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류하는 온에게 살짝 웃어 주었고 온은 고개 숙여 인사했으며, 예비 형수와 예비 시동생의 훈훈한 분위기를 보고 궁인들은 더욱 떨었다.
다음 날 실제로 궁인들이 바뀌었고, 긴긴 하루는 그 전에 저물었다.
새로 류하의 시중을 맡게 된 휘국 궁인들은 확실히 더 깍듯했다.
원래 기본이 더 잘 잡힌 자들인지, 아니면 대장군의 특별 지시가 있었던 건지 류하는 알 길이 없었다.
불손한 타국 궁인들과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어진 류하는 그나마 편해진 상황에 한시름 놓았다.
이제는 정말 온전히 탈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점찍은 탈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어제 자신들의 첫 만남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공주마마, 간밤에 편히 주무셨으니까?”
“네, 덕분에요. 대장군도 편안하셨습니까?”
“제가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군의 거의 무뚝뚝할 만큼 정중한 태도는 변함없었다. 딱히 말투나 눈빛이 누그러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저렇게 굳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어제보다는 엄청난 관심에 속했다.
대장군의 태도 변화에 잠자코 당황한 건 아랫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류하 본인도 사실은 좀 얼떨떨했다. 얼떨떨함은 환희를 동반했다.
‘그래, 두 번째 방안이 정답이었어!’
동정심을 사고,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어머니의 두 번째 조언이 정답이었나 보다.
돌로 빚어진 듯한 저 사내에게 그 방법이 먹혔다는 게 다소 의외이긴 했지만, 어쨌든.
류하는 격한 안도를 감추며 온과 담백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후, 어제처럼 마차에 탔다.
<다정다감한 성품의 사내거나 책임감이 강한 사내라면, 그 앞에서 가련한 척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다정다감이라. 그것까진 모르겠고, 적어도 책임감 하나는 분명한 듯했다.
‘어제 나를 울린 게 어지간히 미안했나 보지?’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대장군 때문에 운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이 터졌으니, 상대방 쪽에서 오해하고 절절맬 만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어제저녁에 그가 보인 의외의 다정함도 전부 사무적인 거리감에 묻혀 사라졌을 거로 예측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대장군은 어젯밤의 연속이었다.
간밤의 평안함을 묻는 인사도, 부드럽게 손을 쥐어 마차에 오르는 걸 돕는 동작도 전부.
‘하긴, 그만큼 믿음직한 자이니까 일국의 황제가 신뢰하고 일을 맡기는 거겠지.’
적어도 제 관리 아래 있는 누군가 자기 앞에서 연약하게 울음을 터트렸을 때, 외면하거나 비웃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려는 사람.
류하의 심중에 희망이 일렁였다. 아직은 그가 자신을 각별하게 여기진 않을 테지만, 파고들어 붙잡을 만한 성품임은 분명해졌다.
‘좋은 사람 같아.’
휘국의 황족이자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탐욕스러운 폭군의 혈육이요, 충신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대가 마음에 연민이 가득한 선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대가 나를 쉽게 동정하도록. 나를 돕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좋은 사람이어야 해.’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미안해졌다.
차라리 대장군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양심의 가책 따위 없이 마음껏 이용했을 텐데.
그러나 만약 그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연민과 책임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써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아.’
그때, 창밖으로 무심코 눈이 마주쳤다. 마차 옆에서 천천히 말을 몰던 온은 이쪽을 힐끔대고 있었다. 너울과 창문 너머 시선이 마주쳤다.
류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녀는 즉시 창가에서 멀어졌다.
벽에 눌어붙고 싶은 것처럼 좌석의 뒷면에 몸을 찰싹 붙이며 류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왜?’
왜 이렇게 놀랐지?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잠시 멎을 것처럼 추락했던 심장이 이제는 갑자기 빨리 뛸 이유도 없었다.
류하는 너울 아래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무 뜨거웠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류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봄이 오긴 오나 보구나.’
따뜻했다. 기온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아직도 공중에는 꽃샘추위의 쌀쌀한 기운이 남았지만, 그래도 겨울이 빠르게 저물고 있음은 확실했다.
‘따뜻해서 그런가 봐.’
그래서 내 뺨도 이렇게 뜨겁고, 내 심장도 이렇게 빠른가 봐. 그런 거야.
드디어 합리적인 이유를 찾은 류하는 안심하며 다른 상념에 빠졌다.
한편, 온은 마차 밖에서 큰 혼란에 빠졌다.
‘나를 보자마자 피했어?’
눈물 때문에 부은 얼굴을 감추려는 건지, 류하는 오늘 마차 안에서도 너울을 쓰고 있었다.
창문에 너울까지 겹겹이 가로막았으니, 공주의 시선을 정확히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온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과 공주는 아까 분명 눈이 마주쳤다.
한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주는 흠칫하며 쪼르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온은 꽤 충격받았다.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이건가?’
온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말고삐를 그러쥔 그의 손등에 힘줄이 억세게 솟았다.
