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메꽃 피는 초여름 밤
새로운 왕이 등극한 지도 여러 달이 흘렀다.
연초록의 대지는 점점 선명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공기 중에 초여름의 열기가 조금씩 섞여들었다.
일찌감치 석강을 끝낸 형운은 모처럼 존현각을 찾았다.
얼마 전, 궁궐의 동서고(東書庫)에서 찾아낸 서책들을 읽기 위함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서책이었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오래된 묵 향기와 먼지 냄새를 맡노라며 묘한 설렘마저 일었다.
혼자서 즐기는 은밀한 유희에 얼마나 빠져있었을까.
“으아아아아악!”
짐승 같은 포효가 평화로운 시간을 잘게 조각냈다.
형운은 서책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냐?”
“소인, 알아보겠나이다.”
최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후.
다시 돌아온 최 내관의 등 뒤로 금군의 별장이 된 최치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
형운은 하룻밤 사이 반쪽이 된 최치성을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그것이…….”
최치성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보라. 너와 나 사이에 못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전하…….”
“그래, 치성아.”
“흐윽, 전하. 소인, 이걸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사옵니다.”
언제나 무던하고 덤덤하던 녀석이 어쩐 일인지 눈물까지 흩뿌렸다.
형운은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무엇이 너를 그리 괴롭히더냐?”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다 큰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울음보를 터트린 것일까?
궁금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최치성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최치성이 서찰 한 장을 형운의 앞에 내놓았다.
“이게 무엇이냐?”
“심 교리 댁 아가씨가 소인에게 보낸 서찰이옵니다.”
“심 교리 댁 아가씨……?”
심 씨 규수라면 심환지의 여식, 심희명이리라.
노론의 새로운 영수로 떠오른 심환지의 마음을 포섭하기 위해 십학사가 납치하려던 여인이었다.
그들보다 한발 앞서 심희명을 안전한 곳에 보호하라고 최치성에게 명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인연을 아직까지 이어 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서찰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최치성이 저런 얼굴로 비명을 질렀을까.
형운은 서둘러 서찰을 펼쳤다.
<금일(今日), 술시초(戌時初). 궁궐의 푸른 버드나무(朝鮮柳)와 벽오동나무(碧梧桐木) 사이, 서로 바라보기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희명>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형운이었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최치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두 사람, 어떤 사이더냐?”
“딱히 특별한 사이는 아니고…….”
모호하게 말끝을 늘이던 최치성은 돌연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형운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소인이 희명 낭자에게……있습니다.”
입안에서 우물거린 탓에 정작 중요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제대로 말하지 못할까.”
형운의 요구에 최치성이 조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 심 교리 댁 아가씨에게 산술을 배우고 있사옵니다.”
“무어라?”
형운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쉿! 쉿!
누가 들을세라, 최치성은 검지를 세워 연신 형운의 입을 막았다.
“네가 정녕 산술을 배운단 말이냐?”
분명 들었음에도 믿기지 않아 형운이 재차 물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소인이 공부 좀 하는 것이 이리 놀라실 일이옵니까. 뜻밖의 반응에 참으로 당혹스럽고, 섭섭합니다.”
입술을 불퉁하게 내미는 최치성에게 형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당혹스럽기로 따지자면, 나보다 더하겠느냐.”
“그만 놀리십시오, 전하. 소인, 지금 그럴 마음이 아니옵니다.”
“왜?”
형운의 진지한 물음에 최치성은 울상이 지었다.
“전하께서도 서찰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연유인지, 희명 낭자께서 만남의 장소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체 술시말까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최치성의 볼멘소리에 형운은 다시금 서찰을 살폈다.
<궁궐의 푸른 버드나무(朝鮮柳)와 벽오동나무(碧梧桐木) 사이, 서로 바라보기 적당한 곳>
“궁궐의 푸른 버드나무와 벽오동나무 사이라…….”
형운은 돌연 서찰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치성아.”
“네, 전하.”
“심 씨 규수와 매번 이런 식으로 서찰을 주고받았느냐?”
최치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래?”
“원래는 시간만 숨겨 놓고 했습니다. 하지만 간단히 더하거나 빼면 만남의 시간을 어림짐작 수 있었으니, 숨겨놓았다고도 할 수 없었사옵니다. 한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이리 어려운 서찰을 보냈지 뭡니까.”
최치성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였다.
그를 사뭇 진지한 눈길로 응시하며 형운이 입을 뗐다.
“치성아…….”
“네, 전하.”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지으십니까?”
“심 씨 규수의 서찰을 가만 들여다보니, 내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
“심 씨 규수는 너와 만날 생각이 없는 게 확실하다.”
