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객관적으로 온 대장군은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만약 형제의 외모가 서로 닮았다면 황제의 얼굴도 꽤 봐줄 만할 것이다.
‘아니야, 그만해. 천하의 미색이든 천하의 박색이든 상관없어. 나 이 혼인 안 할 거야.’
류하는 원치 않은 혼인에 묶여 내내 다른 이를 그리워하며 살아간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처럼 불행해지긴 싫어.’
어머니는 딸 덕분에 자신의 삶이 늘 즐겁고 알차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때로는, 머나먼 곳을 보며 아득한 비탄에 잠기곤 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달리 따로 연모하는 이가 없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진심으로 그리는 이가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다. 고작 몇 번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여전히 깊이 사모한다고. 그때마다 어머니의 눈빛은 참으로 처절했다.
‘그래도, 그런 뒷방 후궁으로 갇혀 살기는 싫어.’
차라리 내가 제국의 명문가 여식으로서 후궁이 아닌 황후 자리를 약속받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면 좀 고려해 봤을 텐데.
사실상 제물처럼 팔려 가는 자신은 힘도 사랑도 자유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게 참 싫었다.
‘어떻게든 탈출할 거야.’
저 대장군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없다면 군졸이라도 꾀어 볼 거야. 정 안 된다면, 그냥 맨몸으로 탈출할 수도 있지.
‘다른 방법이 정말 하나도 없다면, 그 능력을 쓰면 돼.’
하지만, 류하는 되도록 자신의 그 ‘능력’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온이 무심코 돌아보았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류하는 흠칫하며 곧장 물러섰다.
‘뭐야, 왜 이래, 너.’
심장이 너무 벌렁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웅크려 숨어 버린 류하는 스스로 엄중하게 다그쳤다.
‘뭘 이런 걸 갖고 다 놀라냐.’
이렇게 간이 콩알만 해서야 도망칠 수나 있겠니, 응? 류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행은 곧 관저에 도착했다. 관저에 속한 노비들이 손님들을 안내했다. 온은 직접 마차 문을 열었다. 류하는 그 전에 너울을 도로 장착했다.
“내리십시오.”
온은 아까처럼 손을 내밀었다. 방금 류하와 눈을 마주친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류하도 현명하게,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분고분 손을 맞잡았다.
류하는 마차에서 내려왔다. 땅을 미처 딛기 전에 또다시 치맛자락이 걸리적거렸고, 하마터면 류하는 볼품없이 넘어질 뻔했다.
“조심하십시오.”
그때, 품이 짧게 겹쳤다. 온은 숙련된 무인의 동작으로 여인의 몸을 가볍게 받쳤다.
“고맙습니다.”
류하는 다시 말했다. 그녀는 태연하게 중심을 잡았고, 온도 무심한 얼굴로 팔을 치웠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형의 여인을, 그것도 황제의 여인을 거의 끌어안듯 지탱한 동생.
고지식하게 따지자면 큰 불충이지만, 덕분에 류하는 치마를 밟고 넘어져 코가 깨지는 참사를 면했으니 전혀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거듭 당황했던 건 사실이었다. 반나절 전에 대장군이 공주의 너울을 걷었을 때와 비슷했다.
간격은 너무 좁았고, 여인의 코끝에 사내의 체취가 닿았다. 청량한 향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공주마마를 처소로 모셔라.”
“네, 대장군님.”
군졸들과 궁인들이 다가왔다. 류하는 순순히 그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대장군을 돌아보지 않았고, 온도 공주에게 끝까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동행의 첫째 날, 첫째 밤이었다.
관저의 숙소는 소박하지만 정갈했다. 그저 하룻밤 묵고 떠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방이었다.
“잠시 산책을 하고 싶구나.”
식사를 마친 뒤 류하는 궁인들에게 말했다. 월국 궁인들은 상전과 동행하기 위해 주섬주섬 움직였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난입했다.
“아직 혼례도 치르시기 전인데 함부로 움직이셨다가 몸이 상하실까 두렵습니다. 산책은 다음 기회로 미루시는 게 어떨지요?”
제국에서 내려온 궁인이었다. 류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이미 이곳에서 제국까지 머나먼 길을 가는 중인데, 여기서 조금 더 움직여 봤자 몸이 상하지는 않을 거다. 외려 가벼운 운동으로 체력을 길러 두면 도움이 되겠지.”
빙빙 돌려 말하느라 애먹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흰 그냥 꺼져, 라고 내뱉고 싶었다.
“멀리 나가지도 않고 경거망동하지도 않겠다. 그저 처소 앞의 뜰을 잠시 둘러보고 싶은 것뿐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면서 류하는 곱게 웃었다. 제국의 궁인은 다소 음산한 눈으로 공주를 응시했다. 잠시 뒤, 궁인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그럼 저와 이 아이들도 마마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마. 따라오렴.”
일종의 타협이었다. 제국의 궁인들은 약소국의 공주를 은근히 무시했고, 그 공주는 상대편의 텃세에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적어도 산책 여부에 관해서는 자신이 이겼으니, 감시하는 사냥개처럼 자신을 줄줄이 따라 나오겠다는 궁인들의 아집은 한 번쯤 눈감아 주기로 했다.
“너희는 방으로 돌아가 쉬도록 해라.”
류하는 본디 데리고 나가려 했던 월국 궁인들을 돌아보았다.
“하오나, 마마.”
