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15화 (완결) (215/215)

#215. 거기, 아리따운 아가씨

어느덧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형운과 함께 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뛰어난 인재들을 두루 등용했으며 과거의 낡고 편협한 관습들을 털어내기 위해 그간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레도 서른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른 새벽.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뜬 이레는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켰다.

간밤에 겨울을 시작하는 첫눈이 내린 후라.

창문 틈새로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었다.

이레는 어깨를 훑는 한기에 오소소 몸을 떨었다.

이불 속의 온기가 그리웠다.

그러나 미련을 털어내듯 이불을 떨치고 나와 서탁을 마주했다.

오래된 서탁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손때를 타 반들반들한 서탁의 나뭇결은 언제나처럼 익숙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모서리마다 돋을새김 된 섬세한 문양들 사이로 따스한 기억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니 입가에 절로 긴 호선이 그려졌다.

하지만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은 잠깐에 불과하였다.

도도도도.

회랑을 두드리는 다급한 발소리.

이런 새벽에 찾아오는 소식 중 반가운 것은 없었다.

혹여……?

이레의 안색이 하얗게 바래었다.

어젯밤, 은자원의 은자들과 미행을 나선 형운이 떠오른 까닭이다.

즉위한 이후에도 왕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물색없이 나타나곤 하였다.

감히 반역을 도모하는 자들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였건만.

그럼에도 왕을 향한 칼날은 아직도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행여 미행 떠난 왕의 신상에 불길한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니려나?

이레는 걱정과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스르륵, 처소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금정이 이레의 앞으로 구르듯 달려들었다.

“중전마마…….”

“무슨 일이냐?”

“전하께서 서찰을 보내셨사옵니다.”

“서찰?”

이레는 금정이 건네는 붉은 봉투를 받았다.

봉투를 열고 하얀 서찰을 꺼냈다.

<도움이 필요하오. 서찰을 전한 자가 안내할 것이오.>

특유의 반듯반듯한 서체를 접하기 무섭게 이레는 금정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의 저의를 알고 있음인지라.

금정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시지요?”

또 중전마마를 대신하여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란 말씀은 아니시지요?

의미가 함축된 금정의 질문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네가 고생해야겠구나.”

이레는 금정과 함께 곁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금정이 입고 있던 상궁의 복색을 한 이레는 금정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금방 돌아오마.”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알았느니.”

단단한 약조와 함께 이레는 중궁전을 나섰다.

뽀드득.

밤새 내린 싸라기눈이 당혜 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이레는 급한 걸음을 옮겼다.

***

두 시진 후.

이레는 사대문 밖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계곡에 다다랐다.

형운을 비롯하여 장무열과 김기대가 그곳에 있었다.

“은백.”

이레는 형운에게 다가갔다.

이곳에 있는 동안 형운은 이 나라의 왕이 아닌 은자원의 은백이었다.

“은랑, 왔소?”

이레 역시 중전이 아닌 은랑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섰다.

“네, 은백. 그런데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시는 겁니까?”

두 사람 사이로 기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을 만나는 중이지요.”

“오라버니…… 아니, 은마. 사람을 만나는 중이라 하셨습니까?”

“정확히는…….”

잠시 형운의 얼굴을 살피던 기대가 이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지.”

“아하.”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중한 인재를 향한 형운의 갈망을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백 리 길도 마다치 않았다.

이번 미행 역시도 인재를 포섭하기 위한 걸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형운의 표정을 보아하니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기대를 따라 이레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대체 뉘기에 아직 만나지 못했단 말입니까?”

대체 뉘기에, 한 나라의 임금조차 만날 수 없단 말인가.

궁금한 이레의 물음에 내내 침묵하던 장무열이 입을 열었다.

“무인(武人)입니다.”

“은호.”

이레와 장무열의 사이로 가벼운 눈인사가 오고 갔다.

다시 기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기 원하는 무인이지.”

