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봄날의 민들레 (下)
-정말이냐?
김기대와 얽힌 한서로의 인연.
무료했던 듯 서탁 할아버지들이 관심을 보였다.
화 할아버지의 물음을 필두로 악과 예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여인을 네 오라비를 뭐라고 불렀다고? 운명이거나 인연이 아니고……정말 그리 불렀단 말이냐?
-정인(情人), 천수배필(天授配匹)…… 좋은 말 다 두고 그리 부르다니. 그 여인도 참으로 독특한 여인이구나.
-네. 범상한 여인은 아닙니다.
이레는 아침 일찍 자신을 찾아왔던 한서로를 떠올렸다.
송도의 귀한 댁 애기씨가 어쩌다 한양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찾는 중요한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것이 사람의 인연이고, 둥근 공처럼 돌고 도는 것 또한 인연이었다.
서탁의 할아버지들께선 언제나 헛되고 헛된 것이 사람의 인연이라 하셨다. 하지만 그 인연이라는 것이 한번 잡으면 쉽사리 놓지 못하는 것이라.
한서로 역시 진득한 미련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실낱처럼 가늘었던 사람의 인연을 달구고 또 달구어 운명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바위 앞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고, 또 때론 여러 갈래로 나뉘어 다시 가늘고 옅어질 수도 있을 터.
그렇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훗날, 그들이 피울 꽃의 색과 모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쯤 만났겠지?
상 할아버지의 글씨에 묘한 설렘이 깃들었다.
-글쎄요.
대답하는 이레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오라버니가 자주 다니는 길목, 툭하면 밤을 새우는 사헌부, 그리고 은자원까지…… 이레는 한서로에게 세밀하게 귀띔해주었다.
상 할아버지의 물음처럼 지금쯤 두 사람은 만났으려나?
어디서?
어떻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는 찰나.
-너무 앞서가지 마라.
악 할아버지가 찬물을 끼얹었다.
-뭔 소리를 하려는고?
상의 물음에 악이 대답했다.
-이 늙은이들이 이런 일엔 영 젬병이구나. 내가 많이 겪어봐서 아는데 말이지…….
-흥, 네놈 주제에 겪어보긴 뭘 겪어봐? 어디서 들은 거겠지.
상의 어깃장에도 악은 태연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보면 바다를 떠올리고, 개울물만 본 자는 바다를 말해도 개울물을 생각하는 것처럼. 네가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 역시 그리 살았다고 단정 짓는 건 옳지 않다.
-뭐야? 내가 그렇게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 네놈이 봤냐?
-안 봐도 뻔하다.
-이놈이!
-시끄럽다!
화가 악과 상의 싸움을 말렸다.
-너흰 지겹지도 않으냐? 어째 만났다 하면 싸움이냐?
화의 글씨가 사라지기 무섭게 예의 필체가 서탁을 채웠다.
-허허,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질 않소.
-누가 애들이야?
-너, 이렇게 늙은 애 봤어?
상과 악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건 그렇고…… 악, 말해봐라.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 거 같으냐?
화가 다시 물었다.
어쩐 일인지 상 역시 조용히 악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들 알지 않느냐. 꽃에 나비와 벌만 날아든다더냐? 가끔 쇠파리도 날아들지.
악의 유유자적한 말끝에 상의 필체가 달라붙었다.
-악, 그 쇠파리가 너라는 생각은 안 해 봤느냐?
-네 이놈!
상과 악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시끌벅적해진 서탁을 외면하고 이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하늘 중앙에 걸린 먹장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저 구름이 물러가고 나면, 언제나 맑은 달이 얼굴을 보이는 것처럼, 한서로와 기대의 만남 역시도 티끌 하나 없이 맑기를 염원하였다.
난관 없이 그저 아름답기를…….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것이 어찌 원하는 대로 이뤄질 것인가.
이레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난데없는 훼방꾼이 기대를 찾아가는 한서로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
“연모하오!”
느닷없는 고백에 한서로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새치름 눈매를 아래로 내렸다.
머리에 쓰고 있는 쓰개치마를 경계하듯 꼬옥 말아쥐는 모습이 여리고 곱기 그지없었다.
바라보던 사내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저리 수줍어하는 모습이라니.
그래, 본디 여인이란 저래야지.
마음 흡족해진 사내는 쐐기박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를 연모하게 되었소.”
“…….”
대답 대신 한서로는 주춤 반걸음 물러났다.
