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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궁의 은밀한 연서 (5)화 (5/123)

5화

“고맙습니다.”

류하는 한껏 처량하게 속삭였다. 이어 시선을 들고 사내를 보며 살짝만, 아주 살짝만 웃었다.

가냘프게 떨리는 입술이 청초한 호선을 그렸다.

온은 움찔했다. 그는 잠시 류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눈물 젖은 얼굴을 닦고자 너울을 잠시 벗었기에, 붉게 물든 류하의 얼굴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온의 심장 부근 어딘가가 이상하게 울렁였다. 온은 그 울렁임을 무시했다.

“무슨 일로 우셨는지 제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온이 질문했다. 말투는 여전히 따스했으나, 그 저변에는 다시 냉한 적의가 흘렀다.

이번에 그 무정한 태도는 공주가 아닌 다른 이들을 향했다.

‘궁인들이 모욕을 줬나?’

온은 류하를 모시는 휘국 궁녀들을 의심했다.

그 본인도 한평생 궁에서 나고 자랐기에 잘 알았다. 궁인들만큼 모순적인 집단이 또 없었다.

‘본래 궁인들이 그다지 친절한 부류는 아니지.’

때로는 제국의 고귀한 황실을 모시는 가장 우아한 집단이면서, 때로는 천박할 만큼 잔인한 형태로 텃세를 부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면서 모든 걸 주워들었고, 누구보다 입이 무거울 듯하면서도 매번 궐내의 소문이 새어 나가는 주된 통로가 되었다.

‘충분히 공주마마를 괴롭혔을 수도 있어.’

왕족을 모독하는 일개 궁인이라니, 얼핏 들으면 터무니없는 억측이었다.

그러나 현재 휘국과 나머지 나라들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리 터무니없는 생각만은 아니었다.

온은 점점 우울해졌다. 연민, 그리고 죄책감. 자신이 감히 월국의 공주에게 품을 자격도 없는 감정이었다. 그가 애초에 여기 있는 이유를 고려했을 때, 더더욱.

‘말로는 호위, 사실상 감시.’

자기 형님께 제물로 바쳐진 약소국의 인질을 북쪽의 감옥까지 고이 모시고 가는 일이다.

온의 심장 부근이 다시 울렁였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그냥…… 고향이 그리웠나 봅니다. 별거 아니에요.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류하는 여전히 애처롭게 연기했다. 그녀는 구슬프게 중얼대며 시선을 다시 내리깔았다.

눈꺼풀을 낮추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아직 눈물의 흔적이 남은 아리따운 얼굴은 가녀리기 짝이 없었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왕궁을 출발한 게 고작 오늘이고 아직 월국 영토를 떠나지도 않았는데, 고향이 그립기는 무슨?

게다가 류하는 휘국에 가고 싶지 않은 것과 별개로 월국의 감옥 같은 궁궐을 벗어난 게 무척 기뻤다.

스스로 생각해도 허술한 변명에 류하는 다시 자괴감을 느꼈다.

‘젠장, 대장군이 속으면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류하를 바라보는 온의 시선은 한없이 심각했다.

그는 괴로운 낯빛으로 주춤대다가 침울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힘이 닿는 대로 전부 돕겠습니다.”

류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의 혜안은 여기까지 내다본 건가? 정말 대장군이 나를 불쌍히 여기는 거야? 벌써 고향이 그립다는 내 어설픈 변명을 듣고도?

‘세상에.’

이 사내는 착한 걸까, 아둔한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의외로 명배우인 걸까.

이 사내가 착하거나 아둔할 리는 없으니, 실은 내게 엄청난 연기력이 잠재되어 있던 걸지도.

이 사내가 착할 리는 없다. 주변의 약소국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휘국 황제의 충견으로, 여태 이자의 칼에 목숨을 잃은 군인이 수십, 수백, 수천일 테니.

이 사내가 아둔할 리도 역시 없었다. 지금은 아니어도 한때 대국의 황태자였던 사람이다. 거의 평생 군주 수업을 받았던 이가 멍청할 리는 없지.

그렇다면 내가 알고 보니 명배우라는 건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대는 이미 큰 도움이 되고 있는걸요.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진실이 뭐든 간에, 류하는 절박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밀고 나가면 그녀는 정녕 든든한 아군을 생길지도 모른다. 그녀의 태도는 꿋꿋하게 처연했다.

“제가요?”

온은 어리둥절했다. 진심으로 의아해서 되묻는 바였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자신이 오늘 이 사람에게 친절하게 군 기억은 없었다.

“그럼요. 지금도 이렇게 다정하시잖아요.”

류하는 떠오르는 대로 지어내며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순간, 깨달았다.

“황송합니다.”

온이 웅얼댔다.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류하는 그를 흘깃하더니, 고개를 수그렸다. 자신을 문득 후려친 거북한 깨달음을 말없이 곱씹으며.

이 사내는, 그러니까, 지금 실제로 다정하다.

“우는 걸 달래 주고, 내가 왜 울었는지 물어봐 주고, 따뜻한 차도 준비해 주고……. 다 내게 과분한 호의예요.”

말하면 말할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본인 말의 사실성이 그녀를 칼처럼 후볐다.

실제로 온은 다정했다. 우는 류하를 달래고, 그녀가 왜 우는지 물어봐 주었으며, 그녀가 마시고 진정할 수 있도록 따뜻한 차를 대령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과분한 호의였다. 류하가 스스로 내뱉은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고작 제물로 끌려가는 약소국의 공주에게, 이 모든 건 차고 넘치게 과분했다.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하찮고 초라한지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라, 마음이 쓰렸다.

