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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9)화 (9/123)

9화

거의 벗은 채로 있는 거나 다름없던 나를 외간 남자가, 그것도 내 예비 시동생이, 안 그래도 요즘 충분히 나와 어색한 사내가, 다 봤다고.

‘으악! 악! 꺄아악!’

이 와중에 쓸데없이 어머니가 떠올라서 더욱 자괴감이 들었다.

아, 어머니. 지금은 당신의 지혜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라고요.

<마지막으로, 가장 간편하고 효과가 즉각적이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가장 큰 방법이 있단다.>

아니에요, 어머니. 이건 진짜 아니라고요.

<옷을 벗고 달려들어.>

그래요, 내가 내 몸매에 제법 자신이 있는 건 맞는데요.

그런 것과 별개로 지금 창피해서 죽을 것 같거든요.

<몸으로 꾀어. 얼굴로도 꾀어. 가장 동물적인 방법이라 이것저것 따지거나 계산할 필요 없고, 간단하단다.>

네, 간단하긴 간단하더라고요. 정말 간단하게 사내를 퇴치해 버렸답니다.

저를 보고 무슨 흉측한 것을 본 사람처럼 도망가더이다. 얼굴도 기막히게 일그러져서는.

목욕하러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람.

심지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 저 사내와 함께 야영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기절할 것처럼 아찔했다.

자신이 원래 있던 지점까지 단숨에 돌아온 온은 나무를 짚고 그곳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부딪친 이마가 너무 아팠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통증을 환영했다.

‘아, 젠장…….’

머릿속에는 원색적인 욕설이 방금 자신이 목격한 충격적인 장면과 뒤엉켜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는 이제 나무에 기대며 망가진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아, 미치겠네.’

그 정도로 헐벗은 여인의 몸을 살면서 처음 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하리라.

온은 아직 독신이었고, 식사나 목욕조차 혼자 할 수 없는 까다롭고 보수적인 황실에서 태어나 컸다.

아내도 없고, 연애를 해 본 적도 없고. 그의 어머니나 주변의 궁녀들이 평소에 훌렁훌렁 벗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런즉 얇디얇은 내의 한 장만 몸에 달랑 걸치고 물에 흠뻑 젖어 나타난 여인은, 그의 삶에서 진정 처음이었다.

‘……왜 비명을 지른 거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네.’

서서히 안면의 열기가 가라앉고 조금은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지자, 온은 호위의 책임을 미처 다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아까 궁녀와 공주의 비명을 듣고 후다닥 달려갔을 때, 공주를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괜찮다는 것만 대강 확인하고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적어도 비명을 들었다면 왜 비명을 질렀는지 정도는 알아냈어야 마땅했다.

하긴, 그 상황에 거기 침착하게 서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이상했지만.

여러모로 죄지은 느낌이었다. 죄인 온은 숙연한 태도로 공주와 궁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공주와 다시 마주쳤을 때, 자신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속으로 부단히 고민하며.

드디어, 나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대장군.”

“……공주마마.”

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감탄이 앞섰는지, 당황이 더 강한지 스스로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찌 저렇게 침착하지?’

눈앞의 공주는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러면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섰다.

일단, 그 망측한 내의 차림은 아니었다. 몸을 닦고 깨끗한 의복을 몸에 두른 공주는 조금 뽀송뽀송해진 낯빛이었다.

물기를 털어 낸 머리카락은 아직은 조금 젖어 있었다.

평소에는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가 지금은 보석 같은 물기를 머금어 마치 옻칠한 비단 같았다.

옷차림은 달라졌는데, 왜 아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왜, 지금 공주를 보면 마치 다시 헐벗은 여인을 마주한 것처럼 몸속이 뜨거워지는지.

옷차림 외에 또 달라진 점은 공주의 표정이었다.

아까는 당장 물속에 뛰어들 것처럼 황망한 눈빛을 짓더니 지금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소풍을 나온 듯한 태도였다.

“대장군.”

자신을 부르는 저 차분한 목소리가 곤혹스러웠다.

지금 나 혼자만 정신없는 건가? 공주와 시선이 맞닿자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는데, 분명 아까 일어난 일의 부작용이 분명했다.

“아직 머리가 다 마르지 않아 너울을 쓰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얼굴이 훤히 드러났구나.

저 매끈한 살결이, 선명한 눈매가, 물로 씻고 난 뒤에도 파랗게 질리지 않고 꽃잎처럼 연분홍빛을 띤 입술이.

“숲 언저리에 다다를 때까지 너울은 벗고 있어도 될까요?”

류하는 정중히 허락을 구했다. 잘 단련된 무표정 아래 질주하는 심장을 감추며.

민망해서, 너무 민망해서. 그래서 심장 박동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하십시오.”

온은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실히 붉어서, 류하는 조용히 당황했다.

“아까는, 온천에 물뱀이 나온 줄 알고 저와 이 아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류하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시작했다.

뭐, 원래 비명의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긴 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변명처럼 들리는지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물뱀이요?”

온은 이제 진짜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류하는 급히 부연했다.

“진짜 물뱀이 아니고, 그냥 나뭇가지였습니다. 물의 움직임 때문에 움직이는 줄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심려치 마세요.”

그딴 우스운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고백하기가 퍽 창피했지만, 제하한테만 뒤집어씌우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자신도 공동 책임이 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아, 그렇군요.”

