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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8)화 (8/123)

8화

류하는 남은 길을 침묵하며 걸었다. 뒤따르는 대장군과 궁녀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아득한 물소리가 났다. 온천 특유의 후끈한 물비린내가 풍기자 류하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들떴다.

온천욕이라니, 오랜만에 누리는 귀한 향락이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마마.”

온은 물소리가 온전히 짙어지기 전에 멈췄다.

류하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 나무 옆에 본인도 나무처럼 견고하게 서서 정중하게 아뢰었다.

“목욕을 마치시고 나면 이곳으로 돌아오십시오. 모시겠습니다.”

류하는 단지 깍듯하기 그지없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담담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류하가 뒤돌자 궁녀는 총총히 따라왔다. 류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드디어 둥근 샘터를 발견한 류하가 어깨너머를 흘깃했을 때, 대장군은 나무와 수풀에 겹겹이 가려 윤곽조차 부재했다.

“공주마마, 탈의를 돕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어린 궁녀가 소심하게 다가왔고, 류하는 온을 애써 잊으며 목욕에 집중했다.

“얘야, 네 이름이 뭐지?”

“저, 저요?”

“그래, 네 이름이 궁금하구나.”

“제, 제하라고 하옵니다.”

“제하?”

“네, 공주마마.”

“내 이름과 비슷하네. 영광이야.”

류하는 쌩긋 웃었고, 제하라 불리는 궁녀는 공주의 겉옷 끈을 풀던 와중에 얼굴을 격하게 붉혔다.

“영광이라뇨, 마마. 저야말로 황송할 따름입니다.”

제하는 어수룩하게 중얼대며 류하의 웃옷을 벗기고 속옷 고름을 끌렀다. 매끈한 어깨가 드러났다.

공주는 질문을 이어 갔다.

“제하야, 올해 몇 살이지?”

“열여섯 살입니다.”

“궁에는 언제 들어왔느냐?”

“열 살에 입궁했습니다, 마마.”

“입궁하고 나서 내내 별궁에 있었던 거니?”

“네, 마마.”

박복하기도 하지. 류하는 조용히 곱씹었다.

입궁할 때부터 구석진 별궁에 들어와 6년간 힘없는 후궁과 공주를 섬겼구나.

그러다 느닷없이 그 공주를 따라 먼 타향으로 떠나게 되었다.

“입궁하기 전에 월국 밖을 나가 본 적 있느냐?”

“아니요, 마마.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구나.”

이제 류하는 물에 발을 담갔다. 따뜻했다. 색깔은 뽀얀 옥빛이었다.

류하는 궁중의 예법대로 목욕할 때도 의복을 전부 벗지 않고 얇은 내의를 걸쳤다.

온수에 몸이 잠기자 고운 비단이 물을 빨아들이며 그녀의 굴곡에 눅진하게 휘감겼다.

“그런 점도 나와 같구나.”

“네?”

“나도 처음이니까. 월국 밖으로 나가 보는 건.”

류하는 온천 언저리에 몸을 기대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녀는 제하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너와 나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아.”

물가에 꿇어앉아 공주를 멀뚱히 보던 궁녀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제하가 수줍게 반박했다.

“황송합니다, 마마. 미천한 제가 어찌 마마 같은 분과 공통점이 많을 수 있겠어요?”

이 순진한 궁녀는 지금 진심이었다.

다른 선배 궁녀들은 류하 공주에 대해 별궁에 버려진 천덕꾸러기라느니, 잡귀의 딸이라느니, 온갖 폄하를 숙덕였다.

그러나 본인이 미천한 평민 고아로서 외롭고 보잘것없이 큰 제하는, 아름다운 공주님을 멀리서 바라보며 늘 막연한 동경을 품었다.

“스스로 미천하다 하지 마렴. 나처럼 고귀한 이를 모시는 네가 미천해서야 되겠니?”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고귀하다 칭하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류하는 정말 천연의 왕족이었다.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신분제의 꼭대기에 노닐고, 자기가 잘난 맛에 사며 실제로 잘날 수밖에 없는 아름답고 오만한 족속.

“네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 그럼 나도 네게 시중을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테니.”

“황송합니다, 마마.”

몇 번째 듣는 황송하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류하는 지루해하는 대신 너그럽게 참아 주기로 했다.

이 미숙한 병아리 같은 궁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을뿐더러, 자신은 지금 사람 하나하나가 죄다 아쉬운 상황이었으니.

‘아군이 필요해.’

결국 이게 공주의 본심이었다. 제국의 장군이든, 고국의 궁인이든, 제 편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만약 도망치겠다는 계획이 영락없이 실패한다면, 그녀는 사실상 혈혈단신으로 머나먼 이국의 낯선 황궁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적어도 위안이나마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소국 출신 어린 궁녀에게 실질적으로 무슨 힘이 있겠느냐만, 어쨌든 황궁에서 꾸준히 자신을 모실 아이였다.

늘 곁에 둘 사람이니, 미리 유대를 쌓아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런데, 계속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치 내가 벌써 포기한 것 같잖아.’

대장군을 유혹하든 뭐든 해서 반드시 황궁에 닿기 전에 도망치겠다는 포부와 별개로, 어느새 류하의 무의식은 만일을 대비하며 두 번째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아, 부디 자유로울 수 있기를. 그리고 만약 자유가 불가능할 경우, 힘이라도 얻을 수 있기를.

현재 류하는 자유도 힘도 없어서 제법 우울했다.

“마마, 머리를 씻겨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나마 온천욕이 류하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노곤한 몸을 휘감는 향긋한 온수의 감촉이 좋았다.

