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14화 (214/215)

#214. 추월의 천일홍(秋月之天日紅)

무거운 적막이 궁에 내려앉았다.

새벽의 문턱.

깊은 수면에 빠진 궁궐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하였다.

그 고요함이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까지고 깨지지 않을 듯한 궁의 적막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숨죽인 발걸음이 존현각의 지붕 위로 이어졌다.

워낙에 은밀한 걸음인지라.

귀밝은 이라 하여도 좀처럼 알아차리기 어려운 소음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

존현각 침소에서 책장을 넘기던 형운의 귀까지 속일 수 없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동창 너머, 어둠에 휘감긴 전각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머리 위를 밟아오는 저 소리는 다 무얼까.

“최 내관.”

형운은 나직한 음성으로 최 내관을 불렀다.

충직한 그의 신하는 사잇문 저 너머 어딘가에 분명 있으리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신 사람의 것이 아닌 듯 가볍고 날렵한 발소리가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누구냐?”

이 밤에 은밀히 담을 넘었으니,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니리라.

하나, 궁금하였다.

그 어떤 철옹성보다 높고 단단한 궁궐의 담벼락을 넘은 자가 뉘인지.

지엄한 왕의 침소에 겁 없이 발을 디딘 목적이 무엇인지.

“고통 없이 보내주려 하였건만.”

쇳소리가 섞인 듯한 음성이 형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목덜미 아래로 서늘한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두 가지 의문점 중 하나는 해결되었다.

야밤을 틈타 궁궐에 스며든 침입자의 목적.

바로 왕의 목숨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형운의 눈빛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호락호락 당해줄 순 없지.

그는 이부자리 밑으로 손을 움직였다.

“쉿! 그리 함부로 굴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사내의 염려에 형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죽이려는 자객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구나.”

말을 매듭짓는 동시에 그는 이부자리 아래에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선왕 살아생전, 동궁전의 주인이 된 이후 형운은 밤마다 이부자리 밑에 날 세운 검을 두곤 하였다.

그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이 궁궐 담벼락 안에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노라며 부르짖는 자들이 언제 동궁전에 숨어들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하여 손 닿는 곳마다 호신의 날붙이를 두곤 하였다.

그 버릇은 왕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이불 밑을 더듬는 형운의 손끝에 검집의 질박한 감촉이 닿았다.

툭.

가볍게 엄지를 튕기자, 벼린 칼날이 비스듬히 모습을 드러냈다.

형운은 상체를 뒤로 물리며 그대로 검을 뽑았다.

스륵.

희미하게 불을 밝힌 등잔불이 그의 검날에 맥없이 사그라졌다.

금세 주위가 캄캄해졌다.

느닷없는 상황에 놀란 불청객이 주춤한 사이, 형운은 날렵한 몸짓으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어둠 속이지만, 전각의 세밀한 배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곁방으로 몸을 날렸다.

어느 사이 잠에서 깬 이레가 그곳에 있었던 까닭이다.

혹여나 내 여인의 일신에 동티가 나는 것은 아닐까.

형운은 검붉은 용포를 활짝 펼쳐 이레의 눈과 귀를 막았다.

삿된 시선과 마주치지 않도록.

불편한 소음에 마음 다치지 않게.

용포로 만든 울타리 속으로 이레를 피신시켰다.

“잠시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아무것도 듣지 마오.”

그대는 그저 고운 세상, 고운 소리만 듣길…….

형운은 이레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어, 등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향해 빠르게 몸을 돌렸다.

허공을 짓쳐들어오던 칼날이 형운의 검 끝에 맞부딪혔다.

어둠 속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치고, 때리고, 막고, 베어내는 사나운 칼날이 이어졌다.

치우치지 않은 기세가 팽팽하였다.

영원인 것처럼 길고 날카로운 시간이 흘렀다.

***

“이, 이게…….”

자객의 입에서 곤혹스러운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자객은 평정심을 잃었다.

왕의 출중한 무예가 그를 당황하게 하였다.

조선 제일의 무사는 아닐지라도,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칼을 휘둘렀다.

그러기에 자신하였다.

왕의 목쯤이야 단박에 베어낼 수 있노라, 장담했었다.

그런데…….