도성 최고의 개망나니 박지환의 입에서 저런 소릴 듣게 될 줄이야.
한서로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지환은 그녀가 물러선 만큼 다가왔다.
“놀랐소이까?”
너라면 안 놀라겠느냐?
얼굴도 모르는 사내가 불쑥 마음을 고백하는데.
게다가 지금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인지라.
한서로는 지금의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다.
사실, 아까 박지환이 연모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주먹이 나갈 뻔했다.
잘 참았다, 한서로.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한서로는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눈치 없는 박지환은 또다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대로 보낼 수 없소.”
“…….”
“얼마 전, 수월에서 낭자를 처음 본 그 순간! 낭자에게 이 가슴을 빼앗겨버렸다오.”
처음 본 그 순간이라…….
한서로의 며칠 전, 박지환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수월을 찾았던 박지환을 처음 본 그날…….
“아!”
한서로는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날 박지환의 가슴을 제 머리를 들이박았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다.
수월에는 신분의 귀천이 없으며, 사내와 여인의 구별은 물론 어리고 나이 많은 사람의 경계가 없으니.
그저 먼저 온 순서대로 물건을 팔겠노라 하였을 때, 박지환은 미친 듯 성화를 부렸다.
내 어머니께서 어떤 집안의 사람인 줄 아느냐?
내 아버지가 병조의 좌랑이니라.
내 외숙부는 호조에 몸을 담고 있으며 사돈의 팔촌은…….
박지환의 집안 자랑에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 입을 막기 위해 한서로는 녀석의 가슴에 냅다 머리를 박았더랬다.
그랬던 사이에 느닷없이 고백이라니.
“낭자, 내 아무리 낭자를 잊으려 몸부림을 쳐도 이 가슴이 낭자를 잊을 수 없노라 소리치고 있소.”
그 가슴, 다시 한번 들이박히지 않으려면 제발 잊어.
버럭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한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박지환에게 쓸 신경이 없었다.
‘벽사의 귀인을 만나지 못한다면 애기씨께선 북망객을 면치 못하실 겁니다.’
어젯밤.
거북 학사를 본 이후, 월채는 섬뜩한 예언이 뱅뱅 한서로의 귓전을 맴돌았다.
한양으로 오기 전.
놀이 내려앉는 오후, 마을 어귀에서 만났던 귀인의 눈동자.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다정했던 그 모습이 선했다.
드디어 길성이 귀인에게 이르는 길로 그녀를 안내하고 있었다.
한시가 바쁘건만.
마음 급해진 한서로는 박지환을 빤히 응시했다.
‘제발 좀 비켜줘.’
그 눈빛을 오해한 박지환은 용기를 얻은 듯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그러곤 흐음, 헛기침을 흘렸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그리 뭣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이 한양 땅에서 나만큼 잘난 사내도 또 없을 것이외다.”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보다시피 생김생김이 반듯하고 곱상하니, 나를 본 여인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도둑맞고 만다지 뭐요.”
저놈, ‘반듯’과 ‘곱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서로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박지환은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이런 나를 두고, 꽃의 마음을 훔치는 도둑이라. 꽃(華)과 양상군자(梁上君子)를 합쳐 화상군자(華上君子)라고 부른다 하오. 하하하.”
“화상군자는 무슨. 그냥 화상(畫像)이겠지, 이 화상아.”
“응? 뭐라 하였소?”
“아닙니다.”
서둘러 고개를 젓는 한서로에게 박지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내 마음에 대한 답을 달라는 건 아니오. 다만…….”
불현듯 박지환은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받아 주시오.”
“……?”
“내 낭자를 생각하며 몇 글자 적었소이다.”
한서로의 손에 반강제로 서찰을 쥐여준 지환은 어울리지 않는 홍조를 얼굴에 띄운 채 저 멀리 사라졌다.
“뭐야, 저놈.”
한서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찰을 펼쳤다.
이내 서찰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한서로는 박지환이 사라진 방향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이 자식아……!”
첫 글자부터 틀렸잖아!
연모(燕慕)가 아니라 연모(戀慕)라고!
***
한서로는 급한 숨을 몰아쉬며 잰걸음을 옮겼다.
박지환의 엉뚱한 고백을 듣느라 밤이 늦고 말았다.
이레가 일러준 곳으로 갔을 때, 이미 김기대는 그곳에 없었다.