“시중들 인원은 이미 충분하단다. 너희까지 따라 나올 필요는 없으니, 이만 물러가렴.”
양국 궁인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고작 처소 앞의 뜰을 산책하며 거느리기에는 부담스러운 숫자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공주마마.”
월국의 궁인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류하는 뒤늦게 그들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적의 적은 나의 적이라던가.’
비록 자신이 별궁에 유폐된 천덕꾸러기였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이들이지만, 타국의 궁인들이 일찌감치 같잖은 위세를 부리려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궁인들을 내 편으로 만들면 나중에 쓸 데가 있을 거야.’
이제 류하는 월국의 궁인들이 유일하게 모실 수 있는 고향 사람이었다. 만약 함께 황궁에 도착한다면, 그 낯선 곳에서 서로 버팀목이 될 수 있으리라.
물론, 류하는 애초에 황궁까지 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일단은, 얘네부터 처리하고.’
자신을 고집스레 뒤따르는 휘국 궁인들을 생각하며 류하는 한숨을 삼켰다.
하찮은 소국의 공주일 뿐이라고 그렇게 무시하면서, 동시에 뭘 또 이렇게 경계하는 건지.
류하는 너울을 쓰고 외투를 여민 뒤 밖으로 나갔다.
“공주마마. 이 시간에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나 멀리 가기도 전에 앞이 가로막혔다.
“산책이요. 후원에.”
류하는 너무 당황해서 다소 차갑게 내쏘았다.
그녀 앞에 귀신처럼 툭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온 대장군이었다.
“안에만 있기에는 너무 답답해서,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습니다.”
류하는 뒤늦게 자신이 이 사람에게 잘 보이기로 맘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투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온은 정중히 고했다. 류하는 조용히 경악했다. 산책할 때마저 따라붙는 호위 및 감시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 사내가 황명을 과하게 따르는 걸까, 아니면 원래 왕족과 황족은 다 이렇게 번거롭게 지내나? 류하는 음울하게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결론지었다.
‘아마 후자겠지.’
원래도 자기를 뺀 모든 왕족은 평소에도 이렇게 귀찮게 살았을 것이다. 궁녀며 호위며, 주렁주렁 따라붙었겠지.
천덕꾸러기 공주는 거의 방치된 채로 자랐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편했다. 돌봐 주는 사람도 거의 없던 별궁에서 류하는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 와서 무장한 군인을 옆에 두고 산책하자니,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뭐, 차라리 잘됐어.’
류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 목표는 이자와 친분을 쌓는 거 아닌가. 겸사겸사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류하는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까 무심코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갔던 순간을 만회하기 위함이었다. 기왕이면 처참했던 첫인상도 지워 버리고.
온은 가볍게 꾸벅인 뒤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류하는 대놓고 입술을 삐죽이지 않으려 애쓰며 그와 보폭을 맞췄다.
‘넌 진짜 돌로 만들어졌냐…….’
류하는 속으로 쉼 없이 구시렁댔다.
갑자기 제게 바보처럼 헤벌쭉 웃어 주기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는 나름 곰살갑게 굴려고 애쓰는데 상대방은 한결같이 무뚝뚝해서 기분이 팍 상했다.
심통을 꽁하게 참는 류하와 그녀를 호위 및 감시하는 돌 같은 사내는 함께 조용히 후원으로 나갔다.
특별할 것 없는 후원이었다. 크기도 구조도 전부 평범했다. 그래도 봄꽃이 곳곳에 수줍게 만개해서 정겨운 느낌을 주었다. 어느덧 겨울이 끝나고 있었다.
“황궁의 후원은 아름다운가요?”
류하는 너울 너머로 화단을 관찰하며 온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최대한 상냥하고 예바른 목소리로, 어떻게든 평범한 대화를 해 보기 위한 노력이었다.
“네.”
그리고 온은 단음절로 대답했다.
‘에라이, 이놈아.’
류하는 속으로 다시 욕했다.
온은 류하를 흘긋했다. 너울 너머로 공주의 얼굴은 오직 어렴풋이 보였다. 그 흐린 윤곽에서 대체 무엇을 봤는지, 온은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다만, 황궁에 후원은 많습니다. 그리고 후원마다 구체적인 아름다움은 다르지요. 특별히 어디가 궁금하십니까?”
류하는 희망 비슷한 걸 느끼며 온을 곁눈질했다.
그나마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저 사내가 제게 자발적으로 질문을 덧붙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후궁전의 후원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조만간 내 거처가 될 곳이니.”
실제로는 그딴 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찌감치 사라지고 싶지만.
“후궁전의 후원에는 단풍나무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을에는 특히 아름답지요.”
온은 착실하게 설명했다. 류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흡사 매우 어려운 문제를 알아맞힌 학생처럼 뿌듯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단풍나무라면, 가을에 이파리가 붉게 물드는 나무를 말하는 거죠?”
류하는 질문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매우 바보처럼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녀는 너울 뒤에서 뺨을 붉혔다.
“네, 맞습니다.”
온은 천천히 대답했다. 류하의 홍조가 짙어졌다.
단풍나무는 월국에서나 드문 식물이었지, 휘국에서는 몹시 흔한 나무였다.
방금 자신은 마치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흔하디흔한 돌멩이를 가리키며 우와! 나 저거 알아! 라고 호들갑을 떤 거나 마찬가지였다.
류하는 수치심을 느꼈다. 대장군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거지, 백치처럼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