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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10)화 (10/123)

10화

“궁금하네요. 제국의 명산이.”

류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딴 말은 분명 거짓이었으리라.

궁금하긴, 개뿔. 제국에 가축처럼 끌려가는 마당에 제국의 명산 같은 게 궁금할 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대장군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게, 참 신기해.

온은 공주를 흘긋했다. 제국의 명산이 궁금하다니, 진심인가? 어떻게 진심일 수가 있지?

강제된 혼인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여인이다. 그래서 당신을 애써 마주할 때마다 내 마음에는 죄책감이 들끓거늘.

내가 어찌 당신의 고통을 전부 헤아릴 수 있으랴.

나도 5년 전에 형의 손에 아비를 잃고 순탄치만 않은 삶을 살았으나, 그래도 당신처럼 억지로 고향을 떠나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혼인해야 했던 적은 없는데.

그토록 고통받은 당신이, 이제 와서 제국의 명산이 궁금하다니.

고도의 연기인지, 또는 진심으로 체념한 건지 궁금했다. 온은 류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공주는 말간 눈빛으로 대장군을 보고 있었다. 적어도 저 얼굴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여전히 연기를 의심하며 공주를 뜯어보던 온은 문득 몸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뜨거움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해도 지고 있는데, 아직은 그렇게까지 더운 계절도 아닌데, 숨이 막힐 듯 후덥지근했다.

“마마께서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온은 다른 쪽을 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숲의 언저리가 가까워지는지, 나무들이 성겨지면서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휘국에서도 마마의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었으면 합니다.”

류하는 온을 곁눈질했다. 온은 꿋꿋이 류하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문득, 피식 웃엇다.

“고맙습니다.”

이번에도 대장군의 배려를 느낀 류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마냥 향수에만 시달리지 않고 낯선 곳의 풍경에서도 위안을 찾기를 빌어 주는 거겠지.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류하는 돌연 휘국의 황제가 궁금해졌다. 대장군의 이복형인 그는 어떤 사람일까.

지금까지는 그저 도망치겠다는 계획에 집중하느라 막상 황궁에 도착하게 되면 황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가 과연 자신을 어떤 식으로 대할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일종의 현실 도피랄까.

폭군으로 소문난 그에게 첩실로 팔려 가게 되었으니, 무의식중에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하길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폭군이란 꼬리표는 제국 밖의 약소국들의 기준에 따른 거였다.

본국에서 그는 나름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 가며 그럴싸한 평가를 받고 있다 들었다.

‘적어도 암군은 아니라, 이거지.’

한데, 암군이 아니면 뭐 하나.

그놈 덕분에 잘 먹고 잘사는 제국 사람들이야 참 좋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정말로 류하의 알 바가 아니었다.

‘여인들을 어떻게 대하는 작자인지 궁금하군.’

지금 류하는 주군을 섬기는 신하로서 황제에게 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신부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제 신민을 대하는 방식보다는 황후와 후궁들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궁금했다.

만약 류하가 끝내 도주에 실패하고 그놈의 침실에 들어야 한다면, 좋든 싫든 자주 얼굴을 맞대야 할 자이니까.

얼굴뿐 아니라, 살도 맞대고 자야 하겠지.

‘아.’

끔찍하다.

‘진짜 싫어.’

그냥 지금 당장, 미친 척하고 도망쳐 볼까.

류하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지하게 궁리했다.

지금 나는 숲속에 있고, 내게는 ‘능력’이 있으니, 만약 목숨을 건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었다.

“공주마마, 숲길이 곧 끝나갑니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 제 옆의 정중하고 진지한 사내가 마음에 걸려서.

“이제 얼굴을 가리셔야 합니다.”

또한, 본인의 괴이한 능력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강해서. 류하는 망설였다.

망설임은 찰나가 되었다가 결국 영원처럼 늘어졌다.

류하는 뻣뻣하게 너울을 들었다. 보드라운 천이 곧 안면에 떨어져 콧등을 스치고 입술을 가렸다. 시야가 다시 반투명하게 변했다.

“이제 됐습니까?”

류하는 나직이 반문했다.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대장군에게 공연히 화풀이한 것 같아서 마음이 심란했다. 그 심란함 때문에 더더욱 심란했다.

“네, 공주마마.”

온은 담담하게 답했다.

이어서 자신이 공주의 날카로움에 조금 당황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숲의 언저리에서 야영지의 천막까지 공주와 궁녀와 대장군은 잠잠히 걸었다.

“편히 쉬십시오.”

류하의 처소 앞에 도착하자 온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류하는 최대한 부드럽게 녹인 음성으로 화답했다.

“그대도 편히 쉬세요. 호위를 맡아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까 그에게 짜증 낸 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에게 까칠하게 굴면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할까 봐 불안한 게 아니라, 그저 뚜렷한 이유 없이 찝찝했다.

온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거나 자기 때문에 상처받게 된다면 퍽 서글플 것 같았다.

“영광이었습니다, 마마.”

온은 진중하게 말했다. 그 말에 류하는 가슴이 떨렸다. 빨라진 심장 소리가 곤혹스러웠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류하가 미처 그 떨림을 다스리기 전, 온은 고개를 한 번 꾸벅인 뒤 돌아섰다.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뜯어내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 류하는 자신의 얼굴을 가려 주는 이 갑갑한 너울이 괜히 고마워졌다.

류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온은, 일부러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처소로 돌아온 류하는 식사를 마친 뒤 침의로 갈아입었고,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조심히 누웠다. 생각보다 푹신해서 그녀는 안도했다.