듣자하니 사헌부 집의와 함께 소광통교로 걸음 하였다고 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다시 종종걸음쳤다.
이번에는 제발 그곳에 있으면 좋으련만.
길고 긴 시간, 찾고 찾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마음이 어찌 이리 조급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달 난 표정으로 한서로는 국밥집으로 들어섰다.
“여기 사헌부의 집의께서 동료와 함께 국밥을 먹으러 왔다던데?”
그녀의 물음에 국밥집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다녀가도 한참 전에 다녀갔소.”
“그래요? 그럼…… 어디로 가셨는지 아시오?”
“글쎄요.”
국밥집 주인은 말을 흐렸다.
마침 부엌에서 젖은 손을 닦으며 밖을 내다보던 안주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무섭게 생긴 분이랑 말 많은 선비님 말씀이시지요?”
“그렇네. 그 두 사람…….”
한서로는 반색하며 안주인이 있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가?”
“저기 피맛골 끝에 새로 생긴 음식점이 있어요. 거기 동치미 맛이 일품이라며, 말 많은 선비님이 앞장서더군요. 국밥 먹고 뭘 또 먹겠다는 것인지.”
양반네들 속내는 좀처럼 모르겠다며 안주인은 다시 부엌 안으로 사라졌다.
“고맙소.”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건넨 한서로는 숨이 턱끝에 차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보셨더라면 기함했으리라.
유모가 이리 뛰는 걸 알았더라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의 벽사화를 드디어 만날 수 있다면…….
달리는 한서로의 머릿속에 기대와 만났던 일이 덧칠해졌다.
측백나무 숲을 오른쪽에 끼고 골목을 달리던 그 날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
송도 최고의 가문의 애기씨가 몹쓸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입을 타고 전해졌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사람들의 입에선 어김없이 한서로와 관련한 일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어느날.
애기씨의 병을 낫게 해 주는 자는 은자 일백 만 냥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은자 일백만 냥!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과 욕망이 서렸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소문을 들은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대감 댁의 솟을대문으로 달려갔다.
가장 많이 찾아온 사람은 의원이었다.
침을 배우거나, 약재를 배운 자들은 어린 소년부터 등 꼬부라진 노인까지 찾아와 한서로의 병을 고칠 수 있노라 장담했다.
그다음으로 한 대감의 집을 찾은 이들은 무속인들이었다.
애기씨의 몸에 깃든 나쁜 귀를 몰아내면 당장에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큰소리 떵떵 쳤다.
연일 생경한 구경거리가 안채 마당에서 벌어졌다.
온갖 동물의 피를 뿌리며 귀를 몰아내는 굿판을 벌이는가 하면, 황지(黃紙) 붉은 벽사의 글을 쓴 부적을 집안 곳곳에 붙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애기씨의 병을 고칠 순 없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사흘, 나흘…… 한 달, 두 달…….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의 희망도 흐려졌다.
결국, 집안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사라졌다.
이제 한서로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 생각했다.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는 한서로뿐이었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처럼 예고없이 찾아오는 고열과 맞서 싸우던 한서로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대로 이부자리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늦은 밤.
그녀는 무에 홀린 사람처럼 집을 나섰다.
달빛을 조족등 삼아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고 했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옷가지를 사납게 할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무녀 월채가 말한 벽사화(辟邪畵)를 찾을 수만 있다면, 몸뚱이가 잘게 부서진다 해도 괜찮았다.
“길성이 이끄는 대로 간다면…… 길성이 안내해주는 대로 걸음한다면…… 귀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귀인을…….”
미친 듯 얼마나 헤맸을까?
결국, 돌고 돌아 그녀가 향한 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저 멀리 고택의 솟을대문이 보였다.
너른 걸음으로 이십 보 남짓한 거리.
벽사화를 찾지 못한 실망감과 안타까움에 느리게 몇 걸음 옮겼을까.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허리를 지나 곧장 등줄기를 치고 올라왔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제 몸을 어쩌지 못한 한서로는 실 끊긴 가오리연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머니!’
큰 목소리로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이 꽉 잠겨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또 고열이야?
아, 귀찮아.
*
“귀찮아, 귀찮아…….”
“뭐가 그리 귀찮소?”
머리맡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서로는 실눈을 뜨고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일순, 청수한 향기가 그녀의 턱밑으로 불쑥 다가왔다.
“정신이 들었습니까?”
“여기가 어딥니까?”
