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무지한 야만족 계집이라며 무시하려나.’
류하는 입술을 물었다. 제국 사람들의 약소국을 향한 경멸이야 익히 아는 바였고, 눈앞의 대장군은 뼛속까지 휘국의 황족이었다.
그러나 온은 공주를 비웃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떠올리고 본인의 무신경함을 오히려 반성했다.
‘맞다, 월국에는 단풍이 거의 없지.’
그러니 월국의 공주가 자신이 단풍나무가 뭔지 안다는 사실을 엄청난 업적으로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하거늘, 자신이 그녀를 너무 천치 취급한 것 같아서 그는 뒤늦게 뉘우쳤다.
비록 뉘우치긴 했으나, 이제 와서 사과할 길은 없었다. 대체 뭐라고 말해? 송구합니다, 마마, 순간 당신을 상식 없는 분으로 오해했어요?
“음, 그리고, 후궁전 후원에는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규모가 워낙 크고 물이 깊어서 호수라고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습니다만.”
온은 솔직한 사죄를 무기한 미루며 다소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어색한 태도에 류하는 조금 풀어졌다. 적어도 대장군의 말투에 조롱은 없어 보였다.
“기대되네요.”
류하는 담백하게 맞장구쳤다. 실없는 기만이었다. 연못이든 뭐든, 부디 절대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온은 잠시 머뭇대다가, 무어라 덧붙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부하가 접근했고, 온은 공주 대신 군졸을 돌아보았다.
“대장군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여기서 제공한 말먹이가 잘 맞지 않는가 봅니다. 말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휘국 군졸이 다가와 상전에게 고했다. 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동 중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황궁에서 기른 까다로운 군마는 최고의 식사가 익숙했고, 타지에서 먹이는 여물의 질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심술을 부리기 일쑤였다.
“전반적으로 다 그런가?”
“아니요, 몇 마리만 그렇습니다.”
“그럼 말먹이의 문제보다는 그 말들의 문제 같은데. 내가 한번 가서 살펴보지.”
다소 번거로운 잡무를 떠맡게 된 온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가 공주를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상황을 멀뚱히 지켜보던 류하는 온과 눈이 마주치자 괜히 흠칫했다.
“호위 도중에 송구합니다, 마마. 마구간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대장군. 다녀오세요.”
류하는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저놈이랑 있으면 불편하지만 지금 이렇게 떠나보내면 언제 또 대화할 기회가 있을까 싶어 초조해졌다.
하긴, 영영 가는 것도 아니고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는데 그리 불안해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너무 지긋지긋하게 많이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온은 공주에게 꾸벅인 뒤 부하와 함께 사라졌다. 류하는 멀어지는 대장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남은 궁녀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너희가 안내해 주겠니?”
대장군 없이도 산책은 이어졌다. 류하는 발치에 걸리는 자갈돌을 툭툭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후원을 천천히 맴돌았다.
‘만약 이대로 저자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면…….’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아까 단풍나무를 둘러싼 작은 마찰은 억지 혼인에 대한 류하의 반감을 더욱 부추겼다.
서로 익숙한 식생마저 달라 사소한 부분에마저 엇갈리고 부딪치는데, 내가 과연 대장군의 호의를 사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정말로?
정말로, 내 저주받은 ‘능력’을 사용해 여기서 벗어나야 하나?
“공주마마. 아까 대장군님께서 하다 마신 설명을 계속해 드릴까요?”
불쑥 끼어든 궁녀의 음성이 공주의 상념을 갈랐다. 휘국의 궁녀였다. 류하는 걸음을 뚝 그치고 빤히 쳐다보다가, 느리게 말했다.
“그래, 그러든가.”
어디 한번 지껄여 보든가, 그런 뜻에 가까웠다.
월국과 휘국의 궁중 법도가 서로 파격적으로 다르지 않은 한, 휘국에서도 궁인이 상전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예바른 행동일 리 없었다.
류하가 묻지 않았는데 알아서 입을 놀린 궁인의 행태는 참으로 괘씸했다.
류하는 소국의 공주를 향한 건방진 태도를 재차 확인하고 넌더리가 났다.
“아까도 들으셨겠지만, 후궁전의 후원은 사시사철 아름답습니다. 겨울에는 함박눈이 쌓여 마치 신선도를 그린 듯하고, 봄철에는 꽃이 만개하며,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붉게 단풍이 들지요.”
어쩌고저쩌고. 류하는 궁녀가 달달 읊는 온갖 시적인 표현을 심드렁하게 흘려들었다. 궁녀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전과 내전의 후원은 더욱 수려합니다. 후궁전에 하나 아름다운 게 있다면 내전에는 열 개가 아름답고, 대전은 백 개가 아름답죠. 후궁전에 아름다운 게 열이 있다면, 내전에는 백 개가 되고 대전에는 천 개가 될 것입니다.”
대전은 황제의 처소였고, 내전은 황후의 처소였다. 류하는 이제 슬슬 진지하게 짜증이 났다.
‘내 앞에서 자기 나라 황궁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류하는 오만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궁인의 앞에서 대놓고 귀를 후비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차라리 대장군이 어서 돌아왔으면 했다.
