가 똑같은 악몽을 되풀이할까 봐 두려웠다.
부왕의 냉혹한 음성, 모친의 가련한 떨림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제가 아침까지 밖에 있겠습니다.”
이때, 뜻밖의 굳건한 약속이 류하를 붙들었다.
류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쳐다보았다.
“중간에 보초를 교대하는 게 아닙니까?”
류하는 어둠의 깊이를 근거로 시간을 가늠했고, 새벽까지는 한참 남은 한밤중임을 짐작했다.
묽은 서광이 새카만 암흑을 조각내기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중간에 보초를 교대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제가 아침까지 마마께 가까이 있는 게 도움이 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온의 제안은 비합리적이었다.
일단 잠들고 나면, 천막 밖에 대장군이 있든 군졸이 있든 무슨 상관이랴. 중간에 사람이 바뀌어도 어차피 모를 텐데.
“네, 가까이 계세요.”
그런데, 왜, 난 그렇게 대답했지?
“그대만 괜찮다면, 아침까지 근처에 계세요.”
정말로 대장군이 밖에 서 있으면 악몽을 꾸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건 미신도 아니고, 이상했다.
“그러면 그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하지만 류하는 기꺼이 도움을 청했고, 심지어 보답까지 약속했다.
그러자 천막 밖에서 온은 빙그레 웃었다.
“갚으실 필요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요.”
거짓말. 둘 다 생각했다. 이게 어딜 봐서 호위의 당연한 일인지. 하지만, 왜?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공주마마.”
상냥한 저음이 들렸다. 류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류하가 속삭였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상대방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굳이 다시 부르지 않았다.
천막 안은 빽빽한 어둠이었지만, 천막 밖에는 횃불이 있었다. 그 불빛에 따라 사내의 훤칠한 윤곽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그렸다.
그 믿음직한 음영을 눈으로 덧그리며, 류하는 잠들었다.
류하는 그 밤에 다시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리고 온은 동이 틀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참 손이 많이 가는 공주였다. 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손이 많이 가고, 눈이 계속 가고, 기어코 마음마저 가게 되는 사람이었다.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단순히 거슬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지켜보고 끊임없이 걱정하게 만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리도 발칙하게 굴더니, 바로 그날 제 눈앞에서 울다가, 다정하게 대해 줘서 고맙다고 웃더니, 오늘은 뜻밖의 망측한 기억을 선사했다.
‘미친, 그만 생각해.’
보초를 서던 온은 엉겁결에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철퍽 때렸다.
그러나 얼얼한 통증으로도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른 아찔한 환영을 지워낼 수 없었다.
희뿌연 굴곡에 달라붙은 얇디얇은 내의.
공주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서 보석처럼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온의 정직한 내면을 괴롭혔다.
‘하필 그런 장면을 봐서…….’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대장군은 형님과 예비 형수님께 몹시 송구스러운 기분으로 뇌리를 깨끗이 비우려 애썼다.
그의 처절한 노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가 그의 청각을 사로잡았다.
그가 지키고 선 천막 안에서 흐릿한 신음과 뒤척이는 소음이 들렸다.
“공주마마? 공주마마!”
악몽에 시달리며 괴롭게 바르작대는 공주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돼서.
온은 차마 여인의 처소에 난입하지도 못하고,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호위 대상을 불렀다.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당신이 괜찮다고 해서.
그러나 말만 그렇지 온전히 괜찮을 수 없는 공주의 처지를 알아서, 온은 또다시 죄책감과 연민으로 마음이 아렸다.
“지금은 괜찮으시다는 건, 아까는 괜찮지 않으셨다는 뜻입니까?”
악몽을 꿨어? 온은 안타까워 물었다. 악몽의 고통에 대해서는 온도 잘 알았다.
아직도 그는 가끔, 그의 형이 아비의 잘린 목을 내던지는 장면을 지독한 꿈으로 되풀이한다.
“이제는 깼으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세요.”
공주가 대답했다. 여전히 온은 그녀가 안타까웠다.
계속해서 손이 가고, 눈이 가고, 기어코 마음이 간다. 어느새 그는, 그녀가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이제 주무셔야죠. 제가 아침까지 밖에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그녀에게 권했다. 조만간 다른 병사와 보초를 교대할 때이긴 했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었다.
“제가 아침까지 마마께 가까이 있는 게 도움이 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계속, 신경이 쓰여서.
첫날에 서럽게 울던 모습도, 또 가엽게 웃던 모습도, 아까 악몽에 짓눌려 끙끙대던 소리도, 전부.
“네, 가까이 계세요.”
공주의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기꺼이 그를 받아들여 줘서, 기뻤다.
“그대만 괜찮다면, 아침까지 근처에 계세요. 그러면 그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갚으실 필요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요.”
사실 딱히 당연하지는 않았고, 당연하든 않든 공주에겐 잔인한 말이었다.
은혜라니. 끌려가는 그녀를 감시하는 대국의 장군에게, 은혜라니.
죄책감은 이제 거대한 뱀처럼 그의 숨통을 휘감아 옥죄었다.
제국의 황족으로서 자신의 원죄가 공주를 향한 연민과 섞여 그를 괴롭혔다.
만약 형님이 아닌 내가 예정대로 황제가 됐다면, 당신이 오늘 이곳에 끌려올 일은 없었을까.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공주마마.”
이제는 덧없는 가정을 씁쓸히 접으며, 온은 가여운 공주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공주의 음성이 들렸다. 곧, 조용해졌다.
어느새 새근대는 숨소리만 간간이 고요에 섞였다. 이제 잠드셨나 보다.
온은 이상하게 술렁이는 자기 마음을 두렵게 들여다보며, 새벽까지 이어지는 암흑을 홀로 견뎠다.
여정은 이어졌다. 넷째 날에도 일행은 꾸준히 북쪽에 가까워졌다.
창밖으로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보며 류하는 짙어지는 절망을 느꼈다. 절망은 합리화를 동반했다.
‘내가 도망치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작 나흘 만에 초심이 꺾이다니, 의지가 약하다고 욕한다면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류하에게 핑계는 충분했다.
‘나 하나 놓쳤다고 문초당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류하는 일국의 공주였고, 곧 황제의 후궁이 될 몸이었다.
그녀가 실제로는 웬만큼 한미한 귀족 가문의 여식보다도 무력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귀하신 공주님이 멋대로 탈주했다가는 그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궁인들과 군졸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뻔했다.
어차피 그녀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긴 했다. 휘국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월국의 궁인들도 결코 류하에게 소중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그런데, 어제 하필 제하에게 목욕 시중을 시켜 버려서.
그리고 악몽을 꾼 뒤에 휘국의 대장군 온에게 위로를 받아 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