“공주마마는 머릿결이 참 비단 같으십니다. 정말 부러워요.”

그새 조금은 긴장을 잊고 재잘대던 궁녀는 혹 자신이 주제넘었을까 싶어 급히 공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류하는 그저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도 안다. 네가 보는 눈이 있구나.”

“아아, 네…….”

제하는 잠시 머쓱해졌지만, 곧 어색함을 잊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궁녀가 비누로 자신의 머리를 감고 온수로 몸을 헹굴 동안 류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 됐습니다, 공주마마.”

일탈 같은 목욕이 끝나고, 제하가 다소곳이 아뢰었다.

류하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꺄아악!”

“뭐야, 왜 그래?”

제하가 돌연 혼비백산하자 류하도 덩달아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그러자 제하는 창백하게 질려서 온천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 저 안에 물뱀이 있습니다!”

“뭐, 물뱀?”

다급해진 류하가 제하의 손가락 끝을 시선으로 쫓으니, 과연 뽀얀 수면 아래 넘실대는 긴 갈색 윤곽이 보였다.

이제는 류하도 창백해졌다.

“으, 아악!”

“공주마마, 서두르세요, 어서 물에서 나오십시오!”

“잠깐, 그런데 온천에도 물뱀이 살아?”

허겁지겁 온천에서 기어 나오던 류하는 문득 의문을 품고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하는 울상이었다.

“몰라요, 사나 보지요! 어서 올라오십시오, 마마.”

“그래, 다 올라왔…….”

다 올라왔어.

말을 끝맺어야 하는데, 그 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꺄악!”

제하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류하는 이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비명을 질러야 할 쪽은 나인데, 왜 쟤가 저렇게까지 난리인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아.”

상대편에서 흐릿한 신음을 토했다.

그냥 물속에 뛰어들까? 유일하게 잠잠한 류하는 아득하게 궁리했다.

저 안에 진짜 뱀이 있든 없든, 그 뱀이 독사든 아니든 그냥 물속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무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저 비명이, 비명을 듣고…….”

저쪽에 대장군이 있었다. 공주는 몸에 밀착한 내의 한 장만 달랑 입은 채 물가에 서 있었고.

온은 사과색으로 익은 얼굴로 손으로 덮어 감추더니, 빙글 뒤돌아 류하를 등졌다.

그가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 경계해야 할 게 없으면 물러가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호위의 본분을 다하려는 모습이 참 필사적이었지만, 류하는 미처 그를 기특하게 여길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머릿속이 새하얬다. 이 상황과 아무런 상관없는 괴상한 잡생각만 뇌리를 날아다녔다.

“……없습니다. 물러가도 좋습니다.”

류하는 마침내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사이 제하가 허둥지둥 외투를 꺼내 공주의 어깨에 둘렀다.

“그럼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온은 내리 공주를 등진 채 뻣뻣하게 말했다. 한데, 등지고 있어도 등진 것 같지가 않았다.

너무 불경스러워 차마 묘사하지도 못할 기억이 망막에 각인된 듯 달라붙어 이 정직한 남자를 괴롭혔다.

굴곡에 감긴 비단. 우윳빛 속살. 봉긋하게 드러난 곡선과 잘록한 윤곽, 그 아래로 흘러내리던 한 폭의 그림.

곧장 시선을 돌리지 못한 것도 죄라면 죄였으니, 만약 밝혀진다면 황제께서 제 목을 쳐도 할 말이 없었다.

“네, 그러세요.”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류하는 떠오르는 대로 지껄였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게 훨씬 친절할 뻔했다. 온은 지금 공주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눈꺼풀 뒤에 새겨진 그 망측한 풍경이, 저 가냘픈 음성과 맞물려 청각으로도 그를 자극했다.

온은 인사도 생략하고 뚜벅뚜벅 멀어졌다.

목례도 없이 멀어지는 건 관습적으로 상당히 무엄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눈을 마주치는 게 훨씬 무엄할 것 같아서 그는 결국 도망쳤다.

“공주마마, 송구합니다. 정말, 너무 송구합니다.”

옆에서 제하가 울먹였다. 류하는 궁녀를 무시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돌아섰다.

류하는 발치에서 긴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수면을 콕 찔렀다.

뱀으로 오해받은 물체가 두둥실 떠올랐다. 또 다른 나뭇가지였다.

“뱀이 아니네.”

류하는 차분하게 지적했고, 제하는 이제 거의 기함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착각 때문에 대장군이 달려와 공주를 거의 알몸 상태로 목격했으니, 제게 도대체 어떤 벌이 내려질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제하는 떨리는 눈으로 류하를 돌아보았다. 이제라도 꿇어앉아 빌어야 하나? 그런데 머릿속이 텅 비어서 몸마저 느리게 움직였다.

류하는 거의 자기만큼이나 정신이 나간 듯한 어린 궁녀를 멍하니 보다가, 요란하게 한숨지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화풀이해 봤자 뭐하겠니.

“제하야.”

“네, 네! 마마.”

“내가 어디서 읽어 본 적 있는데, 물뱀은 따뜻한 물에 살지 않는대. 그러니까 온천에서 뱀 만날 걱정은 하지 마라.”

“네, 네에, 공주마마. 황송합니다. 그게, 송구합니다.”

“됐어. 비명은 나도 지르지 않았느냐.”

공주의 태도는 표면적으로는 태연했고, 그 고아한 반응을 보며 제하는 다시금 동경심에 휩싸였다. 오오, 이것이 바로 왕족의 평정이구나!

평정은, 개뿔. 지금 류하는 머릿속에서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며 데굴데굴 구르는 중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봤다. 봤어. 다 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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