단정(斷定) 짓는 형운을 향해 최치성은 전에 없이 세차게 도리질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닐 겁니다!”
“그럼 어쩌자고 저런 서찰을 보낸단 말이냐?”
“그거야 희명 낭자가 워낙에 저런 놀이를 즐기는 까닭에…….”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던 최치성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듣고 보니 형운의 생각이 그럴듯했던 까닭이다.
“그런 걸까요? 그래서 제게 이런 엉뚱한 서찰을 보낸 걸까요? 왜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인지 전하께서는 짐작되십니까? 제가 혹여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요?”
최치성의 입에서 질문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금세 비 맞은 어린 짐승처럼 축 어깨를 늘어뜨린 그의 모습에 형운은 난감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다, 내가 농담한 것이다.
이렇게 웃으며 최치성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궁궐의 푸른 버드나무와 벽오동나무 사이라…….”
수수께끼 같은 서찰은 형운이 해석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고민이 깊어지는 찰나.
“만남의 장소, 제가 알려 드릴까요?”
머리를 맞대고 앉은 두 사람에게 천상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형운과 최치성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전각의 누마루 아래.
초여름 햇살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이레가 서 있었다.
***
“중전.”
이레의 등장에 내내 심각했던 형운의 표정이 느른해졌다.
눈초리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졌다.
그의 입가엔 어느샌가 풀썩풀썩 웃음이 맺혔다.
“여긴 어쩐 일이오?”
형운이 이레를 맞이하며 물었다.
“존현각에서 예사롭지 못한 비명이 들려왔다고 하여 잠시 찾았사옵니다.”
이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형운을 살폈다.
“나는 괜찮소.”
형운은 양팔을 활짝 벌려 건재함을 과시했다.
곧이어 그는 최치성을 눈짓했다.
“문제는 저 녀석에게 생겼지.”
형운은 희명의 서찰을 이레에게 내밀었다.
“이 서찰이 저 바보를 미치게 하였다오. 그런데 좀 전의 말은 무슨 뜻이오? 정녕, 서찰에 적힌 장소가 어딘지 아는 것이오?”
“네, 전하.”
“중전마마, 정말이시옵니까?”
최치성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온종일 서찰을 붙잡고 씨름을 하였음에도 자신은 작은 단서조차 찾지 못하였건만.
먼 데서 곁귀로 들은 중전마마께선 단박에 그 장소가 어딘지 알고 있다 말씀하시었다.
좀처럼 믿기지 않았으나, 한편으론 정말 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중전마마, 그곳이 어딘지 소인에게 귀띔해 주실 수 있으시옵니까?”
최치성의 간곡한 물음에 이레는 검지로 서찰의 글씨를 짚었다.
“궁궐의 푸른 버드나무는 궁궐 동쪽의 월근문을 뜻하는 것이지요. 월근문 앞의 풍성한 버드나무는 워낙에 유명하니. 최 별장도 대충 짐작했을 겁니다.”
“네, 마마.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벽오동나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영 갈피를 잡을 수 없었사옵니다.”
“벽오동나무가 있는 곳은 북촌이랍니다.”
“북촌이라 하셨사옵니까?”
최치성이 물었다.
도무지 이해 못 하는 그에게 이레가 설명했다.
“반가에 여아가 태어나면 벽오동나무를 심곤 하지요. 물건을 담아두는 장(欌)이나 폐물을 담아두는 함(函)을 만들기에 단단한 벽오동나무만 한 것이 없으니까요. 반가의 여인들은 종종 벽오동나무로 만든 함에 혼서지(婚書紙)를 넣어두곤 합니다.”
혼인한 반가의 여인에게 목숨보다 귀한 혼서지.
단단한 나무함에 그것을 넣어 손닿는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은 규방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오호라, 그래서 반가의 규수들이 많이 사는 북촌을 지목한 것이었군.”
“네, 전하.”
이레는 감탄하는 형운과 시선을 섞었다.
“그럼 심 씨 규수가 말한 장소는 궁궐과 북촌 사이, 그 어디쯤이겠군.”
해답에 조금씩 다가가는 재미에 형운은 흥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치성의 볼멘 투덜거림이 찬물을 끼얹었다.
“전하, 정확한 장소는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약조한 시각이 코앞인데 말입니다.”
이레의 미소가 짙어졌다.
“별장께선 서찰을 조금만 더 세심하게 살펴보셔요. 답은 이미 나왔답니다.”
그녀의 조언에 최치성은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심희명과 만날 장소가 어딘지는 도통 모를 노릇이다.