“과찬이십니다.”

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회의했다.

글쎄, 과연 내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이 오만한 친절이 당신께 진정한 호의가 될 수 있을까.

그때,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왔다. 시종은 식탁에 뜨끈뜨끈한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뒤 공손히 물러났다.

“차를 좀 따라 드릴까요?”

“고맙습니다.”

온이 권하자 류하는 응했다. 온은 주전자를 집기 위해 몸을 숙였다. 류하가 문득 말했다.

“불편하게 서서 그러지 말고 내 옆에 앉으세요. 자리는 많습니다.”

온은 잠시 주춤하더니, 잠자코 복종했다. 그는 류하가 팔을 뻗어야 겨우 스칠 만한 간격을 두고 그녀와 같은 장의자에 앉았다.

그가 찻잔에 음료를 따랐다.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류하는 잔을 쥐고 음료를 들이켰다. 차는 따뜻했고, 향긋했다. 바보처럼 다시 눈물이 날 뻔했다.

“맛있네요.”

류하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제 억지로 눈물을 참느라 온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이용해 온의 동정심을 유발한 건 나름의 계략이었지만, 처음에 흘린 눈물 자체는 오롯이 진심이었기에, 그녀의 기분은 여전히 침통했다.

“다행입니다.”

온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차라도 맛있어서. 그런 거라도 내가 해 줄 수 있어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결코 평안하지는 않되, 아까처럼 불편하지만도 않은 침묵이었다.

각자 본인의 우울한 생각을 되씹느라 바빠 서로 어색하게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류하는 자칫하면 정말 황제의 후궁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자신의 미래를 음침하게 상상했고, 온은 자신이 무력하게 눈감을 수밖에 없는 여러 현실을 부끄럽게 사색했다.

이대로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는 나란히 밤이라도 새울 판국이었다.

이번에도 온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가 류하를 돌아보았다.

“마마, 너무 오래 있다간 마마의 취침 시간이 늦어질까 두렵습니다.”

“아아.”

온의 조심스러운 지적에 류하는 퍼뜩 놀라며 남은 차를 삼켰다.

음료는 그새 조금 식었으나, 여전히 향긋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온은 당황하며 류하를 만류했다.

이미 늦었다. 꼴깍꼴깍 차를 들이켜던 류하는 중간에 사레가 들렸고, 찻잔이 거의 다 비었을 때쯤에 요란하게 기침했다.

“콜록!”

“마마, 괜찮으십니까?”

공주는 쿨럭대고, 대장군은 허둥대고, 잠시 짧고 굵은 생난리가 펼쳐졌다.

온은 감히 형의 여인을 함부로 만지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다가, 류하의 기침이 격해지자 죄짓는 기분으로 류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우윽, 쿨럭…….”

“좀 괜찮으십니까?”

“네, 큭, 크음!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류하는 다시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양 볼은 딸기색이었다.

‘아, 왜 계속 이 모양이지.’

짜증 내고 울고 단풍나무가 뭔지도 모르고, 이제는 사레까지.

이 사내 앞에서 창피해지지 않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내가 이 사내를 대체 꾈 수나 있을까.

기적적으로, 온은 끝까지 류하에게 다정했다.

류하의 기침이 완전히 그친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정중하게 권했다.

“이제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제국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낯선 처소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잠자리는 잠자리였다.

긴긴 하루 끝에 류하는 퍽 지쳤다. 어서 쓰러지듯 이불 속에 가라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류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너울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이 너울 뒤로 사라질 때, 온의 명치끝이 아쉬움으로 욱신댔다는 사실은 오직 그의 무의식만 알았다.

“공주마마.”

“네?”

“원하신다면, 현재 마마를 모시는 궁인들을 전원 교체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또한 반가운 소리였다. 그러나 류하는 신중했다.

자신이 오늘 운 이유에 아까 그 궁인들이 연루되었다는 건 온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굳이 그 사실에 쐐기를 박고 싶지 않았다. 고자질쟁이처럼 보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대장군님.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서 류하는 오늘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재능을 십분 활용했다.

시선을 처량하게 내리깔며 자그맣게 간청하자, 온의 결심은 더더욱 굳었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마마께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느새 생각보다 마음 여린 공주님으로 각인된 류하를 위해 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까 그가 그녀에게 말했듯이.

“전에 제가 드린 말씀은 진심입니다. 힘이 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당신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건 줄 수 없으니, 이런 얄팍한 위선이라도 베풀게 해 줘. 이건 그의 무력한 속죄였다.

“……고맙습니다, 대장군.”

류하가 속삭였다. 여러모로 진심이기도 했고, 또한 아니기도 했다.

온은 류하와 함께 객실을 떠나 그녀를 처소로 안내했다. 나란히 걷는 내내, 둘 다 조용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류하의 처소 앞에 도착했다. 아까 후원에서 공주와 같이 있었던 휘국 궁인들이 문전을 지키고 있었다.

류하와 온이 함께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이미 해쓱하던 궁인들의 낯이 한결 파리해졌다.

류하는 온을 의식해 내리 처연하게 풀죽은 모습을 유지했고, 온은 겁먹은 궁인들을 서늘하게 훑었다.

그러나 공주를 향한 음성은 더없이 온화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공주마마.”

그건 그저 끌려온 여인을 위한 연민, 예비 형수님을 향한 마땅한 예의, 그뿐이었다. 아직은.

“안녕히 주무세요, 온 대장군.”

그리고 공주는 오직 그를 꾀기 위해 연기했다. 적어도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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