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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7)화 (7/123)

7화

세 번째 날이 밝았다. 오늘의 경로는 일행을 도시 밖으로 이끌었다.

대륙 남부의 너른 평야와 동쪽으로 보이는 삐죽한 산맥의 만년설이 절경을 이루었다.

류하는 그 모든 걸 창밖으로 구경했다. 평생 별궁에서만 살았던 자신에게 처음 허락된 세계. 늘 책으로만 접한 세계. 어쩌면 동경했고, 어쩌면 무관심했던 세계.

어찌 보면 얼굴도 모르는 황제 놈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제멋대로 혼인을 명령한 덕분에 내가 그 자그마한 감옥에서 탈출했으니.

하지만, 지금 나는 그저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옮겨가고 있는 걸지도 몰라.

류하는 우울해져서 창가에서 멀어졌다. 오늘은 너울을 벗고 있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창밖으로 대장군과 눈이 마주친다면 서로의 얼굴이 더욱 선명히 보일 텐데, 어쩐 일인지 오늘 대장군은 마차 안에서는 도통 보이지 않는 각도로 말을 몰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붙어 있더니만.’

류하는 속으로 힘없이 고시랑댔다.

‘……피하는 건가.’

나를? 그자가 왜? 대체 뭐가 그렇게 걸려서?

대장군이 자신을 대상으로 그렇게 조심스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따지자면, 자신과 그 사내의 관계에서 그는 온전히 멋대로 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말만 형수고 시동생이지, 사실 류하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연장자의 신부로 가는 중이니 형식적으로는 내가 윗사람이지만, 나는 한낱 소국의 공주인걸. 저 사내는 제국의 황족이고.

‘피할 필요는 없는데.’

그대가 원한다면, 오히려 내가 그대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피해 다녀야 하는 쪽이거늘.

‘착한 건지, 고지식한 건지.’

어제는 특식과 담요를 가져다주고, 오늘은 나와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는 사내. 종잡을 수 없었다.

혼란 속에서도 여정은 이어졌다. 아무리 타도 익숙해지지 않는 마차의 덜컹대는 움직임을 류하는 성심껏 인내했다.

드디어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일행은 야영을 위해 멈췄다. 류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마차에서 내렸다.

“조심하십시오, 공주마마.”

마차에서 벗어나게 된 게 너무 기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제 손을 잡고 내리십시오.”

아무리 나를 필사적으로 회피하는 이자도, 마차에서 내가 내릴 때만큼은 꿋꿋이 다가와 도움을 건넨다는 사실을.

정말, 정말 싫지만, 불편해서 미칠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류하는 온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온은 견고한 체온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며 가볍게 당겼다. 류하는 온이 당기는 대로 사뿐히 발을 디뎠다. 신발이 땅에 닿았다.

간격은, 여느 때처럼, 너무 좁았다. 잘못 고개를 틀었다가는 숨결이 스칠 거리.

온은 곧장 류하를 놓아주었고, 류하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겉으로만 아무렇지 않았다. 속으로는 왜 이렇게 첨예하게 긴장되는지 류하 본인도 도통 모를 일이었다.

“아닙니다.”

온도 겉으로는 태연했다. 그는 주군의 신부를 모시는 깍듯한 태도로 짧게 인사한 뒤 돌아섰다.

궁인들이 류하를 막사로 모셨다. 류하는 대장군에 관한 생각을 애써 떨치며 궁인들을 따라갔다.

그 결과, 굳이 애쓰지 않아도 온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렸다.

“이곳이 내 숙소라고?”

대장군이고 뭐고, 다른 일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류하가 날카롭게 따지자 궁인은 다소 당황해서 우물우물 아뢰었다.

“네, 공주마마. 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시면 됩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류하는 한평생 별궁에서 갇혀 자랐다.

그곳은 갑갑하고 지루했으나, 적어도 왕궁의 기본적인 안락함을 전부 갖춘 곳이었다.

“……그래, 알겠다.”

야영은 당연히 처음이었다. 땅바닥에 천을 깔고 자는 것도.

물론 귀하신 분의 편의를 위해 두툼한 이불을 깔고 따끈한 화로를 덥혀 놨지만, 평소보다 열악한 환경임은 분명했다.

류하는 유치한 푸념을 참음으로써 왕족의 품위를 지켰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불편하게 잠들 텐데, 혼자 징징대지는 말자.

그래도 표정이 조금 부루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주마마, 먼저 행장을 풀고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목욕물을 먼저 들이라 할까요?”

시무룩해진 공주에게 궁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류하는 애써 표정과 마음을 추스르며 선선히 대답했다.

“목욕을 먼저 하고 싶구나.”

그러다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에 물이 있니?”

강이든 못이든, 물이 나는 곳이 있어야 목욕물을 길어올 텐데.

아까 류하가 마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얼핏 둘러봤을 때, 주변에 그런 건 없었다.

“야영장 근처에 온천수가 있다 합니다. 거기서 아이들이 물을 길어올 것입니다.”

“온천 어디?”

“여기서 북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작은 숲이 있어 거기서 샘물을 긷는다 하였습니다.”

숲을 본 기억은 있었다. 딱 봐도 꽤 걸어가야 도착할 만큼 다소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과연, 거기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역할의 궁인들은 벌써 뚱한 표정이었다.

물통을 갖고 숲까지 갔다가 더욱 무거워진 통을 들고 돌아와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류하는 다시 머리를 굴린 끝에 결정을 내렸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온천에 직접 가서 목욕하지.”

“네?”

“번거롭게 먼 곳에서 굳이 물을 길어 올 필요 없어. 내 한 몸 직접 갔다 오면 되지 않느냐.”