그는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중전마마, 소인 이런 문제엔 청맹과니이옵니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이오니 빙빙 에둘러 말씀 마옵고, 꼭 집어 알려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최치성이 애원했다.
이레는 서찰에 쓰인 두 개의 단어를 검지로 콕콕 짚었다.
“여기 버드나무(朝鮮柳)와 벽오동나무(碧梧桐木)를 보셔요. 나무를 뜻하는 목(木)자가 버드나무에는 하나, 벽오동나무에는 세 개가 있답니다. 그 사이에 있는 나무라면 목자가 두 개가 들어갈 겁니다.”
“그럼 목자가 두 개가 들어간 나무를 찾아보면 되겠습니다.”
최치성은 아이처럼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내내 침묵하던 형운이 다른 의견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목자가 두 개인 나무가 한둘이 아니고, 궁궐과 북촌 사이에 자라는 나무의 종류 역시 한두 개가 아니니. 언제 그 많은 나무를 다 살필 수 있단 말이오.”
기다렸다는 듯 이레가 대답했다.
“그래서 심 씨 낭자께서 친절한 뒷말을 덧붙여 주셨잖습니까. 서로 바라보기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최치성은 황소 같은 눈망울을 연신 끔벅거렸다.
약조한 시간이 코앞인지라.
이레는 그에게 해답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었다.
“서로 바라보기 적당한 나무. 즉 암수가 나란히 서 있는 나무 중 목자가 두 개인 나무를 찾으세요.”
“암수가 나란히 서 있고 목자가 두 개인 나무라면, 은행나무(銀杏木)가 아닌가.”
형운은 이레가 건넨 단서의 조각들을 차례로 꿰었다.
“도성에서 암수의 은행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이라면…….”
순간.
최치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성균관!”
깨달음이 최치성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조각들이 절묘하게 아귀를 맞물고 돌아갔다.
궁궐과 북촌 사이.
암수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그곳……바로 성균관이었다.
최치성은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급히 틀어막았다.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웃는 그에게 이레가 조용한 한마디를 건넸다.
“최 별장, 좀 전에 술시 중엽이 지났다는 북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술시말까지 성균관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할 겁니다.”
“……!”
상황을 파악한 최치성은 허둥지둥 형운과 이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중전마마. 소인, 물러가도 되겠나이까?”
“물러가…….”
형운이 말을 매듭짓지도 않았건만.
최치성은 뒷걸음질로 문턱까지 물러나 있었다.
조금의 거짓도, 티끌만큼의 가식도 보이지 않는 온전한 즐거움.
“그만 가봐.”
“네, 전하.”
달음박질하는 최치성의 뒷모습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
“저렇게 좋을까요?”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최치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레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은 형운이 속삭였다.
“아마 짐작하는 것보다 더 좋을 것이오.”
“어찌 아십니까?”
“나 또한 그러했으니.”
형운은 어둠을 응시하는 이레의 작은 등을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발그레한 수줍음이 그녀의 귓불을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귀밑머리를 입술 끝으로 어루만지노라니, 그녀의 맥동 소리가 깊어졌다.
“설렜다오, 그대와 함께하는 순간들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 이어졌다.
“날이 좋으면 좋아서 행복했고, 비가 오면 비 오는 날의 그대를 보아 즐거웠소. 눈이 오면 그대와 함께 그 눈을 맞을 수 있어 기뻤다오.”
“그러셨습니까?”
여상한 말투.
그러나 형운의 가슴에 와 닿는 그녀의 심장 소리는 전보다 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형운은 새치름히 시선을 내리는 이레의 귓불을 살며시 물었다.
“행여 약조한 시간보다 늦을까, 번번이 뛰었다오.”
“몰랐습니다.”
“정녕?”
“네, 정녕 몰랐습니다.”
시침을 뚝 떼는 이레를 보고 있자니, 형운의 마음이 짓궂어졌다.
그는 이레의 귓불을 조금 세게 물었다 놓았다.
간질거림과 함께 전해지는 저릿한 아픔이 묘한 전율을 일으켰다.
이레의 입에서 탄식 섞인 비명이 나지막하게 새어나왔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지켜보던 형운이 달콤하게 추궁했다.
“이래도 몰랐소?”
“몰랐습니다.”
이레의 모르쇠는 여전하였다.
오호라.
은근한 오기가 생겼다.
형운은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이윽고 꾹, 꾹.
그의 입술이 이레의 목덜미를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짚었다.
곧 희고 뽀얀 그녀의 피부 위로 붉은 빛깔의 꽃이 일렬로 만개하였다.