“조용히 살겠다는 사람, 굳이 끌어내려는 이유가 뭡니까?”

“초야에 묻혀 살기엔 그 능력이 아까우니까.”

“세상에 널린 것이 무인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절정고수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도 해야 하는 겁니까?”

이레가 질문했다.

그녀를 향해 장무열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이번이 꼭 서른 번째 찾아온 겁니다.”

“아하.”

쉽지 않은 상대란 뜻.

이레는 말을 이었다.

“간혹 말로 유혹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그럴 땐 권력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도 중 하나지요. 조정에 마땅한 자리를 하나 내어 주신다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쉽지만 관직에도 뜻이 없는 사람입니다.”

장무열의 한탄이 들려왔다.

“정 그렇다면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요. 갖고 계신 무력으로 겁박하세요.”

반쯤 농이 섞인 그녀의 말에 기대가 나서서 설명하였다.

“쉰 명이 넘는 무사들이 그를 찾아갔지.”

“어찌 되었습니까?”

이쯤 되니 호기심이 일었다.

눈빛을 반짝거리며 귀를 세우는 그녀에게 기대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은 죄다 구들장을 벗 삼아 누워지내는 신세가 되었어.”

이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상대라면, 아무래도 인연이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녀가 단언했다.

이내 형운의 단호한 목소리가 밭게 달라붙었다.

“인연이 없으니,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만나고 싶군.”

“설마, 그 인맥이 저는 아니겠죠?”

“왜 아니겠소. 그러니 은랑, 그대가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소.”

형운의 시선이 이레를 향했다.

그 검은 눈빛에 실린 절실한 감정.

한참 동안 침묵하던 이레가 형운과 마주 섰다.

“좋습니다. 하나…….”

“……?”

“세상엔 절로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은랑이 원하는 건 뭐든 줄 것이오.”

“약조하였습니다.”

“약조하였소.”

“알겠습니다.”

이레는 흔쾌한 대답을 남긴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 뒤로 세 사내의 시선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태양이 하늘 중앙에 내걸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로 긴 그림자가 늘어지는 정오.

은자원의 세 명의 은자.

형운과 기대 그리고 장무열은 무에 신기한 생물 보듯 이레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찌 사람을 그리 빤히 보십니까?”

이레는 고개를 외로 틀었다.

자신에게로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운 까닭이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오?”

먼저 입을 연 것은 형운이었다.

“뭐가 말입니까?”

“무슨 수를 썼기에 며칠 내로 나를 찾아오겠다고 하는 것이오?”

조선 최고의 검객이라 불리던 사내가 이 계곡에 둥지를 튼 것은 20년 전의 일이었다.

그간 숱한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연통을 넣었다.

형운 역시 사람을 보내 회유하고 설득하였으나 소용없었다.

그런 사내가 고작 한 시진이 채 되지 않아 스스로 칩거를 깨고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겠노라 대답해온 것이다.

대체 무슨 방도를 쓴 것일까?

궁금하였건만, 이레는 말이 없었다.

형운은 집요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이오? 은랑의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게요?”

“…….”

“설마…….”

“……?”

“미인계?”

형운의 엉뚱한 추리에 김기대가 목청을 높였다.

“은백,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미인계는 미인이 쓰는 겁니다.”

“오라버니!”

“듣고 보니, 맞는 말이로군.”

“……!”

이 사람들이!

이레의 한쪽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찔끔 놀란 기대가 후다닥 장무열의 뒤로 몸을 감췄다.

형운 역시 먼 허공을 응시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레는 힐끗,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그리 궁금하십니까?”

“궁금하오.”

진실로 궁금하여 견딜 수 없다는 듯 형운이 반응했다.

기대와 장무열 역시 순한 강아지처럼 이레만을 바라보았다.

할 수 없다는 듯 이레는 입을 열었다.

“별거 없습니다. 그저…….”

“그저……?”

형운은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저 거부하기 어려운 큰 재물을 제안하였습니다.”