‘피곤한 하루였어.’

류하는 거의 넋이 나간 채로 곱씹었다.

이제야 고작 세 번째 날이라니, 앞으로 남은 한 달간의 시간이 막막해서 저절로 탄식이 흘렀다.

그 전에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데.

탈출할 수 있을까.

대장군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다는 건 처음부터 너무 현실감이 없는 막장 계획이었을까. 결국 나는 이대로 황궁까지 쭉 가는 걸까.

거기서 얼굴도 모르는, 폭군으로 소문난, 나보다 무려 일곱 살이나 많은 황제의 첩실이 돼야 하는 걸까.

아까도 궁금했는데, 황제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동생처럼 정중한 사람? 그의 동생처럼 진지한 사람? 그의 동생처럼 준수한 사람?

어느새 모든 생각이 두서없이 대장군을 향해 흘렀다.

류하는 아까 낮에 자신이 본의 아니게 대장군 앞에서 반라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호흡 곤란을 느꼈다.

그녀는 애꿎은 이불을 퍽퍽 치며 괴로워하다가, 어느새 스르르 잠들었다.

류하는 괴이한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그저 개꿈이었다. 개꿈일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온천욕을 하는 중이었는데, 낯선 숲속이 아니라 별궁의 목욕실에 있었다.

뜬금없이 문이 열리고, 대장군이 들어왔다. 류하는 꿈속에서도 경악했다.

‘으아악, 저 사람은 왜 또 여기서 나와?!’

반쯤은 자각몽이었다.

대체 잠들기 전에 얼마나 부끄러워하며 되씹었으면 이런 게 꿈에 나오지?

갑자기 대장군이 사뭇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름다우십니다, 공주마마.”

그 느끼한 놈이 말했다. 그러더니 공주를 와락 끌어안고 열렬하게 입 맞추기 시작했다.

‘헉, 헐, 어?!’

꿈속에서 으레 그렇듯, 류하의 관점은 뒤죽박죽 뒤섞여 맥락 없이 바뀌었다.

현재 그녀는 마치 유체 이탈이라도 한 듯 허공에 둥둥 떠서 모든 일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자신과 자신의 예비 시동생이 서로 부둥켜안고 열심히 애무하는 모습이 담겼다.

‘어머, 어떡해, 미쳤나 봐, 이게 꿈이야? 이게 내 무의식이라고? 나 평소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류하가 꿈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을 때, 또 다른 류하는 취한 듯 혼탁한 눈으로 대장군을 어루만지며 그의 입술을 참 요염하게도 빨고 있었다.

류하의 경악이 점차 짙어졌다.

‘으아, 안 돼, 당장 멈춰…….’

그 와중에 저 대장군 놈은 참 여기저기를 잘 만진다.

류하는 자신의 망측한 무의식에 좌절하며, 자각몽의 한계에 갇혀 힘없이 바르작댔다.

그때,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

류하는 냅다 외쳤다.

너무 그리웠고, 또한 반가웠고, 자신이 외간 남자와 뜨겁게 뒤엉켜 있는 모습을 들키면 등짝이라도 한 대 맞을까 봐 두려웠다.

류하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어머니, 저거 제가 그러는 거 아니에요!”

자신이 정확히 뭐라고 떠드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쏟아 냈다.

어차피, 꿈이니까. 그리고 꿈에는 맥락이 없잖아.

그리고 역시나 꿈이기에, 이토록 맥락 없이 바뀔 수 있었다.

“사특한 계집 같으니라고.”

불현듯 뒤집힌 장면 속에서 류하와 어머니는 낮은 곳에 있었다.

류하의 부왕은 높은 곳에 서서 두 여인을 경멸하듯 내려다보았다. 눈빛은 너무도 싸늘했다.

“참 요망하고 간악한 계집이로다. 내 모습을 한 요괴와 붙어먹기라도 했느냐? 그래서 저따위 것을 딸이라고 낳았어?”

“아닙니다, 전하, 절대 아닙니다! 이 아이는 전하의 여식이 맞습니다.”

옆에서 어머니가 울먹였다. 멍하니 지켜보던 류하는 문득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무심히 놀랐다.

아, 나 왜 갑자기 어려졌지. 스무 살 현재보다도 훨씬 나약하고 무력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평생 별궁에서나 썩도록 해. 너와 네 딸년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할 거다.”

실제로 부왕이 자신과 어머니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류하는 사실을 따질 겨를도 없이 그저 꿈속에 갇혀 어머니를 붙들고 오들오들 떨 뿐이었다.

개꿈이 악몽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계속 개꿈에 갇혀 대장군과 놀아나는 게 편할 뻔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부왕의 눈길이, 어머니를 향한 차디찬 혐오가, 기억나지도 않는 고통스러운 비난이 류하를 찔렀다.

“공주마마? 공주마마!”

아, 다시 개꿈으로 바뀌는 건가. 그럼 차라리 대환영이었다.

대장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와중에도 절대 거칠지 않은, 기본적으로 정중하고 다정한 목소리.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공주마마!”

류하는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자면서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이부자리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걱정 어린 음성은 천막 밖에서 들려왔다. 류하는 잠시 가만히 웅크려 갈라진 숨을 골랐다.

온은 차마 공주의 처소에 난입하지 못하고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였다.

그는 부하들과 번갈아 가며 보초를 서던 중에 천막 안에서 신음과 울먹임을 듣고 조용히 식겁했다.

그를 움직인 건 당연한 온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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