“이래도 몰랐다 발뺌할 것이오?”
형운의 집요함에 이레는 큭, 작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갈무리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명쾌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리하면 분명히 알게 되겠지.”
형운은 이레를 번쩍 돌려 안았다.
그는 제 무릎 위에 앉힌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허공 중에 맞물린 두 사람의 시선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어느새 닿을 듯 말 듯 다가온 그녀의 콧날이 그의 뺨을 스쳤다.
붉은 꽃잎 같은 그녀의 입술에선 새콤한 살구 향이 흘러나왔다.
형운은 느닷없이 더위를 만난 사람처럼 이레의 말캉한 입술을 덥석 베어 물었다.
일순, 계곡을 따라 피어난 야생화의 향기가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청량한 바람이 그의 목덜미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맑고 시원하면서도 한없이 포근한 감촉.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황홀한 감각인지라.
형운은 나른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행여 그녀가 진실로 그의 마음을 몰랐다면, 모르는 채로 좋았다.
이미 알고 있다면, 그 역시도 좋으니…….
형운은 오른손을 들어 제 가슴팍을 짚고 있는 이레의 왼손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의 왼손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입술과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날을 세운 분홍빛 불꽃이 그녀의 입안으로 범람하였다.
수줍어 달아나는 그녀를 그가 집요하게 쫓았다.
숨고, 달아나고, 안달하는, 지극한 몸짓이 이어졌다.
기어이 아득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레는 마음의 결계(結戒)를 풀고 말았다.
그녀의 오른팔이 형운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뒤늦게 형운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그녀의 왼손은 그의 어깨에 단단히 못박혔다.
“전하…….”
가뭇하게 눈을 감은 이레의 잇새로 나른한 부름이 흘러나왔다.
형운의 입가에 둥근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그의 귓가에 쿵쿵 메아리쳤다.
명백한 생의 징표가 바로 곁에 있었다.
함께 하는 이 순간만으로도 기꺼우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밤하늘의 잔별을 움켜쥐듯 형운은 열두 폭, 화려한 비단 치마 안에서 휘청거리는 이레의 허리를 힘껏 감싸 안았다.
와스스, 행복이 유성(流星)처럼 떨어졌다.
***
한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기억나지 않는 꿈도 꾸었다.
행복한 꿈이었는가.
입가에 맺힌 웃음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잠에서 깬 이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어둠이 짙었다.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흐트러진 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뒤늦게 곁방의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흔들리는 촛불 위로 형운의 긴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길고 섬세한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참으로 곧고 단정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입가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이리 평온한 날이 올 줄 어찌 알았을까.
이레는 살얼음판을 딛는 듯 아슬아슬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칼날에 하얗게 밤을 지새우던 일들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고작 몇 달 전이었건만.
고되고 참담했던 과거가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형운과 이레를 향했던 사나운 시선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없이 동궁을 음해하고 저주했던 자들도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형운의 즉위를 반대하던 목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세상 속에서 도려낸 듯 조용하고 또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특히나 오늘은 풀벌레 울음마저 들리지 않으니.
지나치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이레는 깊은 적막에 잠긴 사위를 둘러보았다.
일순, 영문 모를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이 고요가 짐짓 꾸며진 가짜 같았다.
이 지나친 평화가 또 다른 전쟁의 서막 같았다.
왜 이런 마음일까?
왜 이리 헛된 두려움이 이는 것일까?
이레는 사나운 속내를 떨치려 머리를 저었다.
등잔불 너머, 크게 드리워진 형운의 그림자를 눈에 담으며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혔다.
찰나.
벽을 가득 채웠던 형운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느닷없는 상황에 놀란 이레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한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붉은 용포가 낙화하는 꽃잎처럼 너울너울 내리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레는 뱉지 못한 뒷말을 입안으로 도로 삼켰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까스로 붙잡노라니, 형운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아무것도 보지 마시오.”
펄럭.
허공을 유영하던 왕의 용포가 이레의 눈을 가렸다.
“잠시…….”
차캉.
날카롭게 맞부딪히는 쇠붙이 소리와 함께 다시 형운의 속삭임이 들렸다.
“아무것도 듣지 마오.”
황금빛 용을 정교하게 수놓은 비단옷은 이레의 양쪽 귀마저 막았다.
이레는 그렇게 용포로 만든 장막 속으로 깊게 잠기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홍색의 메꽃이 수줍게 망울을 맺고.
하얀 은하수가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풀벌레 울음조차 들리지는 않는 밤이었다.
진실로 평화롭고.
진실로 고요한.
초여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