“재물이라 하였소?”

“고작 재물에 넘어왔단 말입니까?”

“거짓말!”

형운을 시작으로 장무열과 김기대의 격렬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이레는 무심한 시선으로 세 사내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때마침 십학사의 공백이 생겨 새로운 학사의 자리도 제안하였지요.”

짧은 대답을 끝으로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핫!

형운은 허탈한 한숨을 툭 내쉬었다.

그의 뒤에서 김기대의 반발이 들려왔다.

“그리 재물과 권력을 남용한 겁니까?”

괜한 억지를 부리는 기대에게 이레가 대꾸했다.

“상인들은 이런 걸 가리켜 정당한 거래라고 하지요.”

“세상 천진하였던 내 누이는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은자원의 오랜 숙제를 해결한 은랑을 찾는 것이라면, 여깄습니다.”

“……역시 궁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근묵자흑이라더니. 음흉한 은백과 어울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어.”

기대는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렸다.

“은호, 뭐 하고 있는가? 거기 있다간 자네마저도 검어진다네. 어서 오게.”

기대는 앵돌아진 표정을 지으며 장무열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오면…….”

기대에게 이끌려 가며 장무열은 형운과 이레에게 번갈아 눈인사를 건넸다.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이레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형운과 이레.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을 위한 오라버니의 배려임을 이레는 진즉 알아차렸다.

번연한 공기가 사라진 곳에 고요에 내려앉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초겨울의 햇살을 받고 있노라니.

따스한 온기가 이레의 손을 깍지를 꼈다.

맞잡은 형운의 손.

그 커다란 손이 전하는 단단하고도 든든한 믿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형운은 이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뗐다.

“무엇이든 주신다 하셨지요?”

그와 보폭을 맞추며 이레가 물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그럼…….”

문득 걸음을 세운 이레는 형운을 향해 맑은 웃음을 보였다.

“입맞춤해주시겠습니까?”

“기꺼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초겨울의 햇발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부신 행복이 햇발을 따라 튀어 올랐다.

***

가경(嘉慶) (경신년,1800) 6월 28일.

왕의 환후가 위중하였다.

죽음을 코앞에 둔 왕께서 유언(遺言)을 남기고 편전에 설치된 악장으로 드시었다.

궤(几)에 기댄 왕의 곁을 중전이 지켰다.

“돌아보면 참으로 짧은 인생이었소.”

“…….”

“그래도 나…… 제법 괜찮은 왕이지 않았소?”

좋은 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에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 웃음이 가득한 산하를 꿈꾸며.

“신하에겐 어려운 왕이었을 겁니다. 하오나, 백성에겐 참으로 좋은 왕이셨습니다.”

“하면, 그대에겐……?”

“…….”

“그대에게 나는 괜찮은 사내였소?”

“과분한 사내였습니다.”

“그럼……나 이제는 좀 쉬어도 될까?”

“…….”

“당신, 허락하겠소?”

“…….”

“중전, 내가 떠나도 그대…… 괜찮겠소?”

완연한 중년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이레를 향해 형운이 물었다.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어느덧 이십 년이 흘러갔다.

모든 날이 찬란하였다 말할 순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날들마저도 행복하였다.

그녀가 함께하였기에…….

“중전, 당신 괜찮을 것이오?”

죽음의 사자를 기다리며 형운이 물었다.

그러나 그를 품에 끌어안은 이레에게선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은랑…….”

형운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이레를 불렀다.

“은랑, 괜찮다고 말해 주오.”

그의 재촉에 이레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지 않을 겁니다.”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마음.

괜찮지 않습니다.

괜찮지 않아요.

그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 형운의 입술이 잔경련을 일으켰다.

“이레야…….”

“괜찮지 않습니다. 당신 없는 세상에서 저 홀로 어찌 괜찮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

“……알겠다.”

“가지 마셔요.”

“그리하마.”

“아무 데도 가지 마시어요.”