온이 중얼거렸다. 이제 류하는 그가 자신을 비웃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온은 그저 몹시 진지하게 덧붙였다.

“진짜 뱀을 만난 게 아니라서 천만다행입니다.”

저 사내, 사람을 참 헷갈리게 만든다.

진심으로 안도를 표하는 온을 류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만다행이지요.”

내가 뱀에게 물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저 사내가 안도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황제의 신부 될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그뿐이야.

류하는 자기 자신에게 엄중히 가르쳐야 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세뇌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저 사람이 그런 이유로 나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고작 그저께 나를 처음 만난 그가, 순수하게 내가 걱정돼서 저리도 안도할 이유는 없는데.

류하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구기듯 접었다.

“어쨌든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대장군.”

“아닙니다, 공주마마. 저야말로 무례를 범해서 송구합니다.”

“그건…….”

류하는 머뭇댔다. 굉장히 훌륭하게 태연한 척하던 류하가 처음으로 얼굴을 붉혔다.

공주의 홍조를 보고 온은 잠자코 충격받았다. 저 도자기 같은 뺨에 꽃물이 들듯 붉은빛이 번지니,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첫 번째 날에도 느꼈지만, 가히 절색이라 부를 만했다.

황궁에 도착해서도 눈에 확 띄겠구나.

공주가 황궁에 도착하는 걸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이 아릿해졌다.

“잊으세요.”

류하는 어물쩍 말을 이었다. 그녀는 상당히 절박하게 당부했다.

“일전의 일은 부디 잊으세요. 나도 잊겠습니다.”

온은 무례를 범해서 송구하다고 사과했지만, 사실 류하도 이게 딱히 그의 잘못이 아닌 걸 알았다.

우리, 그냥 전부 잊어버리자. 창피해서 미칠 것 같으니.

“황송합니다.”

온은 깍듯하게 대답했다. 이후, 말이 없었다.

류하는 잠시 멍청하게 서서 온을 바라보다가, 나직한 헛기침에 이어 새침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야영지로 돌아가지요.”

“네, 공주마마.”

그때까지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온은 곧장 절도 있는 동작으로 돌아섰다. 류하는 그와 나란히 보폭을 맞췄다.

제하는 목욕용품과 젖은 옷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총총히 뒤따랐다.

하늘에 점차 노을빛이 번졌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해는 점점 길어졌지만, 제국이 위치한 북쪽으로 향하며 날은 또 조금씩 짧아졌다.

“조심하십시오.”

서서히 내려앉는 어스름 속에서 류하가 또 발을 삐끗하자 온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류하가 먼저 스스로 중심을 잡았다.

온은 길 잃은 손이 류하의 옷에 스치기 전, 조용히 손을 물렸다.

“내가 평소에 이렇게 잘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류하는 문득 변명했다.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지고,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하며 혼비백산하는 아둔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들한테는 오해받더라도, 이 사내만은 진실을 알았으면 했다.

“다행입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잘 넘어지는 분은 아니라서.”

온의 대답은 담백했다. 딱히 대화를 이어 갈 여지는 없었다. 류하는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은 온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어색해서 차라리 침묵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화가 끊긴다고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갑갑했다.

이 사내와 조금 더 얘기하고 싶었다.

이자를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그래서 황궁에 도착하기 전에 도망칠 기회를 만들든가 황궁에 도착하고 나서 인맥을 쌓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이유는 뭘까.

뭐가 그리 아쉽고 조급해서 나는 이 사내와 이토록 필사적으로 대화를 이어 가려 할까.

그토록 필사적이면서, 왜 정작 그와 눈이 마주치면 이토록 어려울까.

너무 많은 질문이 있는데, 해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자신과 같은 상황인지 궁금했다.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제국의 수도에는 아름다운 숲이 많나요?”

결국, 류하는 엉뚱하고 무난한 주제를 대뜸 끄집어냈다.

마치 연회에서 할 얘기가 없으면 괜히 날씨 얘기를 하듯이.

“많습니다.”

온은 즉시 대답했다. 그 또렷한 대답에 류하는 조금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숲도 많고, 또한 산도 많습니다. 북방은 아무래도 산악 지대니까요. 덕분에 명산이 많지만, 때문에 여기처럼 아름다운 들판은 없습니다.”

온이 덧붙였고, 류하는 홀린 듯 들었다. 그의 적극적이고 진중한 어투에서 류하는 많은 것을 읽어 냈다.

우선, 그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 애정, 그리움. 또한, 상대방의 고국에 대한 존중과 이해.

휘국은 강대국이었고, 강대국의 사람들은 대체로 오만했다. 실제로 잘났다고 볼 이유가 충분하니.

류하는 무의식중에, 아니, 의식적으로도 온 대장군도 똑같을 거라고 넘겨짚고 있었다.

제국의 잘나신 황족, 잘나신 대장군님.

남쪽의 자그마한 나라 월국이 얼마나 우스울까.

그곳의 별궁에 갇혀 살던 나는 또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그러나 지금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눈을 보면, 휘국의 산맥을 사랑하면서도 월국의 평야를 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류하는 퍽 놀라웠다. 기대하지 않았던 배려였다.

‘……좋은 사람이구나.’

결국, 이전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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