어젯밤 힘없이 울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죄책감과 동정심이 자꾸만 솟구쳐서, 어쨌든 자신이 돌보고 모셔야 할 사람이라서, 내리 곁눈질로 살피고 있었더니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서리치며 피하다니.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건 아니라, 꽤 상처였다.
온의 침울함은 오전 내내 이어졌다. 자신과 시선이 닿자마자 황급히 회피하던 공주의 모습이 머릿속을 거듭 헤집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을 지경이었다.
“어, 대장군님?”
그의 부하가 끝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조심스레 부를 때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이제 슬슬 점심을 위해 멈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다간 본인을 포함한 일행 전체를 굶길 뻔했다.
온은 두어 번 눈을 끔뻑이고 나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민망해졌다. 그는 곧장 자신을 다잡고 침착하게 지시했다.
“그러도록 하자. 사람과 말이 쉴 만한 곳을 구해라.”
“네, 대장군님.”
자신답지 않았다. 찰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점심시간까지 놓칠 뻔한 건.
아까 공주가 자신의 눈을 피한 게 생각보다 큰 충격이었나 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까지 곱씹을 만한 일인가.
곱씹는 것 그렇다 치고, 왜 이렇게 명치끝이 욱신대는 느낌이 드는 거지.
마치 섭섭한 마음처럼.
‘섭섭하긴, 무슨.’
온은 허튼 생각을 뿌리쳤다.
섭섭하다니. 미안함이겠지. 그 진주알 같은 눈물이 뇌리에 선명히 남아 이토록 거슬리는 것이다.
‘……안쓰러워.’
아마도, 이게 그의 진심이었다.
‘그래. 안쓰러워.’
안쓰러움. 미안함에 또 다른 감정이 얹어졌다.
하나씩 끊어 내야 하는데, 도려내야 하는데, 비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조금씩 늘어났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미안함이든 안쓰러움이든, 감정을 품는 건 자신의 자유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조공처럼 바쳐지는 공주가 가여운들 무엇 하리. 내가 모시는 이는 황제 폐하요, 내 모친의 목숨줄을 쥔 자도 황제 폐하인데.
그분이 신부를 원한다면, 기꺼이 바칠 수밖에.
황궁에 도착하기 전까지만이라도 공주가 평안할 수 있기를 온은 소망했다.
황궁에 도착해서도 기왕이면 잘 정착하고, 다른 황궁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황제 폐하의 총애를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태어날 때부터 부왕한테 내쳐졌다가 이제는 먼 이국으로 떠나는 저분이 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느새 그는, 진심으로 저 공주의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대장군과 실수로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뒤로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뭐, 멀리서 보기는 봤지. 하지만 온은 절대 다가오지 않았다.
‘진짜 뭐야, 저 사람?’
류하는 재차 혼란에 빠졌다.
만약 온이 정말로 다가오지 않는 것만으로 그쳤다면 실망했을지언정 혼란은 덜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온종일 그가 보여 준 행동은 퍽 모순적이었다.
‘이렇게 세심하게 챙겨 줄 거면서, 정작 얼굴은 마주치려 하지도 않고…….’
오늘 여관에서 쉬며 점심을 먹을 때, 휘국 궁인들이 공손히 다가와 류하에게 차와 과일을 내밀었다. 어제 식사 때는 없던 특식이었다.
류하가 의아해서 묻자, 궁인들은 대장군께서 공주마마께 특별히 전달드리는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여정 중에 지치지 않도록 체력 보강에 보태시라나, 뭐라나.
예비 신부는 벌써 예비 시동생한테 너무 많은 호의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 인간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지. 하나를 원해서 하나를 얻었더니 이제는 둘을 원하게 된다.
‘왜, 직접 전해 주지 않아?’
물론, 직접 음식을 전해 주는 등의 잡일은 궁인들의 몫이다.
류하도 온이 자신을 궁인처럼 시중들어 주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다만,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하길 원했다.
‘이렇게 신경 써 주면서, 왜 정작 아침 이후로 인사 한마디 없냐고.’
차와 과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후에 마차로 이동할 때는 중간에 난데없이 담요가 준비되었다. 공주가 기침하는 소리가 바깥까지 희미하게 들린 탓이었다.
사실 그건 추워서 한 기침이 아니라 목이 간질간질해서 나온 소리였는데, 류하는 왠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대장군이 전달하라고 지시했다는 그 담요를 류하는 결국 고분고분 몸에 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본인이 와도 되잖아.’
심지어 석반을 먹을 때도 차와 과일이 똑같이 도착했다. 이 정도면 그냥 가볍게 와서 ‘식사는 어떠셨습니까?’라고 물어봐도 괜찮을 텐데.
거창한 교류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와 하루아침에 각별해질 거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간밤에 편히 주무셨냐고 물었듯. 이번에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조급해하지 말자.’
류하는 느리게 심호흡하며 자기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수록 초조함은 깊어졌다.
‘아직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그러나 한 달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냥 이제 슬슬 체념하고 황궁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나,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류하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아직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류하는 그날, 울지 않고 잠들었다. 끝까지 온은 찾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