“그대가 그리하라 명하니, 내 따르리다.”

나의 여인.

언제까지고 지키고 싶은 나만의 하늘.

그대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를 것이오.

그런데…….

“나를 잡아주오.”

어찌 이리 혼곤한 것인지.

“내가 떠나지 못하게…… 나를 붙잡아 주오.”

형운은 이레의 앙가슴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네, 그럴 겁니다.”

그를 끌어안은 이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떠나지 못하게…….

나 홀로 이리 가지 못하도록…….

***

가경(嘉慶) (경신년,1800) 6월 28일 유시.

왕께서 숨이 끊어지니, 안팎이 모두 곡을 하였다.

***

날이 흐르고 달이 지나갔다.

해가 뜨고 별이 뜨길 반복하였다.

의미 없는 날들이 무수히 이레의 곁을 스치고 떠났다.

하늘과 땅.

바람과 구름.

꽃과 나무들.

수많은 빛깔이 사라졌다.

달콤한 향기도, 군침 도는 맛도 음미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세상은 잿빛으로 변하였다.

그저 해가 뜨고, 날이 저무는 의미 없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그 무수한 밤의 한 날.

의미 없는 밤하늘에 밝은 달이 떴다.

청명한 달빛이 무채색으로 물든 이레의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레는 달빛 속에 젖어드는 서탁을 마주했다.

무의미한 일인줄 알면서도, 그녀는 버릇처럼 붓을 들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이제는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까지 살아야 할까요?

역시나 서탁은 아무 답이 없었다.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

낮은 한숨과 함께 이레는 붓을 놓았다.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눈에선 이제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정인은 꿈에서조차 그녀를 찾지 않았다.

“무심한 사람. 무정한 사람…….”

원망과 그리움이 섞인 혼잣말이 그녀의 잇새로 새어나왔다.

-당신은 나쁜 사람입니다. 참으로 나쁜 분입니다.

마음의 응어리를 쏟아낼 곳이 그저 서탁 밖에 없는지라.

이레는 다시 붓을 잡았다.

그 순간.

스스슷.

서탁의 글씨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기, 누가 있으십니까?

이레의 물음이 서탁을 검게 물들이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서탁 너머 누군가 그녀의 글을 읽었음이 분명했다.

청명한 밤, 낯선 백귀의 등장.

-누구십니까?

이레가 물었다.

이윽고 스스슷, 글씨가 사라지고 질문에 되묻는 물음이 떠올랐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누구……시기에 그리 물으십니까?

-어느 버릇없는 백귀가 나를 이리 부르더군.

자로 잰 듯한 반듯반듯한 글씨.

한치 틀림없는 정갈한 서체.

설마……?

이레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양손으로 막았다.

놀란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선명한 두 글자가 박혔다.

-불손.

-나는 불손이라 한다. 너는 누구냐?

박제된 이레의 하늘에…… 형운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볼 수 없으리라.

꿈에서조차 만날 수 없었던 그가…….

말을 걸어왔다.

다정히 속삭였다.

-너…… 거기 있느냐?

*

거기, 아리따운 아가씨.

내 얘기 좀 들어주오.

군자의 좋은 짝은 현숙한 숙녀요.

내 그리운 여인은 그대뿐이니.

굽이진 인생길, 동행하지 않겠소.

더디게 걸어도 좋소.

그대 곁에서 가쁜 숨을 고르리.

돌부리에 넘어져도 울지 마오.

그대 눈물, 선홍빛 상처, 다정히 보듬어 주리니.

우리 함께라면.

맨발로 가시덤불 위를 걸어도 즐거우리오.

뜨거운 사막과 시린 벌판을 알몸으로 달려도 행복하리오.

봄마다 연초록으로 움터나.

무성한 여름과 붉은 가을을 돌아.

시리고 뽀얀 겨울 속으로 사라지는.

나의 아리따운 아가씨.

머나먼 소풍, 함께 떠나지 않겠소.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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