헉, 비명을 입안으로 말아 넣으며 한서로가 물었다.
“혹시…… 나를 납치한 겁니까?”
한서로의 당돌한 질문에 사내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걸렸다.
“어허, 내가 납치나 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한서로는 사내를 찬찬한 시선으로 훑었다.
검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는 검은 복면으로 눈 아래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이 납치범의 모습.
한서로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위아래로 뜨고 내리길 반복하던 사내는 뒤늦게야 자신이 복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차!”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복면을 턱 아래로 쑥 내린 뒤 사내, 김기대가 다시 물었다.
“어떻소? 이래도 납치범으로 보입니까?”
기대의 얼굴 표현.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쪽은 대체 뉘십니까?”
“길에 쓰러진 여인을 주운 정의의 선비.”
한서로의 반신반의하며 재차 확인했다.
“제 몸값을 노리고 절 납치한 거 아닙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여인이나 납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제가 여기 있는 이유가?”
“길에 쓰러진 여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한 선비의 너른 아량이라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그보다…….”
“…….”
“궁금한 게 있습니다.”
“궁금한 게 대체 무얼까요?”
한서로가 빤히 사내를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사내가 쪼그려 앉았다.
“괜찮습니까?”
“무어가요?”
일순, 사내의 손이 한서로를 향해 서슴없이 다가왔다.
“뭐, 뭐……?”
뭐하는 짓입니까?
소리 지르려는 순간.
크고 하얀 손이 한서로의 이마를 짚었다.
“아까 열이 펄펄 끓던데…….”
“……!”
뒤늦게 정신을 잃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렇지.
갑자기 솟구친 열기에 정신을 잃고 말았었지.
이번에도 한바탕 병치레를 하려는가 싶었는데.
한서로는 서둘러 제 이마를 짚었다.
“열이…….”
“떨어졌습니다.”
물끄러미 한서로를 지켜보던 기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일순, 거짓말처럼 사방이 환하게 느껴졌다.
*
“이야기가 그게 전부냐?”
장무열의 무심한 질문이 김기대의 아련한 추억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슨 뜻인가?”
“길에서 여인을 주웠다. 그 여인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헤어졌다……. 이 이야기가 전부였느냐, 물었다.”
“만남과 헤어짐이 있으니. 여기에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역시…….”
더는 들은 가치 없다는 듯 장무열은 피식,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웃음…… 뭔가?”
“네놈의 인생도 조금은 가엾구나. 여인이라기에 무에 대단한 이야기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군.”
“내가 가엾은 인생이라면, 자네는 안 가엾고?”
“시끄럽고 요란스럽기만 놈을 어디다 붙이느냐?”
“어이, 은호. 그래 봤자 동병상련이라는 거 다 알고 있으이.”
“동병상련이라……. 그리 믿고 싶다면 그리 믿어라.”
장무열의 미소가 더욱 선명해졌다.
기대가 그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봐, 은호. 그리 웃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 보게.”
“추억할 무엇도 없는 녀석과는 말 섞고 싶지 않다.”
“추억할 뭐가 없다니. 우연히 만난 여인과 아름다운 하룻밤을 보낸 나일세.”
“일장춘몽. 그야말로 하룻밤의 꿈이었군.”
“어허, 아니라니까.”
“아니라면? 그 후에 그 여인과 재회라도 했단 말이냐?”
허를 찌르는 질문에 기대는 변명을 서둘렀다.
“그, 그건 아니지만……. 뭐, 꼭 다시 만나야 하는가?”
“고작 하룻밤의 인연이니, 연모 같은 걸 쌓을 시간도 없었겠군.”
“은호, 자네가 뭘 모르는군. 인연의 깊이는 시간과는 상관없다네. 찰나의 순간이라도 억겁의 세월보다 깊은 인연을 쌓을 수 있지.”
“…….”
“왜? 못 믿겠는가?”
장무열은 대답 없이 유유히 자취를 감추었다.
“못 믿는가 보군.”
하긴, 나도 못 믿을 이야기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대는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때였다.
“저는 믿습니다.”
그의 맞은편으로 맑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먼 산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기대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 사이.
그의 앞에 유난히 하얀 얼굴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한참을 달렸는지 연신 밭은 숨을 쉬는 여인이 기대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찾았다!”
“……?”
“내 벽사화!”
한서로의 얼굴에 하얀 박꽃이 활짝 피어났다.