“아마도 마마께서는 아직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시겠죠. 황궁에 도착하셔서 직접 보신다면 아시게 될 겁니다.”
악의적으로 떠들던 궁녀는 이제 선을 넘었다.
너는 아직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겠지, 라는 말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너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궁궐에서 나고 자랐으니 아무것도 모르지? 하고 비꼬는 말일 터.
류하는 일순 울컥했다.
이 말도 안 되는 혼인을 명령받은 순간부터 속에 차곡차곡 쌓여 온 모든 아프고 추한 것들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표면 바로 아래에 넘실댔다.
폭발하면 안 되는데. 여기서 솔직한 성질머리대로 난리를 쳐 봤자 내게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머리로는 다 알면서,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류하의 눈이 얼핏 차갑게 빛나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마마.”
대장군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류하는 아슬아슬한 분노와 설움에 허탈감마저 더해졌다.
‘저딴 놈이 내 마지막 희망이라니.’
저 돌 같은 사내가, 지금 조금의 온기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 대국의 황제(皇弟)가 내 최후의 수단이라니.
저놈을 유혹해서라도 반드시 도망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던 자기 자신이 문득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류하는 끝내 무너졌다.
“흑…….”
그건 정녕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 어떤 계산도 없었다. 짜증이 솟구치고 설움이 북받치자 예고 없이 눈물이 솟았다.
그리고 그때 대장군의 경악한 표정을 보는 순간, 류하는 번개처럼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니면, 사내의 동정심을 사는 방법이 있어.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거지.>
하필이면 지금, 그런 조언이 생각났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운다.
게다가 그 사람은 완전히 남도 아니요, 엄연히 곧 자신의 인척 될 사람이었다.
좋든 싫든 조만간 자신의 형수가 될, 심지어 자신이 감시하고 호위해야 하는 여인이 훌쩍이고 있는데 멍청하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얼었던 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창백해진 궁인들을 서둘러 돌려보낸 뒤, 공주의 팔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그녀를 다른 객실로 이끌었다.
“앉아 계십시오.”
아늑한 객실에 도착한 온이 공주에게 부드럽게 청했다.
아무리 평소에는 무뚝뚝한 그라도 당장 울고 있는 사람에게 냉하게 굴 만큼 모진 인간은 아니었다.
공주는 물먹은 얼굴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온의 눈에 단지 처량해 보였으나, 사실 류하는 속으로 발을 구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으아아, 창피해……!’
감정이 가라앉고 나자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까 단풍나무 때문에 민망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치심이었다.
동정심을 사라느니, 보호 욕구를 자극하라느니, 어머니의 조언이 머릿속에 쾅쾅 울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돌아가신 모친의 기억조차 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동정심은, 무슨……. 난 이제 글렀어…….’
첫인상은 최악이고 아까 그놈의 식물 때문에 더 어색해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눈앞에서 질질 짠 꼴이라니, 절대 좋은 시작이 아니었다.
류하는 아찔해졌다. 이 사내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첫날부터 짜증 내고 울고 단풍나무가 뭔지도 모르고, 아예 총체적 난국으로 생각하겠지.
‘안 돼……. 이 사람 기억을 지우고 싶다.’
남의 기억을 지우거나, 시간을 되돌리거나, 차라리 그런 이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류하가 조용히 끙끙대는 동안, 온은 시종을 불렀다.
“따뜻한 차를 내와라.”
“네, 대장군님.”
대장군의 명을 받든 시종은 서둘러 사라졌다.
당분간 공주와 단둘이 남은 온은 껄끄러워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공주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대체 뭐를 해야…….’
호위는 익숙했다. 감시도 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는 여인을 달래는 건 각오한 일에 없었다. 온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니, 애초에 왜 운 거야?’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와 눈을 맞추더니 서럽게 펑펑 울었다.
얼굴이 문제라는 건가. 온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설마.’
내가 사람을 울릴 외모는 아닌데.
물론, 과거에 수많은 휘국 궁녀가 온 때문에 남몰래 애틋한 눈물을 쏟았지만, 온 본인은 이를 몰랐다.
‘아까는 그리도 당돌하더니.’
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낮에는 워낙 발칙하게 까불어서 기어코 그가 너울까지 건드리게 한 공주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그저 풀죽은 가련한 여자애였다.
올해 공주의 나이가 스물. 그녀보다 두 살 위인 온은 새삼 공주가 얼마나 어린지 상기했고, 한층 불편해졌다.
그 불편함의 실체가 연민과 죄책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주마마,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네…….”
온이 나직하게 묻자 류하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시선의 회피는 기실 창피함 때문이었지만, 온은 이번에도 저 모습을 불쌍함의 연장으로 해석했다.
“시종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따뜻한 음료를 마시면 더 편안해지실 겁니다.”
이제 사내의 음성에는 진정 온기가 있었다.
류하는 부끄럽고 민망하여 시무룩한 와중에도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아니면, 사내의 동정심을 사는 방법이 있어.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거지.>
설마. 설마 저 바위 같은 사내가 고작 내가 좀 울었다고 긍휼히 여기려고. 류하는 합리적으로 의심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녀는 이를 기꺼이 붙들고 늘어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