나약한 문사(文事)라고 얕잡아 보았던 왕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탁 앞에서 서책을 읽던 형운의 신형이 한순간 촛불처럼 흔들렸다.

다음 순간.

왕의 손에 벼린 검이 들려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자객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왕의 검이 등잔불을 베어 버렸다.

이내 주위가 캄캄해졌다.

급작스러운 어둠을 이용하여, 왕은 자신을 위협하는 자객의 칼날에서 멀어졌다.

형운은 수리 매처럼 빠르고 민첩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까지 속수무책이었던 자객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서둘러 왕의 뒤를 쫓았다.

이내 유난히 큰 형운의 뒷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왕을 향해 자객은 칼을 고쳐 쥐었다.

방심했던 대가로 작은 고초를 겪은 터라.

이번엔 실수하지 않으리라.

각오를 다지며 자객은 허공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찰나, 차캉!

등을 보이고 섰던 형운이 몸을 돌리며 팔을 뻗었다.

자객의 두툼한 칼날이 형운의 검과 맞부딪혔다.

내리치는 힘과 올려 막는 기세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누가 시켰느냐?”

팽팽히 검을 맞부딪힌 채로 왕이 물었다.

자객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누가 시킨다고 목숨을 걸겠느냐?”

“하면, 스스로 원하여 반역을 도모하였단 말이냐?”

“반역이라니. 이게 어찌 반역이더냐?”

“무어라?”

“왕이 될 수 없는 죄인의 아들이 왕 노릇을 하려 하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노릇이더냐. 나는 다만 이 어이없는 광대 짓을 끝내려는 것이다.”

“……!”

“아직 모르겠느냐? 너는 왕이 아니다!”

일갈과 함께 자객은 왕의 검과 엉킨 칼을 거두며 두어 발짝 뒷걸음쳤다.

휘익, 휘익.

자객의 칼이 어둠을 좌우로 벴다.

위협적인 소음을 만들어 왕을 압박하며 그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 한순간 몸을 허공으로 띄워 왕의 머리 위를 빙글 넘어섰다.

그리고…….

“하압!”

다시 한 번 등을 보인 왕을 향해 그는 칼을 아래로 힘껏 내리쳤다.

이번에야말로 왕의 목숨을 취하리.

부복하듯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으로 바닥에 내려앉은 그는 귓전을 파고들 서늘한 절삭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와 다른 고요가 그를 맞이했다.

왕의 몸통을 베었어야 할 칼끝에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분명 눈앞에 있던 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놀란 자객이 고개를 돌렸다.

찰나, 그의 옆구리로 뜨거운 불기둥이 파고들었다.

불에 덴 듯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자객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푸르게 날을 세운 왕의 검이 그의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이게 왜……?”

자객의 입에서 울컥, 검붉은 핏물이 치솟았다.

형운의 거친 음성이 그의 귓전에 화살처럼 꽂혔다.

“오만하고 방자한 놈.”

쿵, 왕의 사나운 발길질이 자객의 몸통을 향했다.

그 서슬에 자객은 중심을 잃고 한쪽 옆으로 스르륵 무너졌다.

“커억…….”

마음 같아선 당장에 일어나 왕에게 칼을 흩뿌리고 싶었건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피로 만든 끈적한 올가미에 발목을 잡힌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는 자객의 등으로 또 한 번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쿠쿵.

기어이 자객은 밑동 잘린 나무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머리 위로 묵직한 걸음이 다가왔다.

내려다보는 서늘한 시선이 자객의 정수리에 꽂혔다.

스륵, 비단 옷자락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 위로 매서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푸른 분노가 담긴 눈길로 자객을 내려다보며 형운이 말했다.

“내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며, 그분은 죄인이 아니다.”

“……컥.”

형운은 죽어가는 자객을 향해 말을 이었다.

“나는 네놈의 왕은 아니다. 허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자객의 영혼에 각인하듯 그는 쐐기를 박았다.

“나는 왕이다.”

“…….”

“이 나라, 조선의 왕이다.”

***

이레는 용포로 만든 검붉은 어둠 속에 멈춰 있었다.

진공의 공간에서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용포 저 너머의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감히 상상하는 것이 두려웠다.

막막한 공포가 이레를 짓눌렀다.