이참에 아랫사람의 수고를 덜어 주려는 자애로운 상전 흉내를 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궁극적으로는 탈출이 목표지만, 그전까지는 궁인들과 계속 봐야 할 사이니까.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나쁠 건 없지.’

확실히, 방금까지만 해도 불퉁하던 몇몇 궁인의 표정이 훨씬 풀어진 게 보였다. 류하는 만족했다.

‘좀 걷고 싶기도 하고.’

내내 마차에 갇혀 이동하다가 또 천막에만 있을 생각에 좀이 쑤셨다.

물통을 들고 오가기에는 먼 거리지만, 단순히 산책 삼는다면 숲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오나 마마, 숲속으로 떠나셨다가 변고라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요?”

“내가 무슨 변고를 당한다는 거지?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혼자 갈 수 있을 리가 없지. 단지 후원에서 산책할 때도 호위 및 감시자가 따라붙는 처지거늘.

“대장군께 호위를 맡기면 될 것 아니냐.”

또, 그 사람과 함께해야 했다. 좋은지 싫은지 헷갈렸다.

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생각했을 때 그자와 친해질 기회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글쎄.

어제 오후부터 자신을 은근히 피하는 그 사내를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배 속이 울렁거렸다.

“황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누구한테 폐를 끼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주가 그렇게까지 고집하는데 엄연히 아랫사람인 궁녀가 끝까지 항의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원래 물 길어오는 역할이던 어린 궁인들은 이제 아예 대놓고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대장군을 모셔 와라. 가서 내가 온천으로 직접 가서 목욕하길 원한다고 말씀드려.”

“네, 마마.”

“그리고 얘야, 오늘 목욕 시중은 네가 들지 않겠니?”

류하는 여태 구석에서 조용히 서성이던 월국 궁녀를 지목했다.

앳된 얼굴의 그 궁인은 공주의 말을 듣고 소스라쳤다.

“제, 제가 말씀이십니까, 마마?”

“그래, 오늘은 네가 나를 도왔으면 좋겠구나.”

사실, 저 아이가 가장 얌전하고 만만해 보여서 내린 결정이었다.

휘국 궁인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기를 못 펴는 월국 궁인 중, 유독 어려서 더더욱 움츠린 아이.

별궁에 있을 때도 가끔 저 아이가 오가는 것을 봤다. 허드렛일을 했던가.

당연히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었다. 오늘이 사실상 첫 대화였다.

“황송합니다, 마마.”

어린 궁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답했다. 흠, 황송할 것까지야. 류하는 역으로 머쓱해졌다.

하여, 공주의 목욕을 위해 숲에 다녀올 일행이 결정되었다. 공주 본인과 대장군 휘온, 그리고 월국의 어린 궁녀였다.

얼마 못 가 류하는 자신의 행동을 격하게 후회했다.

산책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자기 옆에 나란히 걷는 이 돌 같은 사내가 문제였다.

‘와, 정말 한마디도 안 하네.’

대장군은 다시 빈틈없이 과묵했다.

그래도 그저께 밤에는 우는 공주를 달래고 차를 따라 주며 놀랍도록 다정하게 굴더니, 이제는 첫 만남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그냥 내가 싫은 거야?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래?’

설마, 셋 다인가. 류하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길 거부하는 온의 경직된 옆모습을 힐끔대며 너울 뒤에서 입술을 물었다.

‘그냥 조금, 아주 조금 편해지는 것도 안 되냐고.’

예비 시동생과 예비 형수. 황제의 신하와 황제의 신부. 친해지기 쉬운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렇게 절박한데…….’

조금만, 그저 아주 조금의 빈틈만 허락해 준다면. 그럼 나는 기꺼이 그대를 아군 삼을 텐데.

평생 살면서 내 편이라곤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뿐이 없었던 기분을 그대는 모르지.

모두가 나를 외면할 때 혼자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공포의 세월을 그대는 모를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대를 보면 이토록 절실해.

예비 시동생의 마음을 얻어 어떻게든 도망칠 틈을 얻어 보겠다는 막장 계획이 성공하든.

아니면, 결국 예정대로 속절없이 황궁에 끌려가든.

류하는 비빌 언덕을 원했다. 붙잡을 동아줄을 원했다.

내가 도망치는 걸 도와줘도 되고, 나중에 내가 살벌한 황궁에서 현지인들의 텃세를 견딜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 줘도 된다.

가장 작은 도움마저 간절했다.

그런데 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사내는, 지금 내 앞에서 저리도 목석같다.

‘그래. 저자가 내게 살가울 이유는 없지.’

류하는 씁쓸하게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 나 혼자 절박하지, 이자는 절박할 이유가 전혀 없다. 끌려가는 나와 달리, 이자는 고향에 가고 있는걸.

류하는 단념 속에서 발을 디뎠다. 그러다 문득 미끄러졌고,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조심하십시오.”

그러나 실제로 자빠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단단하고 민첩한 팔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휘감아 그녀를 지탱해 준 덕에.

“숲길이 험해서 다치실까 두렵습니다.”

나직한 음성이 너울을 스치며 류하의 귓가에 닿았다.

류하는 짧게 숨을 참았고, 그녀가 다시 숨을 내쉴 때쯤에 온은 이미 팔을 거두고 물러난 뒤였다.

“그대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답하는 음성은 다소 서늘했다. 온은 살짝 당황해서 돌아보았다.

얇은 너울 너머 여인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시선까지 냉담한지는 알 수 없었다.

“잡아 줘서 고맙습니다.”

그대도 내 안위 같은 건 안중에도 없겠지.

형이자 황제의 신부를 보호해야 하기에 나를 고가의 인형쯤으로만 다루는 걸 거야.

제멋대로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것도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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