점점 옥죄는 불안함을 얼마나 견뎠을까.

한순간.

캄캄하던 눈앞이 노랗게 밝아졌다.

그리고 달빛을 향해 꽃잎을 피운 달맞이꽃처럼 환하게 웃는 형운이 이레의 망막에 맺혔다.

“괜찮소?”

염려 섞인 다정한 한 마디.

팽팽했던 이레의 신경이 뚝 하고 끊겼다.

꽉 막혔던 숨구멍이 이제야 뚫리는 것만 같았다.

꽁꽁 얼어붙었던 시간이 흐르고, 두려운 상상에 잠식당했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한껏 긴장했던 이레의 잇새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꼿꼿했던 등을 벽에 기대자, 형운의 맑은 눈빛이 바싹 다가왔다.

“중전, 괜찮은 것이오?”

형운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레는 습기 가득한 마음을 깊숙한 곳에 갈무리 지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

형운은 대답하는 이레를 말없이 응시했다.

숨기고 감춰도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눈빛으로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쿡, 엄지를 들어 붉어진 이레의 눈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거짓말.”

낮은 속삭임.

“무서웠소?”

빗장을 여는 목소리.

“많이 두려웠소?”

“…….”

“이제는 무서워 마오. 내가 곁에 있으니, 더는 두려워 마시오.”

“……네.”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이레의 뺨에 고였다.

의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쓰고 있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느닷없는 천둥소리에 놀란 아이처럼 그녀는 형운의 가슴에 이마를 묻었다.

“흐윽…….”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이 조금씩 터져 나왔다.

토닥토닥.

“울지 마오, 울지 마.”

형운의 따뜻한 손길이 이레를 위로 하였다.

그럴수록 이레의 눈물은 진해졌다.

그러다 기어이 울음보를 터트렸다.

처음으로 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중전…….”

형운은 제 가슴에 매미처럼 매달린 이레를 한껏 끌어안았다.

“은랑…….”

이 작은 몸에 쌓인 서러움일랑 모두 토해내시오.

“이레야…….”

그 마음의 무거운 돌덩이 모두 내던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지시오.

구름처럼, 나비처럼…….

형운은 이레의 머리 위에 턱을 괴었다.

자신의 앞에서만 겨우 드러내는 제 여인의 붉은 속내에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아이처럼 엉엉 우는 정인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는 힘주어 어금니를 물었다.

***

정유년, 여름.

비수를 든 자객이 궁궐 담장을 넘어 감히 범할 수 없는 곳을 범하려 하였다. 다행히 막 들어왔을 때 잡혀 사형당했다.

이후, 왕께서 친히 호위 부대를 만드니.

훗날 이만여 명의 무사들로 조직된 조선 최강의 친위부대, 장용영(壯勇營)이었다.

***

사람의 기억은 수시로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건만.

계절은 어김없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공기에 섞인 열기가 점차 사라졌다.

하늘이 높아졌다.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였다.

날뛰는 봄과 치열을 여름을 이겨낸 열매는 속을 단단히 채웠다.

추수의 계절을 알리는 짧은 장마가 시작되었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하얀 종이를 정갈하게 펼치기 무섭게 상 할아버지의 글이 뛰어올랐다.

-수상하다, 수상해.

화가 상의 글을 받았다.

-뭐가 또 그리 수상하는 것이냐?

-화, 너도 듣지 않았느냐? 궁에 또 자객이 들었다는 소리.

-그게 뭐가 수상해?

-궁궐이 도화 만발한 기루도 아니고. 무슨 놈의 자객이 하루가 멀다고 월담을 한단 말이냐?

-그거야…….

화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말끝을 흐렸다.

-그것 봐라, 너도 이상하지?

-하면, 누군가 일부러 꾸몄다는 게냐?

-그럴 수도 있지.

의심하는 상을 향해 화가 물었다.

-누가? 무슨 연유로?

-그거야 일을 꾸민 놈만이 알겠지.

상이 의미심장하게 대답에 화가 다시 질문했다.

-일을 꾸민 놈이 누구냐?

화의 질문에 대답한 건 상이 아닌 악의 악필이었다.

-왕의 친위대를 만들었다 하질 않는가.

-흥,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 놈이 나타났군.

-뭐야? 그럼 나는 말귀도 못 알아듣는 놈이냐?

버럭, 고함을 지르는 듯 화의 글씨가 커졌다.

상이 능글댔다.

-말귀는 모르겠고, 글귀는 못 말아먹는 게 틀림없지.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할까.

-무어라?

-일평생 몸뚱이 하나로 버텨온 무식한 칼잡이들이 종종 보이는 증상이지.

상이 화의 심화를 돋구었다.

-죽고 싶으냐?

그때, 두 할아버지 사이로 이레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들, 모처럼 만나셨는데. 또 싸우십니까?

-놔둬라. 싸우면서 정 드는 법이다.

악의 말에 상과 화가 동시에 대답했다.

-얼어 죽을 정은 무슨 정!

-저런 놈하고 정이 드느니, 지나가는 똥개한테 정을 주겠다.

-뭐야? 나를 그깟 똥개하고 비교하려는 것이냐?

-설마 그럴까.

-그렇지?

-똥개는 반갑다고 꼬리도 흔들고, 불청객을 보면 짖기도 하지. 만날 시비나 거는 네놈 따위가 어딜 감히 똥개와 비교하려는 게야?

화의 반격에 상은 가을 논의 메뚜기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감히 똥개? 어디에다 ‘감히’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이야?

치열한 필담에 서탁 위의 종이가 금세 까맣게 변했다.

이레는 슬쩍 종이를 서탁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새 종이를 올렸다.

곧 악의 악필이 종이에 검은 족적을 그렸다.

-아이야, 너는 뭐 아는 것이 있느냐?

-글쎄요…….

모호한 대답을 하며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앉은 형운과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참으로 눈치 빠른 분들이 아닙니까.”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형운은 검지를 세웠다.

쉿.

벽에도 귀가 있는 궁이라오.

눈짓으로 말을 건네는 형운의 입가에 짓궂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이레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왕의 친위대가 생겼다.

임금의 권력에 강력한 뒷받침이 되는 배경이 생긴 것이다.

본디 갖은 명분을 앞세워 막았을 신하들은 이번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왕께서 즉위한 이후, 여러 차례 궁궐에 자객이 들었던 까닭이다.

어디선가 이 역시도 왕께서 도모한 일은 아닐까,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확한 물증이 없으니.

그저 갑갑증에 가슴만 쳐댈 뿐이었다.

-내가 그랬지. 불손, 그놈…… 음흉한 놈이라고.

-상, 네놈보다 음흉하겠느냐.

화가 나서서 형운의 역성을 들었다.

-아이야, 은백에게 전해라. 잘했다고. 아주 장하다고.

악도 화에게 동조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척척 해내니. 가르치는 보람이 있군.

-네, 악 할아버지.

-요즘도 욕하는 연습은 꾸준히 하고 있다더냐?

-그럼요. 날로 매서워지는 욕설에 조정의 대신들이 경기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하하하, 진실로 나의 제자로다.

악의 흐뭇한 웃음이 서탁에 가득했다.

-아이야, 너무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건 너도 알 것이야. 적당히 물을 흐리는 자들도 남겨두는 것을 잊어선 아니 된다 당부하거라.

화의 충고에 악의 구체적인 방법이 더해졌다.

-치부책을 만들라고 해라. 말 안 듣는 놈들 부려 먹기엔 그만한 것도 없다.

-저 악독한 놈을 보았나.

-얼빠진 백귀 놈이 뉘더러 악독하다고 하느냐.

-해보자는 것이냐?

-덤벼보던가.

이번에는 악과 상의 설전이 시작되었다.

“이분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서탁을 내려다보며 형운과 이레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중궁전 뒤뜰에 심은 천일홍이 붉은 꽃을 피웠다.

하늘의 달이 이지러졌다 부풀길 반복하였다.

무상한 날들이 흘렀다.

***

“중전마마, 중전마마!”

금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새벽공기를 불안하게 뒤흔들었다.

우당탕.

상궁 복색을 한 금정이 중궁전 침소로 뛰어들다시피 하며 들어섰다.

“왜 그러느냐?”

이레는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웠다.

금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낯빛이 전에 없이 창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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